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 세 생명 (6) >
***
바람이 더욱 차가워진 어느 날.
오늘도 진혁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집에 도착했다.
“장군아, 엉아 왔다.”
장군이는 귀만 쫑긋 세울 뿐 딴청을 부렸다. 눈을 내리깔고 텅 빈 개밥그릇만 주시하는 모습이었다.
‘일부러 피하는 거 같네.’
마주치면 으르렁거리게 될까 조심하는 느낌이랄까.
그럼, 그래야지. 그동안 받아먹은 생선내장이 얼만데. 경우 있는 개라면 응당 눈을 깔아야 하는 법이다.
“다녀왔습니다아-!”
“우리, 진혁이 왔어?”
엄마가 창고에서 낑낑거리고 계셨다.
걱정되어 우다다 달려가 보니 맷돌을 옮기시려는 게 아닌가? 몸도 가냘픈 냥반이 무리하면 곤란하다. 진혁이 냉큼 달려들었다.
“아이고, 무거워요! 같이 들어요!”
“어휴, 안 들리네. 우리 둘이 들어도 안 될 거야. 아빠 오시면 옮겨달라고 하자.”
엄마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허리를 폈다.
엄마의 시선을 따라 마루에 눈을 돌리니 깨끗이 씻어둔 콩이 보였다.
두부를 만드시려는 모양이다.
‘엄마가 만드신 두부는 최고지.’
완성된 두부도 맛있지만, 갓 뭉쳐진 포들한 두부에 양념장만 넣어 숟가락으로 퍼먹을 때의 맛이란. 양념장이 없으면 어떠랴, 비릿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어린아이 입맛에도 딱이었다.
지난 생에도 그 맛이 그리워 마흔이 넘어서도 여기저기 유명한 두붓집을 찾아가 봤지만 그 맛을 내는 곳이 없었다.
“엄마가 옥수수빵 쪄놨어. 기다려 봐.”
“와-, 맛있겠다.”
고속도로나 시장에서 파는 옥수수빵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맛은 다르다. 쟁반에 반죽을 올려 가마솥에 찐 옥수수빵은 돈 주고도 사 먹을 수 없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진혁은 군침을 넘기며 맷돌을 드는 시늉을 해보았다.
떨그럭-.
‘이게 왜 들려?’
이상한 일 투성이다.
장군이가 갑자기 으르렁거리질 않나, 한 손으로 맷돌을 들지를 않나······.
엄마 혼자서도 들기 힘든 맷돌을 혼자 날랐다고 하면 분명 놀라시겠지.
진혁은 맷돌을 슬그머니 내렸다.
‘어이가 없네?’
소년장사가 맷돌을 든다더니 나는 소년장사였을까?
혼자 남겨졌던 지난 생에는 힘쓸 일이 없었다. 어쨌든 장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는 깡다구를 발휘할 기회가 없었으니.
“진혁아-, 빵 먹어.”
“네에-!”
진혁은 수돗가로 달려가 손과 얼굴부터 씻었다.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감기도 걸리기 싫어 깔끔하게 살기로 했다.
옥수수빵을 오물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재기발랄했던 과거의 똘똘이 손진혁이 사라졌다. 은퇴를 결심했을 때의 무던하고 의욕 상실한 중년 남자의 됨됨이였다. 진혁의 안에 든 인격은 닳고 닳아서 동심만이 누릴 수 있는 감흥을 잃었다.
푸욱- 한숨이 나왔다.
해루질 가던 날도 그렇다. 원래 아이라면 어리광부리고, 울고 떼쓰면 해결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이답지 않게 의젓이 굴었다.
‘떼쓰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해. 애도 아니고.’
타인의 눈에는 어린아이로 비치겠으나 스스로 제 영혼의 나이를 아는 이상 아이처럼 행동하기 꺼려지는 탓이었다.
