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 세 생명 (9) >
***
장군이와의 경주는 계속됐다.
코스에도 변화를 주었다. 거리는 증가했고 경사도 다양해졌다.
뒷산 너머 꽁꽁 언 저수지에 다다라 숨을 돌렸다.
저수지 너머로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 보인다. 봉우리가 아홉 개여서 구봉산이라 불리는데 높이가 무려 해발 360미터에 달한다. 유명한 산과 산맥이 있는 지역에서는 코웃음 칠 높이지만 야트막한 산이 대부분인 서해안 아니던가.
‘제법 높구먼.’
진혁이 즐겨 찾던 관악산을 축소한 듯한 형태였는데 바위까지 많아 더욱 비슷해 보였다.
4, 50년 전만 해도 호랑이와 늑대가 살았고, 10년 전까지 초저녁마다 여우가 하울링을 날리던 산. 여전히 산삼과 희귀 식물이 발견되는 상서로운 곳이다. 온갖 귀신에 대한 전설과 도깨비 이야기를 품은 명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봉산을 보며 다짐하듯 진혁이 고개를 주억였다.
‘언젠가 매일 저 산을 오르리라.’
아직은 숏다리라 무리다.
끼잉-.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낀 장군이의 개소리가 처량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작았던 진혁은, 겨울방학이 지나고 학급에서 가장 큰 아이가 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큰 박정임이라는 여자아이보다 손가락 두 마디가 더 컸다. 그래봤자 열 살 꼬맹이지만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3학년이 된 진혁보다 키가 작은 고학년 누나와 형도 많았으니까.
***
세 개의 생명.
어두운 장막 너머에서 진혁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세 명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두 명은 부모님이었고.
“진혁이 동생 생겨서 좋겠네.”
부끄러운 듯, 행복한 듯 엄마가 아침햇살처럼 웃었다.
두근두근-.
동생이라니!
‘나머지 한 명은 동생이었구나!’
어쩐지 겨울방학 때 엄마가 종종 헛구역질하는 것 같더라니.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걸을 때도 조심조심하기에 몸이 안 좋으신가 생각만 했었다. 신부 입장하듯 아빠 손을 잡고 다니셨던 걸 떠올려볼 때, 아빠는 알고 계셨나 보다.
‘세상에 믿을 아빠가 없다!’
그리고 나만 빼고 다 늑대다. 배를 까고 드러누운 장군이 배를 더듬으며 진혁이 중얼거렸다. 이 자식 개벼룩이 너무 많네. 어쩐지 요즘 목 언저리가 가렵다 했다.
봄방학이 끝날 무렵 엄마의 배가 볼록해지기 시작했다. 아빠 덕분에 무리하지 않는 엄마였지만, 진혁은 혹시라도 엄마가 무리할까 더 빨리 달려 귀가했다.
도중에 개울에 마중 나온 장군이와 집까지 경주하는 것도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장군이는 정말 개빠르구나!’
장군이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오기를 부리고 이를 악물어도, 근육을 쥐어짜고 팔을 미칠 듯 흔들어도 장군이는 더 멀어질 뿐이었다. 과연 장군이는 두내리 단거리 최강자라 할만했다. 진혁과 매일같이 뛰어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지.
“헉-, 허억! 장군이 너 이름 ‘개 루이스’로 바꾸자.”
헤헤헥-?
장군이가 혀를 길게 빼물고 갸웃거렸다.
곧 알게 될 거다, 장군이.
두 달 후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가 열리면 그런 이름의 육상선수가 등장하지.
성별에 맞게 여성 스프린터 이름을 차용하고 싶어도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그린피스? 뭐였더라? 입 언저리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질 뿐이었다.
‘개 존슨’도 괜찮겠다 생각했지만 어감이 좋지 않았다.
어감도 어감이지만, 왠지 개밥에 약 탄 느낌이 들지 않나.
여름방학을 앞두고 드디어 때가 됐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제나저제나 하며 집에 머물던 남편을 한유영이 급히 불렀다.
“오빠! 아기가 나오려나 봐요!”
“진혁아! 엄마 손 꼭 잡고 있어!”
아빠는 큰 밭 건너 미경이네 할머니를 모시러 갔다.
병원에 가자는 아빠였지만 병원에서 아기를 낳는 게 익숙하지 않던 시골 사람들이었으니. 아내 한유영의 집에서 낳고자 하는 고집을 꺾지 못했다.
서울과 시골. 두 문화의 충돌은 이렇듯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곤 했다. 다행이라면 서로의 영역과 의견을 존중하고 양보하는 사람들이라 충돌이 없다는 점이랄까.
‘군불을 때야 한다고 했어.’
