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8화 (8/338)

# 8 < 세 생명 (7) >

***

농사일을 거들려 들면 손사래 치는 아빠 때문에 논밭에서 허리를 숙이는 일이 없는 엄마였다. 그렇다고 집 안에서 가만히 쉬는 법이 없었다. 늘 방과 마루를 닦고, 부엌을 치우고 수돗가를 물청소했다.

바깥마당을 쓸고 들어온 진혁의 눈에 찹쌀풀과 고춧가루를 잔뜩 준비하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 고추장 만들어요?”

“응. 만들어 둬야지. 우리 진혁이 고기볶음도 해주고,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고개를 주억인 진혁이 수돗가를 살폈다.

아직 세척하지 않은 항아리가 보였다.

‘엄마 도와드려야지.’

진혁은 즉시 외양간이었던 곳으로 갔다. 차곡차곡 쌓은 짚단에서 지푸라기 몇 가닥을 꺼내어 먼지를 탁탁 털고 후후 불고는 물로 씻었다. 그다음 둥그렇게 말아 뭉치니 금세 재래식 수세미 완성이다.

슥삭슥삭 항아리 외부를 닦고, 내부를 닦기 위해 새 지푸라기 수세미를 만들었다.

‘어우-, 팔이 안 닿아.’

개보다 조금 긴 팔다리의 저주였다.

고추장독으로 사용하는 항아리가 너무 큰 탓에 까치발을 서도 바닥에 손이 닿지 않았다. 낑낑거리다가 설상가상으로 짚 뭉치마저 항아리 안에 떨어뜨렸다.

‘하아-, 조땐네······.’

난처한 마음에 시대와 연령에 맞지 않는 욕설을 삼켰다.

요즘 들어 잘 먹고 있는데도 성장은 요원했다. 매일 달리기를 하니 무릎도 근질거리고 허리도 살근거리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것 같았지만. 그래봤자 아홉 살 꼬맹이였다.

“흡!”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서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쿠웅-. 보기 좋게 처박혔다.

항아리 속으로.

당황한 나머지 만능 주문이 터져 나왔다.

“엄마아아아아아-.”

“에그머니!”

항아리 안에서 들리는 애처로운 메아리에 한유영이 기겁하고 달려왔다.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엄마의 눈에 아들 얼굴은 안 보이고 발발거리는 짧은 두 다리만 보인 탓이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당황감에 흠칫한 것도 잠시, 아들의 발목을 잡고 거침없이 쑤욱 들어 올렸다. 이 순간, 한유영이 곧 테티스 여신이었다.

엄마에게 발목이 잡혀 항아리에서 빠져나오며 진혁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아킬레우스처럼 힘이 센 걸까?’

엄마에게 발목 잡히면 힘이 세지는······.

선후 관계는 바뀐 듯하지만 힘이 센 건 사실이니까.

사실 엄마는 근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아홉 살 진혁의 체중은 겨우 22kg, 입 짧고 키 작은 개구쟁이가 가녀린 엄마에게도 가벼웠을 뿐이다.

‘잘 먹고 잘 커야지.’

팔다리가 짧아 항아리에 빠진 치욕스러운 날이었다.

결코 이날을 잊지 않으리라.

진혁은 항아리를 보며 투지를 불살랐다.

***

진혁은 틈날 때마다 아빠와 낚시를 하고, 엄마 손을 잡고 동네를 마실 다녔다. 시간을 정해 아침저녁으로 운동도 거르지 않았다.

방학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쟤가 왜 저러나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오히려 부모님은 진혁을 응원하셨다.

“훅-, 훅, 후욱-.”

이전 생에서도 얼마나 달리기를 열심히 했던가.

달리는 희열을 처음 느낀 건 대학합격자 발표 후 다락방을 탈출해 터미널로 가던 날이었지. 세찬 비바람을 뚫고 심장이 터져라 달렸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뜀박질을 했다. 잠시 대학교에 다닐 때도, 특전사에 지원한 후에도.

‘내가 왕년에 군대 있을 땐 아주 날아다녔지.’

산악구보가 가장 즐거웠다.

전역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운동을 쉬지 않았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을 하면 그나마 쉽게 잠에 들었고 헛헛한 심상도 재울 수 있었으니.

심장이 터질 듯 달리다가 턱걸이를 하고,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특전사 서킷과 비슷했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리며 외로움도, 괴로움도 참아냈다.

‘지금은 그냥 즐거워서 달리는 거야.’

팔다리가 짧아 아직 빨리 달리는 건 무리지만,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떠냐. 장군이가 곁을 지키며 경쟁심도 북돋워 준다.

헤헤헥-.

