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6화 (16/338)

# 16 < 바람이 분다 >

***

유치원생 홍수정의 통곡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혁은 잠시 마당에 머물며 홍기준의 차가 사라진 언덕을 바라보았다. 뱀굴 안으로 사라진 뱀 꼬리처럼, 진혁의 망막에 꼬맹이의 자취가 아른거린 탓이었다. 일컬어 미련이라고 하던가. 방학 때마다 달라붙어 정든 탓이겠지.

매일 밤 베개처럼 내어주던 왼쪽 팔을 빙빙 돌려보았다.

허전했다. 가벼움이 주는 괜한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해방이다. 대한독립만세!’

부러 한껏 기지개를 켰다.

유진이를 안은 아빠가 한 손에 종합선물세트를 들었다. 홍기준이 이웃과 나누라며 사온 선물이다. 엄마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허락을 구하듯 말했다.

“태양이네 놀러 갔다 올게요. 오랜만에 태양이 얼굴도 볼 겸.”

“네, 다녀오세요.”

최태양은 진혁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최미경의 오빠다. 벌써 고등학생이라 진혁은 그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씨름으로 이름을 날리는 형이어서 늘 합숙훈련장에서 지내는 탓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르는 날이면 가까운 이웃인 진혁의 집에도 얼굴을 비추며 안부 인사를 전하곤 했다.

‘그 양반이 나중에 아마 백두장사까지 하던가?’

키 큰 근육질 장사였다. 설날 천하장사 씨름대회였던가. 최태양은 상대 선수의 푸짐한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깔려버렸다. 그 모습이 진혁의 뇌리에 워낙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웃겼지.’

그때 들배지기에 이은 밀어치기가 아니라 잡치기를 시도했어야 하는데. 진혁이 진지한 얼굴로 과거를 회상했다. 이웃이었으며 친구의 오빠였으니, 스모 선수에 비견될 상대에게 짜부라진 최태양의 모습이 마음 아팠다. 그때 최태양이 서른다섯 살쯤 됐었던가.

뭐, 재미는 있었다.

슬리퍼를 훌떡훌떡 벗어버리고 평상에 몸을 날렸다.

홍수정이 울며불며 강탈한 진을 회복하자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휘유-, 회심의 한숨을 날리고 평상에 앉아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장군이가 발가락을 핥는 느낌이 재미있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느허허, 간지러워.”

턱을 당겨 발을 보니 주인을 닮아 발톱도 내성적이다. 어쩐지, 요즘 달릴 때 엄지발가락에 찢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더라니.

‘나도 어지간히 둔해.’

강도 높은 운동에 혹사당하느라 진혁의 발은 편할 날이 없었다. 진혁은 굳은살 박이고 발톱이 파고든 발가락을 위로하듯 매만졌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되찾은 평화가 기껍다 하나, 언제까지 이리 쉴 수는 없는 노릇. 평상에 숙제거리를 좌르륵 늘어놓았다. 방학 내내 서울 꼬맹이와 유진이를 데리고 노느라 숙제가 꽤 밀려 있었다.

‘야근 각인가.’

이미 또래 열두 살 아이들보다 훌쩍 커버린 진혁이었다. 그러나 진혁에게는 쑥쑥 크고 싶은 커다란 욕심이 있었다. 운동과 명상을 통해 식욕과 수면욕을 극대화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불가에서 이르기를 사람에게 세 가지 욕심이 있다 하였으니. 진혁도 인간인지라 삼욕이 없을 수 없었다.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欲, 나머지 하나는······.

“아파 시꺄!”

······장군이 욕.

헤헤헥-.

진혁의 발이 구수했는지 장군이가 야무지게 한 입 깨물었다. 광견병 예방접종을 마친 녀석이고 가장 소중한 친구였으니 너그러운 진혁이 용서하기로 했다.

아무튼, 쑥쑥 크기 위해서는 잠을 포기할 수 없다.

숙제를 빨리 마쳐야 하는 이유였다.

‘정시 퇴근한다. 낙오자는 버리고 간다.’

굳게 다짐한 용사 진혁이 검을 뽑았다.

용사의 손에 쥔 몽당연필이 유려한 검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긋는 선은 마치 자를 댄 듯 반듯했고.

‘이건 비행기, 이건 개구리, 이건 장군- 아아, 강아지. 이건 아기, 우리 유진이보다 안 이쁘네.’

단 일필로 그림과 글자를 잇는 작대기를 날리니 정답 아닌 것이 없었다.

검지로 태양혈을 점하며 암산을 함에, 범인이 감히 오차를 찾을 수 없는 경지였다.

‘칠 곱하기 사는 이십팔. 산수는 쉽지.’

그 누가 장장하일長長夏日의 성하지열盛夏之熱을 두렵다 하였는가.

발바리에게 발 청소 시중을 받으며 느티나무 그늘에 배 깔고 엎드리니 여기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이요, 뻐근한 목을 잠시 들어 대지를 아우르니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오감을 희롱하는도다.