진혁은 기억을 더듬어 주름진 지식을 헤집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산모의 몸에는 한기가 든다고, 산후통과 부인 질환 예방을 위해 방을 따끈하게 데워야 한다고 했다.
“엄마, 불 피우고 올게요.”
제 영혼보다 어린 엄마의 이마를 쓸어주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솔가리와 나뭇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불을 지폈다. 오후 운동을 마치고 저녁을 차릴 때 엄마를 도와 늘 하던 일이었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진혁이 불을 지필 때마다 성냥을 당기기 무섭게 불이 크게 살아나는 걸 부모님은 신기하게 여겼다.
‘엄마가 스물아홉인가? 서른인가?’
애가 애를 낳네.
엄마가 스무 살에 저를 낳으신 건 생각도 않는 진혁이었다. 피식 웃으면서도 곧 태어날 동생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순산을 빌었다.
‘제발, 제발.’
세상 물정을 많이 안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는 만큼 걱정이 되는 일도 있는 법이었으니. 집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잘못되는 산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병원에서조차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들었다. 그래도 진혁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보다는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었다.
불이 잘 붙은 아궁이에 굵은 장작을 넣었다. 솔가리나 잔가지는 화력이 좋지만 금방 꺼져버리기 때문에 화력 유지를 위해 장작을 넣어주는 거다.
솥에서 김이 나고 물이 따끈하게 데워졌다. 엄마가 누워 계신 안방에 세숫대야를 가져다 두고, 가마솥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몇 번을 날랐다.
‘한 번에 옮기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다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진리는 이전 생에서 진작에 터득한 터였다.
물을 충분히 퍼 나른 진혁은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엄마의 손과 발, 얼굴을 닦아주었다.
“엄마, 괜찮아요?”
“응. 걱정 마, 우리 아들. 엄마 튼튼해.”
튼튼하기는. 살집도 별로 없는 양반이 허세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표정이 나쁘지 않고 혈색도 괜찮아 진혁은 안심했다.
“잠깐 부엌에 다녀올게요.”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 미역을 불렸다. 마흔 넘도록 혼자 살며 절대 활용할 일 없을 것 같은 쓸데없는 상식으로 여겼는데 이렇게 빛을 볼 줄이야. 두근거리는 와중에도 신기했으니, 만고 쓸모없는 지식은 없는 모양이다.
하아, 하아-.
엄마의 얼굴에 핏기가 줄어들었다. 호흡이 약했고, 피곤한 사람처럼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아빠와 미경이네 할머니는 아직 안 오셨는데. 지금이라도 119에 전화를 해야 할까. 오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으음-.”
옅은 숨소리와 미약해진 맥박. 엄마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눈꺼풀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되찾은 엄마인데!
속으로 절규하며 엄마의 손을 잡고, 이마에도 손을 올렸다.
“엄마, 정신 놓으시면 안 돼요. 잠들지 마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
춥고 어두운 곳이었다.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도 불었다. 불빛 하나 없는데도 시야가 충분했다. 별빛 하나 없는 까만 하늘, 눈앞에는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강이 놓여 있었다.
앞쪽을 향해서만 볼록 나온 배를 어루만졌다.
뒤에서 보면 그저 아가씨 몸매였다.
‘딸인가 봐.’
옆으로 퍼지지 않는 배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옛 어른들은 임신부의 뒤태를 보며 아들인지 딸인지 내기를 하곤 했는데, 뒤에서도 허리가 잘록하게 보이면 ‘딸 배’라고 했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런 기억이 난다는 게 신기할 만도 한데. 한유영은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힘차게 맥동하던 아기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졌으니 당황할만하건만, 마치 당연히 와야 할 곳에 온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둘째 치고, 뱃속에 든 아기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인간의 생을 영위하게 만드는 힘. 삶을 즐겁게 만들고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호기심이 증발했으니 이미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였다.
미련일까, 내딛는 걸음마다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눈앞에서 구슬프게 일렁이는 강물이 망자의 눈물로 채워졌음을 깨달았다.
강가에 발을 들이자 눈앞에 새하얀 아치형 다리가 놓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다리에 당연하다는 듯 발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엄마, 정신 놓으시면 안 돼요. 잠들지 마세요.】
묵빛 창공을 근중하게 메우는 목소리였다. 감히 어길 엄두가 나지 않는 웅장함도 배어 있었다.
한유영은 뻗었던 다리를 거두어들였다.
엄마? 내게 하는 소리일까.
정신? 나는 깨어 있는데.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 검은 강이 집채만 한 파도를 일으켰다. 하나 반드시 봐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다시금 호기심이 싹트고 인간의 감정이 돋아났다.
저건 별일까.
까만 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이 있었다.
그 별이 자신을 엄마라 불렀다.
