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세 생명 (2) >
***
다음날이 되어 아침을 먹고 가방을 멨다.
도토리 사건 때문인지 장군이는 진혁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일촌지간이라지만 너무 기어오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진혁이 참기로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장군이에게 뒤꿈치라도 물릴까, 쫓기듯 내달렸다.
다행히 장군이는 진혁보다 빠른데도 뒤를 쫓을 뿐 물거나 추월하지 않았다. 널찍한 개울에 이르도록 진혁의 뒤를 따르다가 우렁차게 짖은 후 집으로 돌아갔다.
서서히 기억이 살아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두 번째 등교를 했다. 어제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고, 숨도 가쁘지 않았다.
진혁은 책상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코로 숨을 들이쉬며 상상을 하는 거다. 공기가 뇌를 거쳐 폐로, 단전으로. 내쉴 때는 역순으로 하여 입으로 뱉는다. 모든 과정에서 심장의 모양과 박동을 의식적으로 느끼면서.
그리 몇 호흡이면 이마의 땀이 식고 뻐근한 다리도 풀렸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르고 체온도 올라갔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하게 되네.’
사기꾼 웹소설 작가들이 부르짖던 회귀자의 특전인가 싶었지만, 숨 쉬는 건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겠지.
과거를 떠올려보면 그런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뭇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진중한 녀석들. 그들은 친구들의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거나, 홀로 뒷짐 쥔 채 쓰레기소각장을 배회하거나, 야산에서 공병을 주워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비록 두드러지는 면모 없이 평범하게 살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나름대로 어른스러웠다.
‘걔들도 회귀자 아니었을까.’
유치한 나머지 동년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명상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드르륵- 덜컹-.
옛날식 미닫이 교실 문이 열리며 웬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양갈래 머리를 묶고 치마를 입은 아이였다.
“손진혁 안녕? 너 집 먼데 오늘도 일찍 왔네?”
“어, 그래. 어서 와요. 출근길은 혼잡하지 않았······.”
뭐라는 거야.
여자아이가 뱁새눈을 떴고, 진혁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초딩 주제에 출근길이라니. 그래도 대화를 나눈 보람은 있었다.
‘어디 보자, 저 어린이는······.’
저 친구는 김민경 어린이다. 학교를 기준으로 버스 길을 따라 진혁의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면 나오는 마을에 사는 친구다. 눈이 크고 눈물이 많았지. 2학년 1학기 때 김민경을 괴롭히는 다른 녀석을 말리다가 싸움이 날뻔한 적도 있다.
허공에 흩어졌던 연기가 다시 모닥불로 모여드는 것처럼. 그렇게 손진혁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내쉬는 숨에 날아갈까, 눈을 감으면 사라질까. 진혁은 모여드는 기억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웹소설 작가들이 다 뻥쟁이는 아닌 모양이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느린 속도로 재생하는 영상처럼 기억이 흘러들어오지 않는가. 놈들은 절반쯤 뻥쟁이로구나.
스며드는 기억에 기꺼워하며 조금씩,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억을 찾아갔다.
*
‘과거로 돌아온 건 알겠는데.’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진혁의 사고는 쉽사리 답을 얻을 수 없는 난제에 매립되어 있었다. 그건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어려운 질문이었으니.
‘나는 도대체 누구지?’
육성으로 뱉었다면 누군가는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하거나 꿀밤을 한 대 쥐어박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은 각자의 영역이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인식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마련 아니던가. 이를테면 아빠, 엄마라는 책임감 같은 것. 그런데 손진혁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의 상황을.
자신이 누군지 몰라서 던진 질문도 아니었다. 누구기에, 누구였기에 이런 기연을 얻어 과거로 돌아왔단 말인가. 이런 일이 닥쳤을 때는 ‘왜 왔는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질문의 순서를 나열하고 재배치할 만큼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손진혁-.”
“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셨기에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응묵 선생님이다. 아직은 국민학교라 불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진혁의 담임 선생님. 항상 웃으시는 분으로, 이전 생을 통틀어 진혁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우리 반장 진혁이가 이번 시험도 백점을 맞았다. 모두 박수 쳐줄까?”
