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 대마법사 (5) >
***
“오빠아-! 징역 오빠아아-!”
빼애애애액-.
저 꼬맹이 홍수정이 기어코 대성통곡을 한다. 유세라에게 허리를 잡혀 발버둥치니 신발이 날아가는데도 좀체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라도 제대로 부르면 좋으련만.
‘아이고 머리야.’
꼬맹이 홍수정은 밤새 손진혁을 끌어안고 잔 것으로 모자라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진혁도, 유세라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이럴 땐 엄마가 달래는 수밖에 없다.
“수정아, 열 밤만 코- 자고 다시 오빠 보러 오자.”
아,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처참히 부수던 열 밤 공약이 등장했다.
공약이행율 0.01%에 육박하는 악명 높은 제안 아니던가. 진혁은 재벌도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홍수정은 녹록한 꼬맹이가 아니었다.
“시더시더-, 징역 오빠아-!”
“너 자꾸 이러면 징역 오빠가 다시 안 놀아 준대도?”
유세라 저 양반까지 징역이라고 부르네.
아무튼, 진혁이 아는 홍수정은 그런 별스럽지 않은 협박에 넘어갈 꼬마-.
뚝.
-였다.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추고 입을 야무지게 닫지 않았나. 큰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진혁이 그런 홍수정을 달랬다.
“수정아, 오빠는 어차피 학교 가야 해. 오빠 방학하면 또 놀러 와. 알았지?”
끄덕끄덕-.
홍수정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자 고였던 눈물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서해안 고속도로도 없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아 승용차로 달려도 세 시간은 달려야 올 수 있는 거리다. 아빠들끼리 친하다고는 해도 아마 홍수정을 자주 보기는 힘들 거다.
‘아직 어려서 며칠 지나면 날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살아 보니 인연이라는 게 그렇더라.
진혁은 홍수정이 조금만 머리가 커져도 내외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아니, 기억이나 하면 대단한 거지.
“자주 올게!”
“자주 오지마! 농사짓는 사람은 바빠.”
아빠들의 작별인사 뒤로 엄마들도 맞잡은 손을 미처 놓지 못하며 아쉬워했다. 엄마 한유영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저한테 이런 정을 준 사람이 없었어요······.”
“자주 놀러 올게요. 서운해 마세요, 진혁 엄마.”
부우웅-.
꾹꾹 잘 눌러 참는가 싶더니, 떠나는 차 안에서 홍수정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아----!”
꼬맹이가 울거나 말거나 진혁은 해방감을 느꼈다.
이전 생에서 홍수정에게 느꼈던 측은함도, 두근거림도, 아쉬움도. 어느 정도 날려버릴 수 있었다.
킁킁-.
이 꼬맹이가 내 팔에 침까지 흘리면서 잤어.
떠나가는 자동차에 손을 흔들던 아빠가 진혁에게 물었다.
“진혁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군인? 대통령? 과학자?
뭘 하든 지원해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젊었고 아들은 똑똑했기에.
그러고 보니 아들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늘 혼자서 뭔가 하는 녀석이었으니.
진혁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도 아빠도 계신데다, 예쁜 여동생까지.
‘나만 잘하면 된다.’
먼지를 풍기며 멀어지는 홍기준의 차를 보던 진혁이 아빠를 올려봤다.
“아빠,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그래.”
그게 제일 어려운 거란다.
손광연이 인자한 웃음과 함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9월, 88서울올림픽대회가 개막했다.
마지막 성화봉송 주자를 보며 진혁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국권을 강탈한 원수의 국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랐을 마라토너가 조국의 트랙을 한 발, 한 발 꾹꾹 내디뎠다.
“어머나! 어떡해.”
아기를 안은 엄마가 화들짝 놀랐다. 그 유명한 비둘기 화형식 라이브 때문이었다. 사실 저 때 죽은 건 한 마리뿐이었다고 밝힌 기록을 접했다. 그러나 지금 말한들 누가 믿을까.
함께 시청하던 아빠가 침을 꿀꺽 삼킨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아무래도 올겨울 비닐하우스 농사도 망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본방송으로 듣는 올림픽 주제곡도 색다른 감동이었다.
화합이나 평화는 남의 이야기라고 여길 때가 있었다. 칼바람에 가슴을 할퀴어 제 안의 평화도 찾지 못하는 아이에게 평화라는 말이 와닿는 것이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바깥으로 관심을 돌려도 될 것 같았다. 진혁의 가슴에 평화가 찾아왔으니.
그 후로 올림픽 소식은 신문으로만 확인해야 했다.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야 하는 유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벤 존슨도?” 전세계 경악, 도핑사상 최대충격··· 육상 100m 세계신 어디로」
「갈수록 느는 복용··· 선수생명 망쳐. 벤 존슨 「소물충격」 계기로 본 도핑과 경기력」
역사는 그대로 재현되었다.