알 수 있었다. 자신만을 향해 빛나는 별이었다.
반딧불이보다 약하던 별빛이 점점 광휘롭게 빛나며 몸집을 부풀렸다.
마침내 눈부신 빛이 폭발하며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아야-.’
뱃속의 아기가 힘차게 태동했다.
***
엄마가 눈을 떴다.
혈색이 좋아졌고, 흐릿했던 눈동자도 맑아졌다.
“엄마가 잠깐 잠들었었나 봐. 아기 낳다가 잠들면 안 된댔는데. 진혁아, 이제 엄마 옆에 있어. 아빠 오실 때까지.”
한유영은 불안했다.
남편과 산파가 오기 전에 잠들까 봐. 그리고 깨어나지 못할까 봐.
방금 전 꿈처럼 스쳐간 정경은 강렬한 빛에 타버려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네. 옆에 있을게요.”
진혁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엄마의 손을 꼭 붙들었다. 힘들 동생을 응원하듯 엄마의 배에도 손을 올려 부드럽게 매만졌다. 손바닥을 통해 아기의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
“응애애애애애애-!”
드디어 들린 아기의 첫 울음소리.
마당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두 남자가 냉큼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는 큰 위기 없이 진혁의 동생을 낳았고, 산모도 아기도 건강해 보였다.
세상에!
‘와-, 너무 예쁘다.’
아기가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
이전 생에서는 아기를 가까이에서 볼 일도, 만질 일도 없었고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갓난아기임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동생을 보며 마치 제 아기라도 되는 양 진혁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넥이네가 아주 복 받은 겨. 사내자석이 월매나 똑실헌지 내가 할 일이 웁썼다니께에-.”
미경이네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진혁을 칭찬했다.
군불부터 따뜻한 물과 수건, 산모의 청결까지. 어떤 산파나 의사보다 낫다며 아빠와 엄마에게 들으란 듯 진혁을 치켜세웠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미경이네 할머니가 마당으로 나오자 손광연이 따라 나왔다. 지폐가 든 노란 편지 봉투를 공손히 내밀면서였다.
“아유-! 까닭 없는 짓 하지 말어! 날랑은 미역국이나 끓일라니께- 샥시랑 애기랑 챙겨. 하이고오-, 우리 지넥이 똑똑한 거 봐라. 미역까지 다 불려놨네. 시상이 어쩜······.”
아, 가시려던 게 아니었구나.
머쓱해진 손광연이 뒷머리를 긁었다.
*
“아빠, 애기 이름은 뭐예요?”
꾸잉꾸잉-.
엄마 젖을 물고 있는 동생을 보며 진혁이 물었다.
“유진. 손유진.”
아내와 아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이리라.
진혁이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유진.”
진혁의 여동생 이름이다.
꼬물거리며 엄마 젖을 빠는 갓난아기를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돈 벌어야겠다.’
부모님과 시골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목표였는데. 어차피 아빠가 부자였고 재물 따위 관심도 없었는데. 어디 인간의 꿈이 영원하던가. 그래도 진혁은 10개월 가까이 농부라는 한결같은 목표를 품었으니 제법 심지가 굳다고 할만했다.
아무튼,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는 동생을 보며 좋은 오빠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늘이 되고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거목 같은 오빠가 되고 싶었다.
‘햐-, 내가 스무 살이 되어도 유진이는 초딩이네.’
아무렴 어떠냐.
진혁은 날아갈 것만 같다.
‘여동생이 생겼어!’
후다닥-.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다리도 벌렸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듯 까치발로 서서 외치는 거다.
“만세-! 만세-! 만세에-!”
세 명을 모두 살렸다.
이전 생에 없었던 동생까지.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가슴이 터져라 만세를 불러도 감동이 가라앉지 않았다. 화산 폭발하듯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장마철 폭우에 불어난 개울처럼 눈물이 펑펑 솟아 눈이 뜨거워졌다.
아빠 손광연도 마당으로 나와 진혁을 따라 했다.
“만스-.”
“애애애애애애애앵-!”
한유영이 우는 아기를 어르며 남편 손광연에게 눈을 흘겼다.
억울한 표정의 아빠를 보며 어깨를 들썩이던 진혁이 끝내 눈물을 떨궜다.
‘우씨. 진혁이 때문에 우는 거 같은데······.’
그래도 좋아.
손광연이 착한 바보처럼 웃었다.
“어허허허허-.”
“에헤헤헤헤-.”
두 남자가 마당에서 천치처럼 계속 웃었다.
웃음소리는 달라도 생각하는 것은 같았으니.
‘아빠가 다 해줄게.’
‘오빠가 다 해줄게.’
대문 밖에서 장군이가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부하가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