아, 결국 나이 먹어서 그런 거구나. 진혁은 빵과 함께 생각을 삼켰다.
꾸웅-! 창고에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화들짝 놀란 엄마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고, 아부지! 이게 무슨 소리지?”
아차, 맷돌이 삐뚜름히 올려졌었나 보다.
*
진혁과 손광연은 마루에 다소곳이 걸터앉아 두부가 만들어지는 현묘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여군 장교를 앞에 둔 신병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손광연이 맷돌을 잡았다. 아내의 가녀린 팔이 저릴까 봐 맷돌질을 자처한 것이었다. 하나 그의 순정은 정확히 두 바퀴 반을 돌린 후 임무에서 배제됨으로써 외면당하기에 이르렀다.
잔뜩 주눅이 든 남편의 모습이 안돼 보였을까, 한유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일정한 힘으로, 꾸준한 속도로 돌려야 곱게 갈려요. 두부도 맛있어지고요.”
“넵. 시정하겠습니다.”
“다른 거 거들어주세요.”
한유영의 지시에 따라 두 남자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진혁은 가마솥에 물을 받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손광연은 광 한구석, 천일염에서 흐른 간수를 모아 장교 앞에 대령했다.
“아니요, 여기 말고 부뚜막으로······.”
“시정하겠습니다!”
진혁은 아빠가 군대 안 가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청 맞았을 거야.
한유영은 몽글몽글 뭉치는 두부를 깨끗이 씻은 막대기로 천천히 저었다.
“맷돌 돌리는 속도와 가마솥 젓는 속도가 매우 비슷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군복무 경험이 일천한 손광연 면제병이 절도 있게 물었다.
한유영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없다.”
“가마솥 증기가 얼굴로 모이는데 혹시 미모의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까?”
“어머-.”
아빠의 일머리는 진혁만 못하지만 뻐꾸기 날리는 실력은 발군이었다. GP 대면병(대북 방송하는 병사)으로 복무했다면 인민군이 이를 갈 정도의 뻔뻔함이 돋보였다.
엄마에게 수작을 거는 아빠를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좋을 때다.’
후루룩-, 후루룩-.
아궁이가 전해주는 온기를 느끼며 세 명의 쏠져가 두부를 마셨다.
“너무 맛있다······.”
장군이도 입에 맞는지 개밥그릇에 주둥이를 묻었다.
***
시골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는 도시보다 늦게 열렸다. 바쁜 농사일 때문에 쉬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던 학부모들을 배려하고, 참석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난 후에야 열리곤 했다. 벼를 추수하기 직전에 할 때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올해는 늦게 개최되었다.
나중에 가십처럼 듣고 알게 되었는데, 1987년 첫 대통령 직선제를 맞아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누군가 힘을 쓴 거라고 했다. 유권자인 부모들을 모아놓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였겠나. 그러다 보니 시골 학교는 순번이 밀렸다고.
그저 소문일 뿐, 진실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시골은 인구에 비해 땅덩이가 넓고 서로 멀리 떨어져 사는 집이 많았다. 평소 보기 힘든 이웃을 볼 겸 김밥을 싸고 튀긴 닭을 사서 운동회에 참석하니, 진정 축제라 할 수 있었다.
평소 구경하기 힘든 장난감과 화장품을 잔뜩 벌려놓는 상인들도 이러한 대목을 빼먹지 않고 멀리서 찾아왔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작은 운동장에 들어차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와, 이런 운동회라니.’
이전 생에서는 운동회나 소풍 날 그늘진 구석에 숨어있었다.
누구도 그런 진혁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함께 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친구들이 김밥을 나눠주기는 했지만. 진혁이 철저히 제 안으로 숨어들던 시절이었다.
‘허허허-, 엄마랑 아빠가 더 신나신 거 같구만.’
즐거워하는 부모님을 보며 진혁은 가슴이 설렜다.