안타깝지만 벤 존슨은 이 사건으로 다시는 트랙에 서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이 사건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도핑테스트 기술이 알려진 덕분에 2002 FIFA 월드컵과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같은 큰 대회에서도 도핑테스트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누군가의 국뽕 담은 카더라일 수도 있는 문제일 테니.
이렇듯 어디에나 명암은 있었다.
그건 신문 사회면도 마찬가지였다.
‘떠들썩한 잔치에 대한 기사밖에 없네.’
약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느덧 강자로 떠오른 집의 아들이지만, 지난 생에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약자 아니었던가. 축제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의 눈물을 성년이 되어 뒤늦게 접했을 때, 혼자만 슬픈 삶이 아니라는 이기적인 위안을 얻기도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신문을 뒤적이는데 아빠가 진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세상을 먼저 만든 다음에야 뭐든 할 수 있는 거야.”
뭘 알고 하시는 말씀일까, 아빠는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아빠, 바둑 둘까요?”
“어······, 아빠는 논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저녁에 두자.”
진혁에게 한 판도 이기지 못하는 아빠였다.
진혁은 언젠가 아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기보를 주웠다. 분명 논둑에 앉아 종이에 연필로 바둑 연습을 하고 오시겠지. 9월 말이면 볏논에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다. 태풍이 걱정이긴 한데 알아도 막기 힘든 것이 자연재해다. 물을 거의 빼두어서 병충해 염려는 덜었다. 참새 떼는 허수아비와 반짝이 리본이 쫓는다.
“다녀오세요.”
이럴 땐 혼자만의 시간을 드리는 게 좋겠지.
가족과 붙어있는 시간을 소중히 하시는 아빠인데 오죽했으면 자습을 하러 가실까.
‘좀 접어드릴 걸 그랬나?’
아니야.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장군이도 늘 필사적으로 달리는데 하물며 인간이 어찌 대충 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빠 생각해서 두자고 한 건데. 아빠가 잘하는 걸로 하자고 할 걸.’
그런데 아빠가 뭘 잘하시더라?
뻐꾸기 날리기?
***
이전 생의 외로움, 그리움, 그리고 슬픔까지.
모두 보상이라도 받으라는 듯 진혁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진혁의 하루는 조깅으로 시작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구봉산 정상까지 다녀오는 일. 운동 선수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렇게 해서 성장판을 자극하려는 생각이었다.
‘어렸을 때는 키가 너무 작았어. 동생도 곧 클 텐데 누가 괴롭히지 못하게 해야지.’
오빠니까.
시고르자브종 명견 장군이는 여전히 진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개답게 스타트는 장군이가 명불허전이었고, 스프린트와 지구력은 진혁이 우세했다.
몇 번의 방학이 지났다.
다시 보기 어려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홍수정은 방학 때마다 진혁에게 달라붙었다. 진혁은 홍수정을 보며 아빠를 따라 논에 갔을 때 발목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거머리가 생각났다.
거머리라는 놈들은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피를 빨고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아무리 발로 밟아도 터지지 않고 삽으로 찍어도 잘리지 않을 만큼 질겼다.
‘그래서 찰거머리 같다는 수식어가 생겼나 봐.’
엄마들도 친해져서 자매 저리 가라 할 우애를 자랑했다.
“언니, 푹 쉬시다 가세요. 괜히 민박 알아보지 마시구요.”
“매번 고마워요, 유영 씨. 수정이가 진혁이 오빠 보러 가자고 졸라대는 통에-.”
진혁의 집은 멋들어진 3층 집으로 증축했다.
돈 버는 재주가 있는 아빠를 둔 덕분이었다.
당년에 수요가 폭증하거나 공급이 부족할 것 같은 작물을 예상해 인부를 투입해 농사를 짓고, 발품을 팔아 값을 더 쳐주는 상인을 찾고. 아빠 손광연은 그렇게 사업수완을 발휘해서 돈을 벌고, 땅을 사고 집까지 새로 올렸다. 내부 마감은 황토로 했다. 황토가 인체에 유익하다는 걸 전생의 기억으로 아는 진혁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정이는 벌써 진혁이한테 갔나?”
한유영이 두리번거리며 수정을 찾았지만 서울 꼬맹이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홍수정은 진혁의 엄마에게 인사하기 무섭게 눈에 불을 켜고 집안을 뒤졌다.
“사촌들보다 진혁이가 우리 수정이랑 더 잘 놀아줘요.”
“평소에도 유진이를 끔찍하게 챙기는 오빠거든요. 수정이도 동생 같은가 봐요.”
홍기준의 가족은 매번 방학 때마다 일주일 이상 머물다 가곤 했다. 홍기준은 서툰 솜씨에도 손광연의 농사일을 거들며 우정을 과시했고.
유치원생 홍수정도 변함없는 집착을 보였다.
쿵쿵- 목조계단을 오른 홍수정이 2층에서 진혁을 찾기 무섭게 달라붙으니 완벽한 찰거머리였다.
“오빠, 나도 이제 내년이면 국민학생이야.”
