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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2화 (22/338)

# 22 < 바람이 분다 (7) >

***

진혁은 한때 최미경의 집에 얹혀 살았었다.

혼자 남겨졌을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구석에 웅크린 진혁을 다그치거나, 일부러 달래려 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애잔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나름의 위로로 비쳤다.

‘그래서 기억이 별로 없다.’

근 몇 년간 할머니는,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딸들 챙기느라 최미경의 집에 계신 날이 점차 줄었다. 정확히는 손주들 챙기느라 서울로, 대전으로 다니신다고. 그 이야기를 진혁에게 들려주며 최미경은 할머니 보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다.

- “고모네 언니 오빠들은 대학 가고 결혼도 해서 나이도 많은데!”

아마 최미경도 알면서 그랬을 거다.

자식이 많아 두루 챙기지 못하고 막내아들만 가르친 미안함을 전하려 늦게나마 딸을 챙긴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세상을 등진 딸의 빈자리를 할머니가 채워주려 분주히 다닌 정성을.

“야-, 이거 어떡하냐.”

평소 뛰어다니던 산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나름의 고민에 빠졌다.

말하자면 기연이고 신기한 일인데 가슴에 담아두었다가는 병이 날지도 모르겠다. 집 근처에는 대나무 숲도 없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곳 말이다.

‘그러지 말라고 하셨으니 참아야지. 미경이네가 제일 힘들 텐데.’

팔순을 훌쩍 넘겼다고 하나 그리도 건강하던 분이었는데. 기력이 쇠해서 막내아들 보고 싶다며 오신 분이 돌아오기 무섭게 자리에 누웠다.

조일헌이 그런 말을 했다.

- “평생 흙 만지구 퇴비 냄새 맡던 노인네가 도시 가서 워치게 살어-? 그거 버릇되먼 병 나는겨어-.”

조일헌의 절친이었던 박대순이 처자식을 데리고 야반도주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진혁의 집에 찾아와 박대순이 사라진 일을 하소연하다가 아주 우연히 나온 말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말이 그럴듯하다.

도시를 전전하며 할머니가 얻은 상사병 같은 건 아니었을까.

떠나시기 전 당신의 생을 줄줄 읊으신 것도 그렇다.

‘외로우셨던 거야.’

도시를 전전하며 자식과 손주들을 챙기다가 마음의 병을 얻고, 말벗 없이 외로움과 싸우느라 기력이 쇠하신 게다.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았다.

할머니 인생 곡절을 묵묵히 들어드린 것 말이다. 어쩌면 그로써 미처 풀지 못한 한을 모조리 털고 떠나셨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 장난도 치고 밝게 웃지 않으셨나.

‘인벤토리!’

기연인데 아무것도 안 주고 가셨네.

얻은 능력은 없지만 뭐, 착한 일 했으니까.

진혁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산을 내려가는 진혁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비 맞은 중 염불하듯 연신 중얼거렸다.

“······아공간 내복 생겨나라 생겨나라, 로또번호 주식정보 생각나라 생각나라······.”

중얼중얼-.

민망해서 괜히 뒷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누군가 뒤에서 비웃는 것만 같아 그쯤 하기로 했다.

***

“우리 장군이, 엉아가 안아주까?”

헤헤헥-?

무슨 소린가 싶었는지 장군이가 올려다보며 갸웃거렸다.

알아들으면서도 연기를 하는 걸 보면 똥개나 사자가 아니라 여우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말을 하지 못하는 놈이지. 진혁 마음대로 하기로 했다.

“읏챠-, 고놈 무겁네.”

묵직하지만 전혀 힘들이지 않고 들었다. 무게가 느껴지나 무겁지는 않은 아이러니한 감각. 역시 힘은 세고 볼 일이다.

진혁이 산에서 내려올 때, 장군이는 그 험한 산길을 짧은 다리로 오르고 있었다. 장염에 걸려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민용락 부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표정으로.

진혁에게 달려와 헥헥거리며 얼굴을 핥는데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바가 있는 법이니.

진혁은 장군이를 안고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의 조언을 곱씹으면서였다.

‘신나게, 재미나게 살라고?’

하루하루 가족과 사는 거 외에도 재미난 일이 또 있을까?

여름과 가을엔 온갖 과일을 따먹고, 겨울엔 고구마, 밤, 감자 구워 먹고.

하루가 다르게 열심히 자라는 몸뚱이라 그런지 먹는 게 가장 즐겁다.

다른 재미난 일은 살다 보면 생기려나.

“장군아, 넌 언제가 제일 즐겁냐?”

끼잉-끼잉-.

장군이가 버둥거렸다. 내려달라는 뜻으로 보였다.

땅에 완전히 내려주기도 전에 펄쩍 뛰어내렸다.

“달리자고?”

왈-!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진혁을 돌아보는 모습이 경주하자는 뜻 같았다.

역시 사람 말을 알아듣는구나.

