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4화 (4/338)

# 4 < 세 생명 (3) >

과거로 돌아온 후, 진혁은 매일 밤 꿈속에서 흑막 뒤의 존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흑막 뒤의 누군가가 진혁에게 말했었다. 언제, 어디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순간 확실히 기억나는 말이 있었다.

【고생 많았다. 돌려보내 주마. 잘하면 세 명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올릴 수 있을 거다. 행복한 삶이 되기를······.】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저 기연도 없이 슬프고 외롭던 삶에 대한 보상으로 보내준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의문을 품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

‘세 명, 죽음.’

드르륵-. 거칠게 의자를 밀고 벌떡 일어난 진혁이 교실 뒤편으로 달려가 달력을 확인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날짜를 비교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린 시절일수록 기억에서 멀리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흐릿한 기억이 아니었기에.

‘오늘이잖아?’

정말 오늘이었다. 이전 생에서 진혁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그래서 내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엄마의 배다른 자매라는 이모의 손에 이끌려 읍내로 전학을 가게 된 거였다. 이 작은 시골 학교의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엄마, 아빠부터 살려야 한다!’

나머지 하나의 생명이 누군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세 명 중 두 명은 진혁의 부모님이라는 것. 부모님이 오늘 돌아가신다. 아니, 돌아가셨었다. 오늘의 오늘은 돌아가시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진혁의 두뇌가 이전 생처럼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조각났던 진혁의 영혼이 고스란히 아홉 살 몸에 내려앉았다.

그만큼 진혁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 부모님의 존재였다.

***

집 마당에 콩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진혁의 부모 손광연과 한유영은 마당에서 콩을 타작했다. 10월 말이면 으레 하는 농사일 중 하나였다. 바싹 마른 콩줄기를 탈곡기로 털고 풍구로 바람을 일으켜 콩깍지와 먼지를 떨어내는 일이다.

“서울에서 공부만 하신 분이 어쩜 이리 농사를 잘 아시는지 매번 놀라게 되네요.”

진혁의 엄마 한유영이 손으로 콩을 뒤적이며 미소 지었다. 흙바닥 위에 깔아둔 파란 포장은 낡아서 군데군데 실밥이 올라왔지만 한유영의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왜 아니겠는가. 올해 콩값이 작년보다 두 배는 비싸다며 중개상이 밭 통째로 가격을 쳐주겠다고 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인데.

그런데도 남편 손광연은 중개상의 제안을 거절하고 직접 읍내에 나가 팔기로 했다. 알아보니 읍내 도매상에 직접 팔면 세 배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한유영의 기분이 좋을 수밖에.

“하하. 잘 알긴요. 그때그때 돌아가는 상황 보고 작물 결정하는 거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밝고 돈을 어떻게 불려야 하는지 아는 손광연이었기에, 보자기에 싸인 옷가지가 전부였던 재산은 10년간 몰라보게 불어 있었다.

살림살이도 폈지만 손광연은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샀다.

두내리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여 바다를 메운 동네다. 염분 때문에 벼농사는 10년 넘게 풍작은커녕 평작도 기대하기 어려웠고, 심을만한 작물은 땅콩이나 고구마 따위였으니. 그 작물마저도 작황은 형편없어 굶지 않으면 다행인 시절이었다.

그래서 농부에게는 땅이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메마르고 황폐한 모래땅에 눈도 돌리지 않았으니. 덕분에 마을에는 ‘손광연의 땅을 밟지 않고는 두내리를 지날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내년에는 이앙기도 사야겠어요. 콤바인은 비싸니까 당분간 빌려 쓰고요.”

“네. 그러세요.”

알아서 잘 하시겠지.

남편은 알아서 잘하면서도 늘 아내와 상의했다.

한유영은 아직도 손광연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건 손광연도 마찬가지였다.

손광연은 대학시절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가 한유영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하루 두 번 운행하는 완행버스밖에 없는 시골. 주말마다 찾아와 구애를 했고. 잘생기고 예의 바른 서울 오빠가 싫지 않았던 한유영은 나이 스물에 진혁을 낳게 됐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다.

물 한 잔 떠 놓고 서로 맞절한 결혼식, 빌린 한복을 입고 읍내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 웨딩 촬영의 전부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오빠는 언제까지 저한테 존댓말 쓰실 거예요?”

“하하. 글쎄요. 자기는 언제까지 오빠라고 할 거예요?”