가끔 으르렁거리긴 하지만 제법 친해진 시고르자브종 장군이가 지친 소리를 냈다. 진혁을 따라 달리다 뒤처지기 시작하니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역시 장군이는 명견이었다.

‘개가 먼저 퍼져 버리냐.’

동네에서 알아주는 준족 발바리 장군이는 어느덧 아홉 살짜리 손진혁과의 장거리 경주를 버거워하는 지경이 되었다. 진혁의 지구력이 장군이보다 우월한 까닭이었다.

진혁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어깨를 돌렸다. 무릎과 허벅지, 엉덩이와 발목도 살근살근 주물렀다. 성장판을 자극하고 인대가 다치지 않도록.

진혁이 장군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어이, 장군이. 집까지 경주다. 네가 먼저 도착하면 망댕이 한 마리 줄게.”

헤헤헥-.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던 장군이가 망둥어라는 말에 침을 흘리며 벌떡 일어섰다.

“출발!”

타다닷-!

진혁의 발이 비포장 길을 힘차게 박찼다.

헤헤에엑-.

이상하다. 단거리는 장군이가 더 빠른데 개소리가 점점 뒤쪽으로 멀어졌다.

‘드디어 내가 더 빨라진 건가!’

아니었다.

뒤를 돌아본 진혁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저런 개새끼가!’

장군이가 빈 밭을 가로질러 집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명백한 파울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달렸고, 부모님이 계시니 굶을 걱정 없이 밥도 많이 먹었다. 감기에도 걸리기 싫어 틈만 나면 씻고 양치를 했다.

‘옛날엔 굶기도 하고 씻지 않고 잠든 날도 많았는데.’

그렇게 겨울이 되었다.

아이들은 겨울에 자란다.

***

12월이 되면 아이들이 있는 집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느라 홍역을 치른다. 절에 다니는 집도 그랬으니, 아이들이야말로 종교 대통합의 진정한 역군이었다.

진혁이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빠가 더 신난 것 같았지만.

“진혁아, 아빠랑 나무 베러 갈까?”

“나무요?”

“크리스마스트리 만들자.”

교회도 안 다니는 양반이 트리는 무슨······.

그저 기분을 내고 싶으신 거겠지. 어린 아들과 아내를 위해서라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대부분의 집에서 단발성으로 나무를 베던 시절이었다. 진혁은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 나무를 베는 건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빠, 그냥 캐다가 심으면 안 돼요? 베면 나무 죽잖아요.”

아빠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우리 아들, 마음가짐이 남다르구나.

“근데 나무 캘 수 있을까?”

땅도 얼고, 무거울 텐데. 무엇보다 손광연은 나무를 캔 경험이 없었다. 십 년간 직접 짓던 농사도 이제는 사람을 사서 쓴다. 삽질이라고 해봤자 아들과 함께 지렁이를 잡거나 뻘게를 잡을 때, 동네 남자들과 낙지를 잡을 때 가끔 하는 정도였다. 산에서 칡뿌리 캘 때도 한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들어 올려 인중을 가린 아빠에게 진혁이 말했다.

“미경이네 마당에 있는 전나무 한 그루 사면 안 돼요?”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아빠가 가서 여쭤볼게.”

“같이 가요.”

진혁이 광에 보관해둔 말린 망둥어를 잔뜩 챙겼다.

기특하다는 듯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들의 선한 의도가 눈앞에 그려졌다.

‘미경이네 집에 신세가 많았거든요.’

열 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최미경 어린이네 부모님이 진혁을 돌봐주셨다. 법적 보호자라고 주장하는 양부모가 나타날 때까지 장군이와 함께 9개월 가까운 시간을 더부살이했지.

성인이 되어 서울에 살면서도 진혁은 최미경네 집에 종종 들러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최미경이 은행원과 결혼한 후에도 종종 만나 밥을 먹었다.

최미경의 가족은 진혁이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

손 씨 부자가 밭둑길을 따라 최미경네로 향했다.

최미경네는 진혁이네 다음가는 부자로, 벌써 2층 양옥으로 집을 올렸다.

동네에 유일한 2층 집이었다.

“아이고, 나도 나무는 안 캐봤는디. 진혁이네가 달라먼 주야지이-.”

최미경의 아빠 최장환은 이런 사람이었다.

9년 전 마을로 흘러온 외지 사람 손광연이 정착할 수 있도록 먼저 손을 내밀고 집을 지을 때도 앞장서서 팔을 걷어붙였다.

진혁이 건넨 망둥어를 보면서도 한마디 붙였다.

“우덜끼리 뭐 이런 걸 다 가져오고 그려어-? 우리 집이두 잔뜩 있는디.”

“하하, 진혁이가 꼭 가져다드려야 한다고 해서요. 나무 거저 달라는 거 아니니까 받으세요. 형님 안주로 드세요.”