“와-!”
짝짝짝-.
선생님의 대사도, 아이들의 선망 어린 시선도 소름 돋을 만큼 익숙하다. 그저 익숙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한 번 겪어봤던 일이니까.
‘점점 더 또렷이 기억이 나.’
수업. 이전 생에 한 번 배웠던 내용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기억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어디 초등학교 2학년 수업에 어려운 내용이나 있던가. 게다가 진혁은 최고 명문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았었기에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수업 시간에는 칠판을 보며, 쉬는 시간에는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인상을 찡그렸고, 고뇌에 찬 짙은 갈색 눈동자는 심연의 어둠처럼 깊었다.
“우리 진혁이는 어쩜 이렇게 어른스럽니? 추석 쇠고 오더니 더 의젓해졌네?”
아니에요. 멍 때리는데 의젓하다니요. 그리고 이렇게 어른스러워진 건 그저께부터랍니다. 그렇다고 선생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고.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거 참 혼란스럽네.’
아홉 살. 보편적 조기교육이 자리 잡은 21세기의 똑똑한 아홉 살이 아니었다. 아직도 구구단을 떼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고.
“선생님, 재숙이 오줌 쌌어요-.”
수업 중에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후련하게 저질러 버리는 녀석도 있었다. 강재숙이라는 아이가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만큼 영악하지도, 되바라지지도 않았기에 더 순수했다.
*
시골 초등학교 2학년의 하루 수업은 5교시까지였다.
4교시 후 점심을 먹을 때까지 진혁은 모든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기에. 진혁의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
‘양부모.’
왜 그 사람들과 살아야 했는지. 학교가 끝날 때까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 말은 왜 부모님이 저 멀리 떠나셨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억의 복원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30년 넘는 세월이 물리적으로 먼 거리일 거라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천재적인 두뇌의 진혁도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이 시점의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멍하니 앉아있는 진혁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진혁아, 오늘 우리 집에 갈래?”
“너희 집?”
이해원이라는 여자아이였다. 이 친구의 집은 진혁의 집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간, 바다와 인접한 곳에 있었고. 친구의 부모님은 버스 종점에서 가게를 하셨다. 시골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가게. 버스 막차 기사들이 머무는 숙소도 제공해서, 제법 벌이가 괜찮은 집이었다. 그래서 이해원의 입음새는 시골에서 구경하기 힘든 공주님 차림이었다.
“어-, 저기. 친구야, 나는-.”
“가자아-, 오늘 나랑 재밌는 거 하기로 했잖아.”
당장이라도 끌고 가려는 듯 이해원이 진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이전 생의 오늘 이해원의 집에서 뭘 했는지 기억이 났다. 바닷가의 돌을 줍고, 작은 바위를 뒤집어 게를 잡으며 놀았었다. 이해원이 부모님의 가게에서 가져온 과자도 먹었었지.
충격이었다. 그늘진 곳에 이르러, 이해원은 좋은 걸 보여주겠다며 바위에 걸터앉아 치마를 들추고 히죽히죽 웃었다. 기실, 아홉 살이라면 그 당시에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였으니.
‘말도 못하고 어물어물하다가 뭐라고 둘러대고 집으로 돌아갔었지.’
부끄럽고 화끈거렸으니까. 그 기억이 살아나니 다시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전 생에 거세했던 감정마저 돌아온 듯, 순진한 시골아이가 받았던 그때의 충격이 다시금 살아났다.
“어, 친구야. 다음에 갈게. 오늘은 엄마가 일찍 오라고 하셨어.”
“알았어. 약속한 거다? 진혁이 너, 다른 애꺼 보면 안 돼. 알았지?”
이해원이 히죽히죽 웃었다.
오늘 기어이 그 짓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시골에도 발랑 까진 녀석들이 있었고, 못 말리는 개구쟁이들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시골아이들이 도시의 아이들보다 영악한 면도 있었다. 진혁은 결국 시골이나 도시의 문제가 아닌 ‘사람 나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모든 순간이 반복되는 걸까?’