“이기면 망댕이 두 마리!”

흐헤헤헥-! 다다닥-.

출발 신호도 하지 않았는데 장군이는 길을 벗어나 숲으로 사라졌다.

부정 출발에 코스 이탈까지.

경공술이라도 사용하는 개처럼 순식간이었다.

“느허허허-.”

제멋대로 유쾌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혁의 발이 힘차게 포장도로를 박찼다.

달릴 때가 제일 신나지. 뇌까리며.

***

조일헌이 경운기를 몰고 동네를 돌았다. 짐칸 가득 먹거리가 실렸다.

투명하고 얇은 비닐 도시락 케이스에 삶은달걀과 떡, 지짐, 과일 등을 넣고 고무줄로 봉한 것이었다.

이웃에 답례품을 돌리는 것이라 했다. 위로해주어 고맙다, 조문 오지 못해도 끼니 거르지 말아라, 그런 의미라고. 최장환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애사임에도 정겨운 풍경이었다.

동네 저학년 꼬마 아이들은 경운기 뒤를 신나게 쫓으며 간식을 한아름 챙겼다. 팽이를 치다가 왔는지 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와 팽이채를 든 녀석도 있었고,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옆구리에 낀 아이도 있었다.

누구도 꼬맹이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좋을 때다.’

아무것도 모르고, 근심도 없는 꼬마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주인 아닐까.

동네 어른들이 최미경네 집 마당에 천막을 여러 개 쳤다. 학교 운동회 날에도 운동장 한편에 설치해 사용했던, 마을 이름이 인쇄된 천막이다.

진혁의 가족은 장례 중에 최미경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유영은 음식을 함께 만들고, 청소를 돕고, 틈틈이 최미경의 어머니인 김순복을 다독여 위로했다. 아직 어린 딸 손유진을 포대기로 업은 채였다. 여전히 말수는 적었다.

손광연은 최장환이 힘들까, 대문 앞에 선 상주 곁에서 계속 말을 붙였다.

상주인 최장환은 누리끼리한 삼베 장례복을 입고, 굵고 긴 대나무를 두 손으로 잡아 정면 바닥을 짚고 있었다.

“형님 힘드시면 제가 교대를-.”

“아녀. 이거 원래 이렇게 허는 겨. 힘들어서 지댄 게 아니라니께?”

“아······.”

최장환은 상중임에도 손광연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충분히 잘살고 있지만 아직 배울 게 많은 동생이다.

두 남자는 함께 대문 앞에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조문객이 오면 최장환이 아이구- 아이구- 중후한 목소리로 작게 곡을 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는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처음엔 눈만 껌뻑거리던 손광연도 곡을 따라 했는데 최장환은 나무라지 않았다.

‘이런 장례식은 처음 본다.’

도시의 장례식에 익숙한 진혁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기름진 음식을 얻어먹으려 동네 개들이 기웃거리고, 한쪽에서는 아낙들이 쉴 새 없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했다.

윷놀이를 하거나 고스톱을 치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사람 많은 거 싫어하는데, 이런 건 좋다.’

좋아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푸근했다.

초상집에 사람이 많으면 좋다는 건 그런 뜻이었을까.

훈훈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일을 돕던 아주머니가 김은정의 아버지 손에 까만 비닐봉지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어이, 은정 아배! 이거 갖구가. 은정이랑 후남이랑두 멕여-.”

“어이구, 뭐더러 싸주구 그려-.”

“집이 가서 한 잔 더 헐 거 아닌감-.”

“갱개미 무침두 들은 겨?”

“당연한 소릴 허구 자빠졌네-.”

귀한 육회와 가자미 회무침, 떡과 부침까지. 반투명 흰색 비닐로 봉하고 까만 봉지로 한 번 더 씌운 것이었다. 시골 어른들은 대삿집에 육회와 가자미 무침이 없으면 배워먹지 못한 집이라고 흉을 보곤 했다. 여기에 뭐가 하나 더 들어가면 잔칫집 3대장이라고 했는데 소란스러워 제대로 듣지 못했다.

“소 여물 쒀 멕이구 또 올 테니께 어디 가지 말라그려-.”

봉지를 열어 아이들을 위한 동태전과 각종 부침까지 확인한 김은정의 아버지가 헤벌쭉 웃으며 돌아갔다. 오늘 밤엔 기필코 고스톱판에서 돈을 따리라 다짐하며.

진혁은 최태양과 함께 상을 차리고, 치우고, 쉴 새 없이 음식을 날랐다.

‘내 고향, 정말 좋은 곳이었구나.’

진혁은 위로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의 심경을 헤아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친구 최미경이 힘들진 않을까, 슬프지 않을까. 음식을 나르면서도 틈틈이 눈치를 살폈다.

