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13화 (13/338)

# 13 < 대마법사 (3) >

***

한유영은 딸 손유진을 안고 전전긍긍했다.

밖에서 차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혹시 그 사람 왔나?’

10여년 전, 손광연이 여름방학 때는 근처 민가에 하숙을 구하고, 학기 중에는 주말마다 내려오며 한유영에게 열렬히 구애하던 때. 한유영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경험을 했다.

- “광연이한테 꼬리치지 마세요. 여자가 자존심도 없어요? 천한 곳에 산다고 사람까지 천박해질 필요는 없다고 봐요.”

서울에서 고급 외제차를 타고 온 여자가 던진 말이었다.

꼬리친 적 없는데.

순진했던 한유영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분해. 한마디도 못해서.’

그 분노를 손광연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했었으나.

자신을 향한 간절한 눈빛, 그리고 슬픈 눈빛 뒤에 숨은 맑은 영혼 때문에 한유영은 끝내 치욕을 삼키고야 말았다.

구애를 받아들였을 때, 손광연은 연고 없고 외진 촌구석에 순순히 발을 들였다. 그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한유영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어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언니도, 그리고 손광연의 가족도 보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만 보고 선택한 고생길이었다. 한유영은 끝내 그날 있었던 치욕을 손광연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안 들어오지?’

자동차의 시동이 꺼진 지 한참 됐는데 아무도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창호문을 열고 안마당에 섰더니 밖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움찔했다.

그러나 적의가 없는 다정한 음성, 낭랑하고 표독스럽지 않았다. 그때의 그 여자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나가볼까?’

힐끗 돌아보니 순둥이 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오아-, 애기, 애기. 이뻐.”

홍수정이 뻐끔뻐끔 말했다.

다섯 살이면 말을 잘할 때 아닌가? 꼬맹이 홍수정은 똘똘했지만 말이 아직 서툴렀다. 그런데 그게 또 어린아이만의 매력 아니겠나.

“수정아, 내 동생 유진이야. 손유진.”

홍수정은 아직 어려서인지, 진혁이 제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신기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손유진. 오빠아-, 홍수정.”

홍수정이 차례대로 가리키며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

“아, 오빠아?”

그리고는 진혁을 가리키며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삿대질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모양이었다.

진혁은 꼬맹이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아, 나는 손진혁.”

“손징역-.”

“징역이 아니고 진혁이야, 수정아.”

이럴 때 아니면 대마법사의 이름을 언제 불러보겠나.

졸지에 징역살이를 할뻔한 진혁은 안방까지 따라 들어온 홍수정과 함께 동생 손유진의 곁을 지켰다.

“어머나-, 아기가 너무 예뻐요.”

언제 들어왔는지 유세라가 마루에 걸터앉아 방안의 아기를 들여다봤다. 딱 봐도 아기를 안아보고 싶은 눈치였다.

“뭐 마실 거라도 드려야 하는데······.”

엄마는 손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바구니에는 바나나와 파인애플도 있었는데, 당시 시골에서는 시장에 가도 구경하기 힘든 귀한 과일이었다.

‘으으으, 바나나 지겨워.’

이전 생에서 운동하며 하루에 바나나를 여섯 개씩 먹은 진혁은 순간 욕지기가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고 엄마를 위해 벌떡 일어섰다.

“엄마, 제가 주스 타올게요.”

“오빠아-.”

홍수정이 또 진혁을 따라왔다.

“어쩜, 아드님이 너무 잘생기고 똑똑해요. 호호.”

“하하, 우리도 아들 하나 낳자니까?”

부엌으로 향하는 진혁의 등 뒤로 유세라와 홍기준의 말이 날아와 꽂혔다.

자기들 딸이나 좀 챙기지. 자꾸 따라다니니 귀찮아 죽겠구만.

‘낳아도 나 같은 아들은 없을 거요. 엣헴!’

그렇지. 이런 애늙은이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나. 그리 생각하며 진혁이 어깨를 들썩였다. 피식피식 웃느라 유리컵에 주스 분말을 넣는 손이 덜덜 떨렸다.

물에 오렌지 맛 분말을 녹인 주스를 대령했다.

홍기준은 으르렁거리는 장군이를 쓰다듬었고 유세라는 아기를 안고 눈에서 꿀을 떨어뜨렸다.

“진혁아, 이 아저씨 차 타고 아빠한테 다녀올래?”

“네.”

