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 바람이 분다 (2) >
제 욕을 하나 싶어 눈꼬리를 세웠던 최미경이 급변한 진혁의 안색에 덩달아 창백해졌다. 속으로는 애늙은이라며 투덜거리지만 소꿉친구 아닌가. 한 번도 싸우는 일 없이 친오빠보다 더 오빠처럼 저를 챙기는 사람이 손진혁이었다.
“왜! 뭔데! 야! 육성찬! 너 이 새끼 일루와. 진혁이한테 뭐라고 했어?”
“아, 아녀! 그런 거 아녀!”
“뭐가 아닌데! 너 말 안 할래?”
“아니라고! 넌 물러두 뒤여 이늠 지지배야!”
마침 갈림길이었다. 안쪽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육성찬이 자전거를 밀며 재빠르게 내뺐다. 자전거를 타면 될 텐데, 아마도 올라타는 순간 잡힐까 두려운 거겠지.
육성찬의 가방 속, 빈 도시락통에서 숟가락이 딸그락거렸다.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인데도 도시락을 싸 와서는 기어이 까먹는 육성찬이었다. 그 허망한 소리가 휑한 들판에 길게 퍼지며 진혁의 가슴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최미경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진혁아, 뭔데 그래?”
넌 몰라도 돼.
성찬이 말 들으렴. 알아도 좋을 게 없어요오-.
진혁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목이 시려 옷깃을 세웠다.
“진혁아아-, 뭐냐고. 응? 궁금해 죽겠네.”
애들은 가라.
넌 남자 마음 몰라.
***
아침을 먹고 어깨에 유진이를 태웠다.
아기들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던데 유진이는 목말 타는 걸 참 좋아한다. 어쩌면 오빠를 좋아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까하하-.”
빠악-빠악-!
신난 유진이가 손바닥으로 머리를 마구 때렸지만 진혁은 개의치 않았다. 아기 손이 원래 이렇게 매운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살다 보면 머리에 혹도 나고, 피도 나고 그러는 거지. 아픈 만큼 크는 거 아니겠나. 오빠의 발육을 돕는 참으로 천사 같은 동생이다.
‘매우 쳐라! 이 오빠는 튼튼하다!’
그나저나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부모님이 수상하다.
풀벌레가 잎사귀를 갉듯 사각사각 대화하고 계시지 않은가. 평소 또박또박 대화하던 분들인데. 정신을 집중하고 청각을 최대로 끌어 올려도 들리는 것은 사각거리는 소리뿐. 초식동물이 되신 건 아닐까.
“진혁아-.”
다정한 아빠의 음성.
엄마는 찻잔을 입에 대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실 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진 걸 보니 언짢으신 건 아닌 거 같고. 도대체 뭘까, 이 불안감은. 보일러 빵빵하게 돌아가는데도 가슴에 스미는 바람이 차다.
혹시 육성찬이 말한 그건가.
“아빠랑 점심에 돈가스 먹으러 갈래?”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맙소사, 올 것이 왔구나.
아마 인생 1회차였다면, 새로 뽑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읍내 레스토랑에 가서 경양식 돈가스를 먹을 생각에 신났을 거다. 돈가스 먹었다고 일기도 쓰고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에 들떴겠지.
하지만 어림없다. 손진혁은 녹록한 12세가 아니다.
‘어쩐다?’
엄마와 아빠의 인자한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냅다 꽂혔다.
유진이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렸다.
“어버버- 오빠! 옵! 빠!”
유진이가 큰 눈을 데굴거리며 두 팔을 뻗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방 뛰었다. 오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모습에 진혁은 피눈물 나는 심정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유진아, 지금은 때가 썩 좋지 못하구나.’
진혁은 미끄러지듯 뒷걸음으로 현관으로 갔다. 마이클 잭슨 뺨치는 실력이었다. 발가락에 슬리퍼가 감지됐다. 이게 아니야, 서두르면 안 된다.
다시 더듬으니 엄지발가락에 운동화가 걸렸다. 옳지.
나는 돈가스가 싫어요, 나는 돈가스가 싫어요.
맛있겠지만 아무튼 싫은 것이에요.
뜨겁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수없이 대사를 연습했다.
아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혁이 어디가니? 돈깟-.”
“까기 싫단 말이에요!”
첫 반항이었다.
호르몬의 명령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아빠에게 잡힐세라 후다닥 달려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장군이가 진혁의 뒤를 따랐다. 역시 장군이가 최고다.
“가자! 장군아!”
자포를 찾아서. 아니, 자유를 찾아서!
오르막을 힘차게 올랐다. 팔다리를 휘저으며 겨울바람을 닮은 서늘한 심상을 가슴 한편에 아로새겼다. 여름 방학 때 급히 개화한 감수성의 영향인 듯했다. 오호라! 시인들의 감성을 알 것 같다. 이토록 절절 끓는 심정으로 명문 시구를 남기는 것이로구나.
「 제목 돈가스.
5학년 1반 15번 손진혁.