숙제를 마친 진혁이 상체를 세워 꿇어앉았다.

한 호흡에 모든 적을 제압한 고수였으나 적이 너무 많아 심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엎드려 한 자세로 내리 숙제를 처리했더니 명치가 답답하다는 뜻이다. 주화입마를 방지하기 위해 호흡을 골랐다.

후우우우-.

그때였다.

“어? 숙제 하나 남았네?”

불구대천의 원수가 형형한 문구로 진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글짓기. 주제는 「두근두근 여름 방학」

‘음······, 글짓기는 어려운데.’

백일장과는 인연이 없던 진혁이었다.

일기도 그렇다. 글씨체는 둘째 치고 내용이 너무 어른스럽다며 아빠가 대필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곤 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글을 잘 쓴다고 하지 않던가. 예로부터 진혁이 쓴 글은 건조해서 닳고 닳은 무생물처럼 느껴진다는 평을 듣곤 했다.

‘팩폭 시부레.’

그들의 평은 틀리지 않았다.

논리와 정보에 근거해 설득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특화된 두뇌였으니, 오히려 정확한 비평이라 할 것이었다.

기획안 작성에 특화된 무생물은 만능 조력자를 소환하기로 했다.

하단전을 개방하고 중단전에 힘을 모았다.

“엄마아아아아아아-.”

***

어쩌다 이리 된 걸까.

단지 엄마에게 글짓기를 도와달라고 했을 뿐인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 거머리도 이런 거머리가 없어.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거야. 아니 근데 이 오빠가 잘 곳이 없다는 거 아니겠니? 어쩌겠어, 밖은 어둡지, 비는 오지. 한여름에 모기 뜯기도록 밖에 재울 순 없고, 주위에 다른 집도 없었어. 서울 사람이라고 겁은 또 많아서 밤그림자만 보고도 기겁을 하는 사람이었어. 무슨 남자가 그리 겁이 많은지. 그게 또 귀엽긴 하더라. 아무튼 그래서 엄마 방에 재웠지. 아직 우리 진혁이가 어려서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엄마가 가난해져서 집도 허름하고 다른 방이 없었거든. 그런데 엄마가 잠든 줄 알았는지 아빠 손이 거미처럼 슬금슬금 엄마 팔을 타고 올라오는 거야-.”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사정은 어린 아들에게 말 못한다는 분이 왜 이러시는 걸까. 아무래도 엉뚱한 각도기를 꺼내신 느낌인데.

저, 저기요. 잠깐만요. 진혁이 어버버거리며 손을 내둘렀다.

“어, 엄마-.”

“아이, 참. 더 들어 봐. 그래서 엄마가 아빠 손을 뿌리쳤어. 그랬더니 이 오빠가 홱! 삐쳐서는 옆으로 돌아눕는 거야. 진혁이 외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남자는 끈기가 있어야 한대. 그래서 엄마가 아빠 등을 툭툭-.”

아빠의 끈기 향상을 위해 재도전 기회를 부여하셨다는 뜻일까.

우리 엄마가 말을 이렇게 잘하시는 분이었구나. 진혁이 뭔가 묻기 전엔 말을 하지 않으시니 몰랐던 사실이다.

진혁의 영혼은 광활한 우주 공간 어디쯤을 배회했다.

초점을 잃고 추락한 눈동자와 함께 손에 쥔 몽당연필도 하릴없이 갈 곳을 잃었다.

‘이거······ 써도 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열두 살 방학 숙제로 제출할 소재는 아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나 김유정의 동백꽃 정도라면 선생님이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이건······ 메밀꽃 필 무렵인데?’

청취 가불가 사이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자체 검열을 하는 엄마였지만, 직설적인 진혁의 표현력으로는 구현하기 힘든 소재였다. 왜 엄마는 글짓기 소재를 달랬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 아, 엄마는 여름날의 추억이 많지 않으신 모양이구나. 진혁은 그리 여기며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최대한 귀담아듣지 않으려 애썼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진혁의 표정이 이상해서였을까, 봄바람처럼 귀를 간질이던 부드러운 음성이 잦아들었다. 엄마의 입술이 닫힌 것이다.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하던 엄마가 조용해지니 매미 소리만 남았다. 그 매미 소리가 진혁을 꾸짖었다. 불효자식이라고.

‘아, 듣는 척이라도 해드릴 걸.’

진혁은 저 때문에 엄마가 말을 멈추신 거라 생각했다. 청자가 집중하지 않으면 화자는 감흥과 열의를 잃거나 심한 경우 상처도 받는다지 않던가. 매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불효자식이 된 것만 같았다. 엄마는 평소 말벗도 없는데. 최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엄마를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핀 새하얀 뭉게구름이 엄마의 맑은 눈에 담겨 있었다.

발그레 달아오른 볼, 나른하게 하늘을 응시하는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

자기만의 세계로 접어든 영혼만이 지을 수 있는 아련함이 묻어났다.

결코 서운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진혁은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모조리 밀어냈다.

“그냥, 다른 거 쓸게요.”

엄마는 듣지 않고 있었다.