아기를 돌보는 사이 진혁이 모르는 어른들만의 대화가 오간 모양이다.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괜찮겠지.

진혁은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아, 애기. 아, 오빠. 아아-.”

홍수정은 갈등하더니.

“오빠아-.”

진혁을 따라 차에 올랐다.

유세라는 진혁의 엄마와 함께 집에 남기로 했다.

*

버스길을 달려, 작은 숲을 지나 아빠가 일하고 있을 논으로 향했다. 경운기와 트랙터가 많이 다닌 탓에 구덩이가 많이 파였지만 벤츠는 힘 좋게 비포장 길을 돌파했다.

‘이 나이에 벤츠를 다 타보네.’

그보다도 홍기준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는 사실이 의외라면 의외였다.

한때 몸담았던 그룹의 오너가 아니던가.

진혁은 과거로 돌아오기 직전, 홍기준 회장의 차 뒷좌석에 함께 탔었다.

굉음이 들리고 몸이 흔들리는 충격이 있었는데. 그 후의 기억은 없다.

‘그날 죽어서 과거로 날아온 건가.’

당시 홍기준 회장은 진혁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해 궁금하다. 아마도 홍수정과의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 거겠지만, 진실은 당사자만 아는 거니까.

‘홍기준 회장은 무사했을까? 그 세계는 따로 존재하고 별개로 움직이는 건가? 그렇다면 거긴 여전히 엄마, 아빠가 안 계시니 슬플 것 같은데. 아, 어차피 거기선 나도 죽었을 테니 관계없으려나.’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안다고 한들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테고.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뒷좌석에서 홍수정을 꼭 잡았다. 안전벨트를 맸으나 구덩이가 많은 비포장 농로를 달리는 탓에 몸이 들썩거렸다.

룸미러를 힐끗거리던 홍기준이 침묵을 깼다.

“진혁이는 착하구나. 처음 보는 동생도 잘 챙기고.”

“약한 아기니까요.”

처음 보는 건 아닙니다만.

진혁은 홍수정에게 눈을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꼬맹이가 진혁을 빤히 보고 있었다. 천하의 손진혁을 눈 똑바로 뜨고 보다니, 이전 생의 홍수정보다 용감하지 않은가. 멀미가 날만한데도 진혁에게 고정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꼬맹이 주제에 눈이 높은가?

꾸웅-!

제법 깊은 웅덩이를 지나며 차체가 길바닥에 닿았다.

“아이쿠-.”

홍기준이 구수한 소리를 냈다. 룸미러를 보느라 미리 속도를 줄이지 못한 탓이었다. 홍기준은 긴장한 듯 보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입가에 웃음을 걸고 있었다.

역시 서울 남자는 감정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 딸을 챙겨주는 모습이 그렇게도 좋은가. 그리 생각하던 진혁이 반색했다.

“저기 계세요.”

진혁이 가리킨 곳에 논에 비료를 뿌리는 아빠가 보였다. 아무리 부자라도 농부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가족들 먹일 양식은 직접 재배하는 아빠였다.

홍기준은 손광연이 일하는 곳 가까이 차를 세우고 내렸다.

외제차가 가까이 다가올 때부터 밀짚모자를 젖히고 유심히 살피던 손광연이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두 남자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차 안의 진혁도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이 아빠들 왠지······.’

결투라도 하려는 남자들 같잖아.

누가 먼저 출수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영문 모를 불안감에 꼬맹이 홍수정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홍기준도, 손광연도.

첫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손광연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린 채 홍기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야, 너 이 새끼······.”

진혁은 태어나 처음 들었다.

아빠가 욕설을 입에 담다니.

처음 보았다.

망둥어와 참새도 무서워하는 아빠의 눈이 호랑이처럼 무섭게 변하는 모습을.

***

유세라가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어쩜 이렇게 예쁠까. 우리 딸도 이럴 때가 있었나 싶어요.”

“아까 보니 인형 같던데요. 아기 때도 예뻤겠어요.”

“힘들고 짜증 났던 기억밖에 안 나요. 아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괜히 지치고 그러잖아요. 진혁 엄마는 그러지 않았어요?”

“진혁이는 워낙 순해서 힘든 줄도 몰랐어요. 아기 때는 유진이보다 더 여자애처럼 예뻤거든요.”