다시 살아 이런 행복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와 별개로 다른 마을 어른들 눈에는 곱게 비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골 남자들. 그들은 진혁의 부모 손광연과 한유영에게 상당히 불편한 눈길을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투박한 사람들 아닌가.
‘왜 손을 잡구 댕긴댜-.’
‘넘 부끄럽게 뭐 허는 짓이랴-.’
부부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는 점심때 먹은 김밥이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왜 아니겠는가. 어린아이들조차 구수한 사투리를 쓰고 부부간 애칭 따위 존재하지 않는 동네였는데.
“오빠-, 아빠들 줄다리기 차례예요.”
“자기야, 엄마들 오재미 시간이래요. 재밌게 하고 와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진혁의 엄마를 부러운 눈으로 봤다. 어느 집 부부인지 몰라도 청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 않은가.
손광연과 한유영은 손을 꼭 붙잡고 학교를 훑었다.
서울에서만 살았던 손광연의 눈에 단층짜리 시골 학교건물은 아기자기했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유영은 남편과 아들과 축제를 함께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즐거웠다.
“우리 진혁이 저 장난감 사줄까?”
아빠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아뇨.”
진혁은 인상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 저거 재밌어 보이잖아. 빠방인데 미사일도 날아가.”
아빠가 가리킨 장난감은 군용 지프에 로켓발사대가 있는 미니카였다. 콩값을 제대로 받아 주머니가 두둑한 아빠였다.
‘이 양반이 누굴 어린애로 보시나?’
게다가 자동차도 아니고 빠방이라니.
이전 생에서 수십억 자산을 모았지만 그 흔한 자동차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진혁이었다. 아홉 살 몸에 마흔 넘은 아저씨가 들어왔으니 더더욱 장난감에 눈이 갈 리가 없었다.
‘이대로도 충분히 좋아.’
과거는, 아니 미래는 바뀌었다.
부모님을 살린 것만으로 진혁의 슬펐던 생이 사라졌으니, 진혁의 욕심은 한가지뿐이었다.
‘이 시골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살 거야.’
장래희망.
얼마 전 학급에서 장래희망 조사를 했다. 진혁은 장래희망에 ‘농부’라고 써서 제출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웃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대통령, 과학자를 써서 내던 시절인데 공부를 가장 잘하는 녀석이 농부가 되겠다고 했으니.
농부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가족과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었다. 혼자만의 시간은 질리고 지치도록 누렸기에.
‘부모님과 내 고향에서 살 거야.’
돈은 벌만큼 벌어봤고, 인생이 얼마나 외롭고 덧없는 것인지도 익히 경험한 터였다. 기업의 실세 소리를 듣도록 갈고닦은 지식과 실력으로 미래 정보에 투자할 수도 있지만 진혁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돈은 때 되면 다 벌린다.’
따뜻한 아빠의 손. 진혁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아빠의 따스한 손에 눈길을 줬다. 그러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고, 아빠가 아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진혁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어헛! 이것 참 행복하구먼!’
모두가 세상 어디에서도 찾지 못할 아빠라고 인정할 사람이었다.
진혁도 아빠를 올려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삐이잉-.
마이크 소음이 모두의 귀를 사로잡았다.
[잠시 후 운동회의 마지막 순서인 계주가 진행될 예정이오니-.]
운동회 진행을 맡은 1학년 담임 교사의 안내방송이었다.
“우와-, 재밌겠다. 계주 보러 가자.”
“역시 계주가 제일 재밌죠. 호호.”
운동회의 대미.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운동장 트랙을 등지고 타원형으로 앉았다. 트랙이라고 해봐야 땅바닥에 초록색 나일론 끈을 못으로 고정한 게 전부였지만. 그 트랙에서 6학년 남녀 대표가 이어 달리는 게 계주였다.
“가만있어 보자······.”
체육 담당 박재승 선생이 그리 중얼거리며 출발선 근처에 쪼그려 앉았다.