그저, 글짓기 주제에 맞게 두근두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

아빠는 대학물 먹은 분이니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아주 달이 밝은 밤이었지. 구름 한 점 없었는데 갑자기 비가 오는 거야. 나는 처마 밑에서 우뚝 서서 당신의 밤을 지키겠노라 그리 맹세했지. 아빠는 사나이니까. 그런데 네 엄마가 아빠 손을 잡아끌고는-.”

두 분이 기억하는 버전이 다른 듯했다.

다만 표정은 비슷했다.

“아, 아빠-.”

“가만있어 봐. 여기부터 죽여 준다? 아, 이 아가씨가 아빠가 괜찮다는데도 극구······. 그러다 비를 좀 맞았는데 한 떨기 꽃처럼 청초한 모습하며, 방에 스미는 달빛에 비친 잘 빚은 도자기 같은-.”

으아아아악-. 진혁은 귀를 막고 마을 회관으로 도망쳤다. 가슴에 뜨거운 바람이 훅훅 불어닥쳤다. 장군이가 급히 진혁을 따랐다.

‘아빠 장르는 위험하다!’

관능이 지나치지 않은가.

몰래 숨어 책을 보시기에 기보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즐거운 새라······. 아니, 그 책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출간되었다면 매스컴이 이리 조용할 리 없지 않은가.

도저히 못 말리는 부모님이라며 진혁은 원망을 삼켰다.

‘잘들 만나셨구먼!’

망했다.

두근두근이라는 제시어 때문에 숙제도 못하고 이상한 소리만 실컷 들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원고지를 펼쳤다. 보아라, 결국 야근이다.

유진이와 장군이를 소재로 글짓기 숙제를 했다.

「아기는 초능력자였다. 눈이 시리도록 휘영청 밝은 달이 온 세상의 주인임을 과시하는 여름밤, 잠 못 이루던 아기는 개 짖는 소리에 뚜벅뚜벅 걸어 문밖을 나섰다. 구름 한 점 없음에도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비에 불어난 개울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제힘으로 건너지 못하는 개가 아기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짖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더······.」

절로 하품이 나오는 문장이었으나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갈수록 메말랐던 감수성이 조금씩 솟는 기분이었다. 슬슬 호르몬의 도움을 받는 느낌이랄까. 뭐, 세계관을 보니 엄마와 아빠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여름 방학이 끝난 후 손광연은 담임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 아버님, 자식 사랑이 대단하신 건 워낙 유명하시니 이해하는데 숙제는 아이 스스로 하도록-.

“······?”

손광연은 억울했다.

로맨스를 읊어주었는데 아들이 판타지를 제출한 까닭이었다.

***

가을걷이를 마치고 물을 받아 둔 논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지직거리는 스피커가 할아버지 잠꼬대 같은 교장 선생님 훈화를 실어날랐다.

종업식이 끝나고 방학을 맞아 신난 한마을 아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으로 향했다.

겨울방학을 맞은 5학년 손진혁도 마찬가지였다.

진혁의 오른쪽에 최미경이, 왼쪽에 육성찬이 자전거 핸들을 잡고 함께 걸었다.

육성찬은 진혁의 집보다 더 깊이 들어간 바닷가에 사는 어린이다.

육성찬이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지넥이 오늘은 왜 안 뛰어가?”

그냥.

오늘은 좀 걷고 싶네. 차가운 시골 남자의 겨울 감성이란 이런 걸까.

······ 하늘이 파랗다.

“지넥이 방학 때 뭐 헐라고?”

동생이랑 놀아야지.

요즘 오빠라는 말도 또박또박하는데 너무 예쁘다. 30개월 되어가니 어엿한 영유아 포스를 풍기는데 미스코리아 대회에 내보내면 부전승으로 진을 차지할지도 몰라.

“야! 손진혁! 누가 물으면 대답 좀 하라고!”

최미경 어린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 미안하게 됐다. 긴히 고민할 게 있어서.”

뭐라는 거야, 이 애늙은이가.

최미경이 눈을 가늘게 떴고 육성찬이 콧물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넥이두 고민이여? 나두 그거 고민이여.”

“친구는 무슨 고민이 있지?”

얘도 회귀자인가? 코 흘리는 거 보면 아닌 거 같은데. 아무렴, 회귀자는 눈물을 흘릴지언정 콧물은 흘리지 않는 법.

너도 호르몬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관조 중이니. 진혁이 들리지 않게 중얼댔다.

최미경은 진혁의 말투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함께하는 하굣길은 즐겁지만 애늙은이 말투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탓이었다.

“나 있잖어······.”

육성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최미경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는 까치발을 서서 진혁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왜 진혁만 이리도 키가 클까 생각하면서.

‘너 최미경 어린이 좋아하니? 왜 귀엣말을 하려는 거냐.’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이해원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진혁이 엉뚱한 생각을 하든 말든 육성찬이 손으로 가린 입을 달싹였다.

속닥속닥-.

맙소사.

진혁의 낯빛이 하얗게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