매일 씻는데
안 까도 되는데
냅두면 지가 까지는데
예전에도 그랬는데
쓸 일도 없었는데
반팔십 넘어 고래사냥이 웬말인가
아빤 내 맘 조또 몰라」
휘이잉-.
바닷바람, 저수지 바람, 산바람, 휑한 들판에서 부는 바람.
매일 달리는 진혁에게 바람은 장애물이 아니다. 오히려 호흡을 돕고 명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에헷취!
겨울엔 조금 춥지만 견딜만했다.
아무렴, 돈가스 한 접시와 달릴 수 있는 자유를 바꿀 순 없지. 그리고 창피하단 말이다. 어그적 걷는 꼴을 보면 엄마가 얼마나 웃으시겠냐고. 이해원도, 김은정도 와서 어디 한 번만 보자며 놀리겠지. 최미경 어린이는 소꿉친구니까 특별히 두 번 보여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되바라진 녀석들. 육성찬은 잘 깠으려나? 많이 아픈가?
‘강진수가 깠을 때 교실에 난리가 났었지······.’
작년 초였던가.
강진수를 향해 마구 달려들던 학급 어린이들을 떠올리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서른 명인 학급에 여학생만 스물네 명이다. 남자아이 하나가 전학 가고 여학생이 전학 와서 그리 되었다.
‘까면 진짜 조때는 거다······.’
강진수도 보여줬으니 너도 보여야 한다며 이상한 형평성의 논리를 들이댈 녀석들이다.
끼잉끼잉-. 장군이가 처량한 개소리를 냈다.
개도 추워하는데 진혁은 씩씩하게 버텼다. 따뜻하게 입고 나오길 다행이었다. 그래도 엉덩이가 시려서 명상은 그쯤 하기로 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때였다.
진혁아아아아-.
메아리. 엄마 목소리였다.
메아리를 들으니 아홉 살, 그믐날 바닷가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아, 엄마······. 우리 엄마.’
목이 컥 막히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게나 소중한 분들인데. 그냥 못 이기는 척 한 번 깔까?
늘 달리던 길을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걸었다. 고독한 겨울 남자에게 운명이란 이토록 모진 것인가.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진혁의 가슴에 바람이 불었다.
‘눈 딱 감고 바지 한 번 내리지 뭐.’
사형수의 심정이 이럴까.
역시 집 있는 사람이 갑이다. 여름이었다면 최대한 버텼을 텐데. 아, 그래서 겨울에 까는 건가. 감염이니 뭐니 해서 겨울을 선호한다지만 어쩌면 가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어른들의 수작은 아닐까.
별빛보다 시린 번뇌에 휩싸인 영혼에게 명상의 효과는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머머! 오호호호호호호!”
부모님이 눈물을 쏟으며 웃었다.
진혁은 진지한데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닌가. 기분 상하려고 하네.
“하, 짜식. 따끈한 돈가스 사주려고 그런 건데 오해를 했구나?”
“둘이서만 가자고 하시니까······.”
“엄마는 유진이 봐야지. 아직 어린데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그랬지.”
아, 그런 거였습니까.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경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아빠 혼자 읍내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포장해 오셨다고 했다.
음식은 차갑게 식었지만 네 식구가 함께 먹으니 즐거웠고, 무엇보다 오해가 풀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원래 드시는 양이 많지 않은 편이고, 아빠도 배부르다며 먼저 일어나셨다. 진혁은 엄마와 아빠가 남긴 돈가스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소스와 어우러진 경양식 돈가스가 너무 맛있었다.
어디서 풀벌레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접시까지 핥아먹느라 진혁은 듣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해봐야겠어요.’
‘그래요. 우리 아들 너무 약아요.’
‘아, 이 녀석 너무 빠른데 잡을 수 있으려나.’
‘오빠가 더 빠르지 않아요?’
‘글쎄요.’
‘혹시 모르니 도망치기 전에 잡으면 되죠.’
‘진혁이 힘도 세요.’
‘오빠, 차라리 의사를 집으로 부를까요?’
왠지 엄마가 더 적극적인 집이었다.
그러나, 손광연과 한유영의 계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진혁의 빠른 발 때문이었다.
까지 않기 위해 전생부터 그토록 달렸나 보다. 오늘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시상이 마구 떠올랐다.
일주일간, 아침저녁으로 시골의 겨울 하늘에 진혁의 처절한 외침이 비행운처럼 늘어졌다.
“냅두면 지가 까진다니까요오오오-!”
***
사각사각-.
저 소리만 들리면 진혁은 모골이 송연하다. 유진이가 젖니로 사과를 갉아먹는 소리인데도 괜히 다리를 오므리게 되지 않나.
부부는 고민이 깊어졌다.
지금도 늦은 감이 있는데 앞으로 진혁이 더 성장하면 더욱 힘들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 근데 정말 지가 까져요?’
‘아, 그렇기도 한데요······.’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도 까지셨던데요?’
아, 그러고 보니.