자기. 시골에서는 쓰는 사람이 없는 말이었다. 두내리에서, 아니 어쩌면 읍내를 통틀어도 오직 한유영만이 그런 호칭을 듣는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을 아껴주고, 존중해주고, 달콤하게 불러주는 사람. 농사일에 손이라도 보태려 들면 세상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손도 못대게 하는 남편. 여자 입장에서는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근데 진혁이가 엊그제부터 이상한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개구쟁이가 너무 의젓해졌어요.”

그래서 밤중에 연애도 조심스럽다.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자는 줄 알고 아내의 가슴을 더듬던 손광연은 진혁의 헛기침 소리에 놀라 급히 손을 거두어야 했다.

그 아쉬웠던 기억이 떠오른 손광연의 맥박이 빨라졌다.

“저기······.”

“크흠-!”

손광연이 조심스럽게 한유영의 손을 잡으며 말끝을 흐렸고.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는 젊은 아내는 헛기침을 삼켰다. 야무지게 콩을 뒤적이던 한유영의 손끝이 사냥감을 놓친 거미처럼 금세 심란해졌다.

“오빠, 곧 있으면 진혁이 학교 끝나고 올 텐데요-.”

그러나 손을 빼지 않는 걸 보면 싫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고.

“오기 전에 빨리 그, 하면······. 하하.”

근처에 다른 집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데. 괜시리 두리번거리며 손광연이 아내의 손목을 잡아 대문 안으로 이끌었다. 부부 절도단처럼 한유영도 덩달아 주위를 살피며 자기 집을 털러 들어갔다.

시골 아이들은 생일이 보통 늦여름이나 늦가을이다. 그 말은, 농사일이 바쁘지 않아 몸이 덜 피곤한, 밤이 긴 농한기에 아이를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금슬 좋고 눈만 마주쳐도 불꽃 튀는 이 부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으니. 무엇보다, 똑똑하고 조숙한 아들 때문에 밤에는 잠만 자야 하는 부부에게는 낮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고 그런 사정이 있었다.

***

마을 청년회장과 반장이 진혁이네 마당에 쌓인 콩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이구-, 이 집은 올해두 둔 사겄네-.”

“그류-, 이렇게 똑실허니께 온 동네 땅을 다 사지.”

옛날 농부들은 작물을 돈보다 귀하게 여겨, 돈을 받고 작물을 판다는 말 대신 작물로 돈을 산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이들은 내심 손광연을 비웃으며 숙덕였다.

‘농사도 뭇짓는 모래땅이랑 야산은 뭐더러 산디야-.’

‘스울 춘눔이라는 말이 괜히 있간?’

한낮의 열사를 치르고. 머리를 매만지는 한유영의 이마에 입을 맞춘 손광연이 급히 창호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 탓이었다.

“형님들 안녕하세요.”

반장 조일헌과 청년회장 박대순은 손광연의 서울 말씨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을 움츠렸다. 손광연이라는 사람은 참 마음에 드는데 서울말은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이, 그려. 그-, 저기-, 뭐여. 진혁 아베 오늘 해루질 같이 갈 텐감?”

“해루질이요?”

들어보기는 했다.

보름이나 그믐이면 사리 물때가 된 서해안은 갯벌과 갯바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바닷가 사람들은 그때마다 횃불이나 손전등을 들고 해산물을 채취했다.

낙지, 꽃게, 망둥어, 농어에 소라, 배꼽고동이라 불리는 큰구슬우렁이까지. 운이 좋으면 붕장어도 제법 씨알 굵은 놈이 올라오곤 했다. 단백질 공급원이 충분하지 않은 시골에서 해루질의 결과물은 좋은 양식이 되었고. 수확이 좋으면 장에 내다 팔아 쏠쏠한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해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걍 후라씨 불만 비치구 구녕이서 끄집어내먼 되는 거여. 자네두 우덜이랑 같은 부락인디 우덜만 가기 저기혀서 그러지이-.”

서울에서 온 촌놈이라고 속으로 무시하긴 했지만, 농사도 잘 짓고 성격도 좋아 굳이 따돌릴 이유는 없었다. 함께 어울리고 싶은데 농사일이 바쁘니 이렇게라도 핑계를 내는 것이었고.

품 넓은 손광연이 그 마음을 읽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시면 같이 가야죠. 하하.”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하는 손광연에게 동네 이웃들은 저녁상을 물리고 다시 만나자며 기분 좋게 자리를 떴다. 조일헌이 마당에 쌓인 콩을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이구-, 그늠의 콩 진짜루 잘 됐다-.”