“학교 갈 생각하니 좋아?”
“응! 근데 할 게 너무 많은 거 있지? 숙제도 해야 하고 피아노에, 수영에-.”
종알종알-.
괜히 물어봤다. 작게 한숨을 쉰 진혁이 책을 덮었다.
“수정아, 오빠랑 산딸기 따러 갈래?”
“응! 그거 맛있어.”
“수정아, 개울 갈래?”
“응! 물고기 잡으러 가자.”
“수정아, 바다 갈까?”
“응! 게 잡으러 가자.”
“수정아, 오빠랑 눈사람 만들까?”
“응!”
“수정아, 논에 썰매 타러 갈래?”
“우와! 재밌겠다!”
싫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홍수정은 진혁이 아침저녁으로 달리기를 할 때조차 따라다녔다. 그 짧은 다리로 말이다. 결국 나중에는 진혁의 등에 업혀 집에 와야 했다.
등에 업으면 신이 나서 다리를 달랑거렸다.
“오빠는 달리기가 그렇게 좋아?”
“응.”
언젠가 들어본 질문 같은데.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진혁이 대답을 했다는 거랄까.
“수정이가 좋아, 달리기가 좋아?”
뭐라는 거야, 조그만 녀석이.
진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인연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악연 아닐까.
갑자기 늙는 기분이었다.
“오빠아아아아아-!”
헤어질 때 우는 것도 여전했다.
***
서울로 떠나는 차에서 생난리를 피우던 딸이 조용해졌다. 유세라는 뒷좌석에서 목을 옆으로 꺾고 잠든 홍수정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마를 짚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휴-, 쟤는 누굴 닮아서 저러나.”
부부싸움의 도화선이 될만한 발언이었지만 홍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뒷좌석에 구겨진 꼬맹이 딸과 조수석에 앉아 한숨을 쉬는 아내를 번갈아 보는 게 전부였다.
딸 한 번, 아내 한 번.
딸 한 번, 아내 한 번.
그러다 유세라와 눈이 마주쳤다.
징역 오빠와 떨어지지 않겠다며 진상 떨던 꼬맹이 홍수정과 똑 닮은 여인이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홍기준을 빤히 바라보던 진상 여인이 눈이 마주치자 턱을 치켜들었다.
“뭐.”
“에휴-.”
“당신 그 한숨 뭐야?”
고양이 눈이 홍기준을 쏘아보았다.
“그냥. 밥을 너무 많이 먹고 왔나 봐.”
살려면 둘러대야 한다. 유세라의 손과 배경에 휘둘리던 관계의 주도권이 균형을 갖춘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홍기준은 바지 벨트를 푸는 시늉을 하며 어후- 하고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유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 엄마가 음식 솜씨가 좋긴 해.”
얼굴도 예쁘고.
“낯이 익은데 통 모르겠어.”
“자주 봐서 그런 거 아냐?”
“처음 봤을 때부터 낯이 익었단 말야.”
“미인이라 그런가?”
홍기준이 급히 입술을 포개 닫았다.
그러나 유세라는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지 홍기준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흠, 배우하다가 광연 오빠 만나서 야반도주한 건가?”
유세라가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어쨌든 위기를 넘긴 홍기준은 속으로 안도했다.
“오빠네 식구 만나러 계속 휴가 때마다 올 거지?”
“회사는 어쩌게?”
운전대를 굳게 쥔 홍기준이 곁눈질하며 물었다.
마침 그룹 내 중책을 맡아 아내 또한 회사 일에 치이고 있었으니.
“휴가 한 번 더 쓰는 거지 뭐.”
하긴, 회장 딸과 사위인데 누가 막겠나.
겨울에도 휴가 한 번 더 내면 그만이다.
“다시 생각해도 세상 무섭다.”
유세라의 말하는 습관은 이런 식이다.
앞뒤 다 자르고 한마디 툭 뱉는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말이 나온 배경과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쓰고 땀을 흘리지만, 사실 유세라가 지금 뭘 생각하는지만 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게. 광연이가 그런 곳에서 살고 있을 줄이야.”
유세라의 심경을 읽는 것에는 단연 독보적인 홍기준이었다. 그러니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 세기의 미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거고. 홍기준은 아직도 유세라가 청혼을 받아들였던 날만 생각하면 심장이 끓어오른다.
“근데 너무 멀다, 당신 운전하기 힘들겠어.”
“아직 도로가 불편해서 그렇지 거리는 100키로 정도 되려나.”
“빗자루 같은 거 있으면 좋겠어.”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게.”
누가 대마법사 엄마 아니랄까 봐.
정말로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는지 유세라는 팔짱 낀 자세에서 눈초리까지 가늘게 만들었다.
뒷좌석에서 새끼고양이 잠꼬대하는 소리가 들린다.
“으음-, 나도 빗자루. 징역 오빠.”
얼씨구.
쟨 진짜 누굴 닮은 거야. 유세라가 옹알거렸다.
홍기준은 대꾸도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옆머리를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