아홉 살 진혁은 멀어져가는 이해원의 뒷모습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자신은 달라졌는데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은 왜 달라지지 않는가, 아직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걸까. 해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이었다.
‘해원이네 놀러 갈까.’
음······가서 뭐 하게. 몸은 아홉 살이지만 취향은 그렇지 않은 걸.
이전 생에서 진혁은 여자와 입을 맞춘 일도 없었다. 결벽증에 가깝도록 여자를 멀리했기에, 감정은 물론 충동마저 억제하고 소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다. 손진혁은 여인을 품은 경험이 없었다. 철저히 혼자 사는 인생을 택했었으니까. 그런데도.
‘경험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맹세코 여자를 사귄 기억이 없거늘. 이것도 회귀자의 특전인가. 설마. 불쾌한 골짜기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가짜 기억이 특전일 리가 없다.
진혁을 혼란스럽게 하는 흐릿한 기억은, 흑막 뒤에 숨은 가면 속 유령처럼 안개 저편에서 일렁거렸다. 아마도 그 유령은 카사노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아홉 살 진혁이었다.
***
3일. 꼬박 3일이 걸려 아홉 살 몸에 있던 대부분의 기억이 돌아왔다. 친구들과 부모님, 그리고 동네 사람들. 그러나 어린 날의 기억뿐이었으니, 아홉 살 몸에 새겨진 기억은 별로 건질 것이 없었다. 진혁에게 필요한 건 앞으로의 기억인데. 특히, 며칠 후의 기억.
부모님은 싸우기는커녕 언성을 높인 일도 없으셨고. 세상 그 무엇보다 진혁을 사랑하셨다. 진혁을 대하는 태도는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조차 시골 사람의 그것과 달랐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네.’
아빠. 동네의 다른 아저씨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과도 많이 다른 분이었다.
일단은 말투부터.
- “안녕하세요, 어르신. 진지 드셨어요?”
- “미경아, 아빠 오시면 진혁이 아빠 다녀갔다고 전해줄래?”
아빠의 말투를 접한 동네 사람들은 목에 뱀이라도 기어 다니는 사람처럼 목을 움츠렸고.
- “진혁 아배-, 이거 한문이 뭐라구 쓴 겨?”
- “진혁 아빠-. 시방 집이 있대유? 우리 시째딸 이름 줌 지어주유-.”
머리 쓰는 일에는 항상 진혁의 아빠를 찾았다.
마실 다닐 때마다 진혁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아빠였음에도 진혁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었다. 매일 보는 아빠였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지.
진혁은 답답했다.
‘집중하자, 집중.’
이전 생의 기억은 아직이다.
부모님을 잃게 된 기억이 아직 오지 않아서, 악독한 양부모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살아서. 그 악몽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조급하기도 했다.
‘겨우 몇십 년인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거냐.’
이전 생의 기억을 찾는 것은 마치 긴 터널을 촛불 하나 켜고 건너는 기분이었다.
그때 까불이 친구 둘이 진혁에게 다가왔다. 강진수와 육성찬이라는 친구들이었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이름은 기가 막히게 찰떡으로 지었다. 선생님들조차 진수성찬이라고 함께 불렀으니.
“진혁아, 우리 싯이서 학교 뒷산 갈텨? 상수리 겁나 많이 떨어졌댜-.”
“얌마, 진수야. 다람쥐랑 청설모두 먹구 살으야지-. 그거 다 수우먼 걔덜 다 굶어죽는댜-.”
진혁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싯이서?
‘셋이서’라는 말이다.
굶어 죽어?
‘죽는다고?’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퍼즐 조각의 홍수였지만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되는 쉬운 퍼즐이었고, 고마운 홍수였다. 터널을 겨우 밝히던 촛불이 헤드라이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야, 성찬아 임마. 진혁이 울잖염마. 왜 죽는 소릴 해가꾸-.”
진혁이 아이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아니야, 얘들아 그런 거 아니야. 고마워.’
기억나게 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