손광연도 병원에 데려가 줄 사람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병원 안 갔네요.’
‘어머? 정말요? 어떻게 까졌지?’
그럼 안 가도 되고 안 까도 되는 거 아닐까.
대화하다 말고 왜 얼굴을 붉히는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진지한 부부였다.
부따다다당-.
마당에 들어서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쌍쌍이 정답게 사각거리던 남자 풀벌레가 현관을 열었다.
안마을에 사는 육성찬의 아버지였다.
“지넥 아빠, 우리 승찬이 뭇봤슈?”
“성찬이요? 글쎄요? 추석 때 놀러 온 후로 못 봤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성찬 아빠?”
“하, 이늠 새끼가 돈가스 먹으러 가자니께 냅다 도망을 쳤슈우-. 날두 추운디 어딜 간 거여, 이 썩을늠으 새끼.”
육영구가 담배를 꺼내 물었기에 손광연은 현관문을 닫고 마당에 나갔다.
“근디 지넥 아베 말이유. 그 지넥이는-.”
“예.”
후- 담배연기를 내뿜느라 육영구가 잠시 뜸을 들였다.
“깐규?”
“아하하, 저희는 그냥 두려고요. 진혁이는 아침저녁으로 잘 씻기도 하고······.”
아빠 만세!
2층 방에서 아빠들의 대화를 듣던 진혁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치열한 전술 공방이 오갔던 7일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다 이루었다.’
곧 방학을 맞아 홍기준의 가족이 내려올 테고. 아이들 성장 스토리를 공유하는 두 부부였기에 고래사냥 모험담이 서울 사람들 귀에 들어갈 것이 뻔했다. 그랬다면 홍수정이 보여달라고 졸랐겠지. 그러고도 남을 꼬맹이다. 보여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을 홍수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혁은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어질어질하군.’
진혁의 승리다.
이제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편히 숨 쉴 수 있다.
진혁은 살며시 창문을 닫았다.
“아, 이늠 새끼 잘 씻지두 않는디. 꺄야는디 어딜 간겨어-.”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은 육영구가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이만 가유잉?”
“예. 살펴 가세요. 너무 걱정 마세요. 추운데 금방 들어오겠죠.”
오토바이 소리가 멀리 사라졌다.
진돗개 해제.
“친구야, 아버님 가셨다.”
“아효오-, 십년감수했네.”
가슴에 신발을 품고 침대맡 구석에 숨어있던 육성찬이 꾸물거리며 나왔다.
육성찬은 배가 고팠는지 책상 위의 과자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와, 진혁이 방 너무 좋다. 콤피타두 있어. 이건 언제 산 겨?”
“작년에 서울 사시는 삼촌이 사주셨어.”
홍기준이 선물한 XT급 데스크탑 PC였다.
이륙하는 비행기보다 빠르다고 TV에 대대적으로 광고하던 그 모델. 프로 엘리트. 전원 버튼을 누르면 드륵드륵 떨고 비프음을 난사하며 시동이 걸린다.
페르시아 왕자, 인베이더스, 너구리 등등. 게임이라는 걸 해볼까 싶어 임형섭이라는 반 친구가 준 디스켓을 넣었다가 예루살렘 바이러스만 신나게 퇴치했다. 백신 만든 놈이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모든 디스켓에 심어져 있었다.
바이러스도 못 잡으면서 십자군 할배들은 도대체 왜 그 난리를 친 걸까.
육성찬이 키보드를 투닥투닥 두들기며 진혁을 보았다. 게임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 맨날 놀러 와도 되간?”
“응. 놀러 와.”
어차피 진혁은 느려터진 PC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친구들 놀게 해주면 인심도 얻고 좋을 것 같았다. 과자도 먹지 않으니 친구들이나 먹으라고 해야지. 다시 살게 되니 이런 재미도 알게 되어 너무 기뻤다.
육성찬은 창문을 통해 테라스로 나간 다음, 진혁의 부모님께 들킬세라 옥외 계단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열흘이 넘도록 놀러 오지 못했다.
육성찬 어린이는 깐돌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잡혀 까고 말았다는 슬픈 전화를 받았다.
육성찬은 자전거 안장에 도저히 앉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 지넥아,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우는 겨. 으흐흑-. 양파 깔 때, 마늘 깔 때······.
육성찬 깐돌이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듣지 않아도 진혁은 뒷말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추 깔 때.’
그 슬픈 메아리가 진혁에게는 겨울바람보다 시렸다.
방 안에 있는데도 불구,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겨울 남자 손진혁이 옷깃을 세웠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굳게 다짐했다.
‘난 두 번만 운다.’
방문과 창문까지, 꼼꼼히 문단속을 실시했다. 물샐틈없는 경계태세였다. 자고 일어나 보니 깐돌이가 되어 있었다던 강진수의 말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육성찬 깐돌이의 흐느낌이 악령의 울음처럼 떠나질 않는다.
창문을 토독토독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유난히 포근한 겨울, 하늘도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