동네 아저씨들을 보며 장군이가 소리 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

손진혁은 집에 오자마자 숙제를 하고 마당에서 자루를 잡았다. 콩을 담는 아빠를 거들기 위해서였다.

“진혁아, 엄마가 하면 돼. 진혁이는 장군이랑 놀아.”

다른 날이었다면 장군이와 놀았겠지만 오늘은 부모님 곁에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하니까. 어제부터 진혁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장군이가 무서워서 같이 놀기도 어렵고.

“한 명이라도 거들면 더 빠르잖아요. 엄마가 좀 쉬세요.”

아들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서로 존댓말 쓰는 부모 밑에서 컸으니 여느 시골집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말투에서 전해오는 은근함이 마치 어른과 대화를 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애들은 갑자기 큰다고는 하던데. 그게 지금인가?’

그럴 리가.

진혁의 엄마 한유영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아이를 키워보기나 했던가. 한유영은 시골 유지의 딸로 태어나 궂은일 한 번 하지 않고 컸다. 다른 집 아이들은 잔병치레도 한다는데, 그래서 부모 애간장을 다 녹인다는데. 크게 아프지 않고 똑똑하게 잘 자라주는 아들이 고마울 뿐이었다.

‘오늘인데.’

진혁은 일을 거드는 한편 위험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그가 기억하는 이전의 생에 이 동네에 위험한 것이 없었으니 왜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전쟁도 없고, 허무맹랑하게 호랑이나 곰이 나타날 리도 없다. 외진 간척지 마을이라고 해도 엄연히 버스와 트럭, 경운기와 트랙터가 다니는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진혁의 의문은 저녁상을 물린 후 해소됐다.

“진혁아, 엄마랑 아빠는 해루질 다녀올 테니 우리 애기 먼저 자요-.”

“엄마, 해루질? 이 밤에요?”

“응. 많이 잡아서 우리 진혁이 공책 사줄게.”

엄마가 천사처럼 웃으며 진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진혁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였구나!’

식곤증을 호소하던 진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해안은 수심이 깊지 않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사리 물때마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빠져나가는 물을 무시했다가 변을 당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해안가에 ‘할미, 할아비 바위’ 따위로 이름 붙은 바위들이 수두룩했을까. 구불구불한 해안을 빙 둘러가려면 힘들고 오래 걸린다. 물이 빠진 틈에 바다를 가로질러 가다가 밀물이 덮쳐 변을 당하는 노인이 많았다. 할미, 할아비 바위는 그렇게 슬픈 이름을 얻었다.

‘해루질하다가도 너무 멀리 나가서 밀물에 휩쓸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믐이면 달도 없다. 하늘도 어둡고, 갯벌은 하늘보다 더 시커멓다. 밀물 때가 되면 뭍으로 나와야 하는데 방향감각을 상실한 나머지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경험 없는 초짜들이 주로 변을 당했다.

‘지금은 바닷가에 가로등이나 민가도 없어.’

전혀 개발되지 않은 시절이니까.

진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위치가 눌려 전등이 켜지듯 어두웠던 진혁의 기억을 밝힌 탓이었다. 그전까지는 마치 봉인되었던 것처럼, 검은 천을 덮은 것처럼 어둡지 않았던가.

‘이제야 기억이 나다니.’

부모님 기일이 오늘에야 떠오른 것도 부끄러웠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제야 생각난 것도 죄송했다. 뇌의 가소성이니, 기억의 휘발성이니. 혹은 봉인이니 하는 말로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비겁한 변명 같았다.

그래, 이전의 삶에서 엄마와 아빠는 해루질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부모님을 위해 펴둔 이부자리는 그대로였고 진혁은 그렇게 부모 없는 아이가 됐었다.

“엄마! 나도 갈래요!”

“응? 어두워서 무서울 텐데. 그리고 진혁이는 내일 학교도 가야지.”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

의젓해졌던 아들이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자 마음 약한 엄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래. 우리 아들 그럼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 어디 혼자 가면 안 돼?”

아빠가 최고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주는 것이, 다른 아빠들과는 일찌감치 달랐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갑작스럽다. 미리 알았다면 방법을 궁리했을 텐데.

시간이 없었다.

아, 그 방법이 좋겠다!

진혁은 후다닥 창고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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