최미경은 어머니 김순복을 따라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한데 묶어 검은색 댕기를 달았다. 검은색 머리핀을 꽂은 모습이 단아했다. 머리를 올리지 않아 비녀를 꽂지 않았다고 했다. 21세기를 살던 진혁의 눈에는 이색적으로 비쳤다. 다른 세계의 문화를 엿보는 듯 신기했다.

“우리 할머니가 나 태어났을 때 엉덩이를 너무 세게 때려서 아직도 파랗대. 여기 봐봐-. 너만 특별히 보여줄게-.”

“아, 안 봐도 믿는다.”

최미경이 치마를 들추려 했기에 진혁이 기겁했다. 친구의 치맛자락이 올라가지 않도록 단단히 쥔 채였다.

최미경은 첫날에는 많이 울더니 이제 괜찮은 것 같았다.

충혈되었던 눈은 언제 울었냐는 듯 흑백의 대비를 이루며 선명하게 빛났다.

“안 봤는데 어떻게 믿어?”

“······ 그런 게 있다.”

최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누나 믿는구나, 중얼거리며.

‘미경이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좋은 곳으로 가셨다는 사실 말이다.

진혁이 경험한 신비를 말해주면 친구의 슬픔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미경아 할머니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응. 선녀가 되셨대.”

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자만 알고 있으라더니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니셨나? 특별히 진혁에게만 긴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신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 할머니 그렇게 안 봤는데.

“어제 꿈에 할머니 나오셨어. 선녀 날개옷 입고 엄청엄청 이쁜 언니처럼 하고 오셨는데 딱 봐도 우리 할머니인 거야.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는데 인사하려고 오신 거 같더라. 엄마 아빠랑 오빠 꿈에도 나오셨대-.”

엄청을 강조하기 위해 두 팔을 크게 벌리며 꿈 이야기를 하는 최미경은 신난 모습이었다.

진혁은 최미경이 말하는 동안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꿈에 나오셨구나. 오해할 뻔했다.

곱게 차려입고, 젊은 모습으로 선녀바위를 통해 등선하신 것만 보더라도 할머니는 귀한 분이라는 뜻이겠지.

“-엄마가 그러는데 그래서 제사는 선녀바위에서 지낼 거래.”

“나도 가자. 제사 지낼 때.”

“그으래-.”

진혁에게 할머니가 생겼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자만이 귀한 대접을 받던 시대에 살았었다.

세상에 길들어, 진혁도 비슷한 기준으로 세상을 볼 때가 있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겠지. 선하게. 가족을 지키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번 생은 가족을 위해 살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섰다.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있던 진혁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최미경이 진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직 아침이라 사람 별로 없는데 더 놀자.”

“아, 나는 그게······.”

육개장이 너무 맛있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소고기뭇국도 있었는데, 진혁의 입맛엔 단연 육개장이 최고였다.

벌써 여섯 그릇이나 먹었는데 또 먹으면 이상하게 보려나?

그렇게 먹어도 배가 나오지 않고 화장실 생각도 없는 걸 보면 엄청 크려는 모양이다. 장군이를 생각해서라도 자제하기로 했다. 진혁과 함께 먹는 게 좋은지 매번 옆에서 부침개와 편육을 축내지 않았나. 더 먹으면 배가 터질지 모른다.

진혁은 입맛을 다시고 쪼그려 앉았다.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어서 점심시간이 왔으면 좋겠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꽃상여를 보며 진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으으으아함-.”

육개장과 밥, 고기와 전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하품이 나왔다. 역시 운동을 하지 않으니 몸이 축 처진다. 집도 가까운데 한숨 자고 올까, 집이 있다는 건 역시 좋은 거야. 따끈한 아랫목, 까맣게 그을린 장판에 누워 이불을 푹 덮고 땀을 빼던 날이 그립다.

“졸리면 2층 내 방에 올라가서 한숨 잘래?”

“아니다. 나도 방 있다.”

최미경이 푹 한숨을 쉬었다. 손진혁 방이 더 좋긴 하지.

“봄방학은 숙제 없어서 좋았는데. 벌써 6학년이네. 세월 참 빠르다.”

“······.”

점점 그 시간이 빨라진다는 걸 알면 이 어린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믿지도 않겠지. 확실히 아이로 지내는 동안은 시간이 느리다.

‘방학이 좋긴 하지.’

온종일 가족과 지낼 수 있으니까.

사흘 후면 개학이다.

흐흐헤-.

진혁의 옆에 누워 꼬리로 바닥을 쓸던 장군이가 앞발에 턱을 괴었다. 커다란 눈동자만 위쪽으로 굴려 아쉽다는 시선을 보냈다. 어찌나 많이 주워먹었는지 만삭으로 보일 정도로 배가 불룩하다.

바람이 불었다.

흙냄새를 실은 바람에 봄을 알리는 온기가 묻어있었다.

두 친구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커 간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예전엔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동질감이다.

“우리 할머니 냄새난다.”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히죽 웃는 최미경의 눈시울이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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