“기깟 나무 하나에 돈은 무슨! 그런 소리 말어, 이 사람아!”

짐짓 노한 기색을 띠었지만 최장환은 흐뭇하게 웃었다.

허여멀건 손광연과 배가 볼록하게 나온 한유영을 보며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가난해 보이는데 잘 살 수 있을까, 고생 한 번 안 해본 손인데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나무라듯 농사도 잘 짓고 잘생긴 아들까지 낳아 사는 모습이 기꺼웠다. 성격까지 좋아 마을 사람들이 손광연의 농사를 먼저 거들고 나서는 판이었다. 거기다 어느새 동네 제일가는 부농이 되어 있으니.

“자네 사는 거 보먼은 내가 아주 내 일처럼 흡족혀. 흡!”

“다 형님 덕분이죠, 하하. 흡!”

화기애애하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언 땅에 매섭게 곡괭이를 꽂았다.

단단하게 얼었던 땅도 두 농부의 요령 실린 곡괭이질에 여지없이 부서졌다. 제법 깊이 팠을 때 허리를 세운 최장환이 이마를 훔쳤다.

“우리 미경이 이년이 허구헌 날 진혁이 얘기만 해쌌는디, 아주 우리 집에 아들 하나 더 있는 거 같다니께? 허이구- 숨차다. 쫌 셨다 혀.”

“네, 그럴까요? 덥네요. 하핫.”

마침 최미경 어린이가 구수한 숭늉을 내왔다. 걸을 때마다 자동차 와이퍼처럼 흔들리는 양갈래 머리가 귀여웠다.

아빠들에게 숭늉을 건넨 최미경이 진혁에게 다가왔다.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듯했다. 보라색 할머니 신발로 땅을 직직 비비며 몸을 비비 꼬았다.

“진혁아, 방학 때 뭐 할 거야?”

하긴 뭘 해.

시골 애들이 겨울방학 때 눈사람 만들고 썰매 타는 거 말고 할 게 있나? 나이를 먹었어도 진혁은 논 썰매 탈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겨울에 추워야 농사도 잘된다는 말을 들었다. 올겨울에도 많이 추워서 얼음이 두껍게 얼었으면 좋겠다. 그럼 진혁은 신나게 놀 수 있고 아빠는 내년 농사로 큰돈을 벌겠지.

진혁의 관심사나 계획은 중요치 않았는지 최미경 어린이가 계속 종알댔다.

“나는 엄마랑 아빠랑 제주도 가기로 했다? 좋겠지?”

좋겠네.

도시의 젊은 사람들 신혼여행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도였다.

해외는 많이 나가본 진혁이지만 제주도와는 인연이 없었다.

‘회사 일로 두 번인가 갔던 거 같은데.’

나도 엄마 아빠랑 제주도 가고 싶다.

제법 아이다운 부러움이었으나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속으로 삼키려니 최미경 어린이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도 방학 숙제 도와줄 거지?”

전에도 도와줬었나 보네.

왜 기억이 안 나냐.

“넌 책 읽을 땐 또박또박하면서 말이 너무 없더라.”

그러고 보니 수준이 맞지 않아서 아이들과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것 때문에 선생님이 의젓하다고 했을 테고.

“아, 미안. 무슨 숙제?”

“일기.”

이 어린이가?

부지불식간이었다. 진혁의 손바닥 노궁혈에 양기가 모였다. 급히 왼손 엄지로 오른팔 안쪽 척택혈을 꾹 눌렀다. 팔이 제멋대로 부르르 떨었던 까닭이다.

‘하마터면 출수할 뻔했다······.’

이 어린이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울컥하는 마음을 극한의 인내력으로 추슬렀다. 그러지 못했다면 최미경 어린이가 울음을 터뜨렸을 테고 이웃 간의 평화가 깨졌으리라.

후우우-, 가만히 눈을 감고 긴 숨을 뱉었다.

최미경의 가족은 은인인 동시에 좋은 이웃이다. 최장환은 여러모로 서툰 아빠를 도와주고, 최미경의 어머니는 마을에 말벗 없는 한유영을 언니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이었다.

장군이에게도 그렇다. 장군이가 없어져서 찾아보면 열에 아홉은 미경이네 누렁이 밥그릇 안에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아 자빠져 자고 있지 않던가.

‘그래, 결심했다.’

달랑 세 가족만 사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를 위해서도 사이좋은 이웃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될 터.

한참 동안 눈감은 채 고뇌하던 진혁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하겠다.”

불의와 타협했다는 사실에 분했으나 울지는 않았다. 상남자니까.

다만 매우 비장했다.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와 대조되는 표정이었으니, 부정행위를 약속하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도 최미경 어린이의 환한 웃음이 죄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