이내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뭘 꺼내고는 머리 위로 망치를 들어 올렸다.
“준비허구잉-?”
그의 시선이 출발선에서 스탠딩 스타트 자세를 취한 두 명의 선수에게 향했다. 수백 명의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출발선에 쪼그려 앉은 모습이 창피할만하건만, 구릿빛 피부의 시골 학교 선생님의 눈동자는 프로페셔널하게 빛났다.
바닥에 놓인 벽돌, 그 위에 올려진 종이화약. 매섭게 조준한 망치.
총이 고장나는 바람에 궁여지책으로 택한 방법이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한차례 돌개바람이 휘돌았다.
긴장이 극에 달한 선수 한 명이 소매로 코를 훔쳤다.
이윽고 박재승이 망치를 힘차게 내려쳤다.
딱-!
아이고, 빗맞았다.
“아이구! 아이구 다시! 가지 말어 봐. 일루 와, 일루 다시 오너.”
부정출발은 없었다.
불량신호만 있었다.
“스읍-.”
심기일전,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이번에는 정확히 내리쳤다.
짜아악-!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청군! 청군!”
“백군 이겨라!”
진혁의 엄마와 아빠는 청군을 응원했다. 진혁이 청군이었으니까. 손뼉을 치며 아이처럼 방방 뛰는 엄마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아빠를 보며 진혁이 실실 웃었다.
“우리 진혁이도 고학년 되면 달리기 나가겠지?”
두근-.
부모님이 자신을 응원하는 모습을 그려 보니 가슴이 뛰었다.
‘달리기라······.’
마음 붙일 곳 없던 이전 생에서도 달릴 때만큼은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었지.
*
운동회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아빠는 진혁을 목말 태워 걸었다. 엄마는 한 손에 진혁이 달리기 1등 상품으로 받은 공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아들의 엉덩이를 받치고 보조를 맞췄다.
“엄마, 아빠.”
“응? 우리 아들?”
“왜? 우리 진혁이?”
대답 하나로 이렇게 행복할 일인가.
진혁은 코를 한껏 찡그렸다가 폈다.
“저 손목시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빠는 아차 싶었다.
제일가는 땅 부잣집 아들인데 다른 아이들 다 있는 손목시계가 없다니.
“아빠가 읍내 나가서 예쁘고 좋은 바늘 시계 사줄게.”
“그래요. 바늘 시계가 아이들 머리에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엄마가 거들었다.
그러나 진혁은 다른 생각이 있었다.
“전자시계요. 비싼 거 아니어도 돼요.”
아무리 저렴한 전자시계라도 스톱워치는 있겠지.
달리기할 때 도움이 될 거다.
“그래. 아빠가 전자시계로 사줄게. 불 들어오는 걸로.”
말로만 듣던 귀한 야광시계를 다 차보겠군요.
이처럼 아빠는 진혁의 결정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시는 일이 없어 좋다.
“그런 거 사주면 애들 안 자고 이불 속에서 시계만 본다던데······.”
“하핫, 그것도 한때예요.”
숫자밖에 없는데 보면 얼마나 본다고.
이 얼마나 순박한 부모님이란 말인가.
스마트폰을 보여드리면 까무러치시겠네.
‘혹시 내 몸 어딘가 스마트폰이 있는 건 아닐까.’
진혁은 혹시나 싶어 주머니를 뒤적였다.
도토리가 나왔다.
옷을 갈아입는데도 세탁물 주머니에 있던 걸 그대로 다음 옷에 넣어 두시는 엄마였다.
‘상태창! 시스템!’
얘 아무래도 웹소설 너무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아홉 살 진혁이 중년 진혁을 향해 중얼거렸다.
남들은 온갖 미래 정보와 기연에 힘입어 돈을 쓸어 담던데, 손진혁은 쓸데없는 기억만 가지고 돌아왔다.
‘회귀자 특전 나만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