힘든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육아에만 전념한 것도 한몫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디 육아가 쉬운 일이던가. 아기가 순해서 어려움이 덜했다는 한유영의 말도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목구비를 보면 그럴만했겠어요. 엄마를 많이 닮았더라구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유세라는 한유영이 이런 시골에 잠자기엔 아까운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기도 했다. 어디서 봤더라.

“진혁이는 아빠 닮았어요. 저는 조금만 닮았어요.”

굳이 꼽으라면 눈코입이 엄마를 닮았을까. 귀도 닮은 것 같고······.

아들이 잘생긴 남편을 닮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아빠를 닮았다.

“저······, 그런데 어떻게 오셨는지 아직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한유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뜸 쳐들어와서 과일바구니를 안기더니 아기를 안는 여자, 남자는 아들을 태우고 남편을 만난다며 가버렸다. 그 옛날 허구한 날 찾아와 구애하던 남편도 우격다짐이었는데 이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서울 사람들은 다 이런가?

“아, 아하하-. 그랬나요?”

“네, 아까 그 사장님도 진혁 아빠를 만나고 싶다고만 하셨어요.”

유세라의 얼굴에 겸연쩍은 웃음이 그려졌다.

왜 왔더라?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서 졸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데.

유세라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해운대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은 남편이 유세라를 재촉했다. 처음에는 시댁에 들리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뭐야? 모레까지 휴가인데 왜 벌써 올라가?”

- “가볼 곳이 있어. 괜찮고 싼 땅이 많대.”

남편 홍기준은 땅을 보러 간다고 했다.

회장 사위라는 권력을 언제 사용해 보느냐며, 비서실에 부탁해 서해안에 괜찮은 땅을 봐두었다고 했다.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인간이 요즘 이상하단 말야.’

영악한 구석 없이 성실했다.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가고 사람이 착해서 홍기준과 결혼을 결심했다. 정략결혼이 판을 치는 재벌가에서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다. 막내딸이 하고 싶다는 건 다 해주는 아버지 덕에 난관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열심이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더니 말도 없이 장인을 찾아가 한 자리 내놓으라고 했단다. 표현은 공손하게 했겠지만 뭐, 아무튼.

그렇게 세인건설 해외영업본부 과장으로 입사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휴가 중에 갑자기 땅이라니.

더 웃기는 건, 땅을 보러 간다는 남편의 말에 유세라 자신도 반색을 했다는 것이었다.

- “잘 됐다. 회사 연수원도 경치 좋은 곳에 지으면 좋잖아.”

- “역시 유세라 여사! 말이 잘 통해.”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모자란 구석이 있는 유세라였다. 그게 매력이기도 했고.

그렇게 조수석에서 목이 뻐근할 정도로 고개를 꺼떡거리며 졸다가 도착한 곳이 이 깡촌이다.

부산에서 충남의 해안까지. 휴게소를 몇 번을 들르고, 지도책을 몇 번이나 펼쳤을까.

유세라는 도착했을 때 남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이라니.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보다 밝아 보였다면 착각일까.

- “찾았다.”

- “누구? 쟤 알아?”

- “아니이, 비서실에서 알려준 땅주인 주소가 여기야.”

이런 촌구석에서, 허름한 집에 사는 사람이 땅부자라는 것도 희한하지만 땅주인 찾았다고 기뻐하다니.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해 조증이라도 걸린 걸까. 사람이 변해도 너무 적극적으로 바뀌지 않았나.

‘밤에도 적극적으로 변한 건 좋긴 하지만.’

재벌가 사위라는 위치와 주위의 시선이 부담이었는지 결혼 후부터 눈치를 보는 것 같았는데. 밝아져서 다행이었다.

유진이를 안은 유세라가 미간을 찡그리고 기억을 더듬는 사이, 한유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딸이 덥지 않도록 부채를 부쳤다. 역시 서울 사람들은 이상하다. 방문목적을 물었더니 병 걸린 닭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잖아.

꽤나 복잡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유세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땅을 좀······.”

“땅이요?”

손 씨 명의로 된 땅이 많기는 하지. 그런데 그 말 꺼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서울 여자들 이상해. 무서워.

한유영은 슬그머니 유진이를 잡았다.

‘진혁이는 무사하겠지.’

똑똑하고 발이 빠르니까 위험하면 도망쳤을 거야.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니, 그런데 이 서울 여자가 유진이를 꽉 안고 놔주질 않네.

한유영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고기를 먹고 자랐는지 서울 여자의 근력이 만만치 않았다.

여자들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장군이는 꼬리만 흔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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