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우리 따- >
성공한 삶이었다.
세간의 평가가 그랬다. 계약직 사원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정직원 전환을 시작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핵심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그리고 지금은 그룹 핵심부서의 팀장 자리에 올라 있다.
그게 뭐 대수인가,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일축하며 히스테리성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딘가 존재할 그런 다수를 향해 오랜 친구가 담백하게 한마디 했다.
“진짜 사회생활 안 해본 병신들.”
“······.”
무엇보다, 손진혁은 미혼이었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은 그 점을 가장 부러워했다. 아무렴,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성공한 인생 아니던가.
후우우-.
20km 남짓 달리기를 마치고 트레드밀에서 내려와 숨을 골랐다.
샤워를 마친 후 탈의실 로커에 있던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재중 전화 25」
혼자가 좋아 회사 체육관이 아닌 민간시설을 이용하고, 번거로운 게 싫어 휴대기기를 들고 다니지 않는 것인데. 문자나 톡도 남기지 않고 이렇게 애타게 전화를 걸 사람은 한 명뿐이다. 전화 연결을 하려는데 마침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었다.
26번째 전화였다.
“네, 전무님.”
- 어룰룰루에베베-.
전화기 너머에서 혀 꼬인 여자가 혀를 내둘렀다.
“알겠습니다.”
옹알이를 알아듣는 경지에 오르니 여가시간에 걸려온 상사의 전화에도 심상은 명경지수였다.
***
바에 들어선 손진혁이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홍수정 전무를 찾았다. 바텐더 앞의 높은 의자, 늘 혼자 앉는 곳. 파도에 흔들리는 다시마처럼 흐느적거리는 여자. 호텔까지 소유한 사람이 왜 다른 곳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걸까. 분명 비서나 경호원도 돌려보냈겠지.
뱅헤어의 단발머리가 진혁을 발견하고는 게슴츠레한 눈에 힘을 줬다.
“틴당님 오셨어요흥-?”
제멋대로 풀어헤친 머리가 머리끄덩이 잡고 싸운 여자 같다. 눈이라도 치켜뜨지 않으면 좋으련만. 술 취한 사람들은 어쩜 이리도 비슷한 걸까.
“이그바, 이그바-. 올 꺼래따느하-.”
“하하! 그러게요. 제가 또 졌네요, 손님.”
진혁은 바텐더에게 삿대질하는 홍수정을 무시하고 본의 아니게 안면이 익게 된 바텐더와 눈인사를 나눴다.
홍수정이 진혁을 보며 빈 의자를 탕탕 두드렸다.
“저년은 드셔떠요흐응-?”
발음이라도 똑바로 하면 좋을 텐데.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며 진혁이 중얼거리듯 답했다.
“아직요. 운동하고 왔습니다.”
“어구구, 울희 틴당닌 배곱뿌시겠단. 아더띠 여기 라면 대요흥?”
어지간하다 정말. 진혁은 난처하게 웃는 바텐더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를 지그시 악문 채였다.
“괜찮습니다. 이거나 마시고 나가시죠.”
“예에, 뉘예-.”
꽐라 주제에 홍수정이 띠껍다는 듯 대답했다.
카운터에 놓인 위스키병은 하나. 석 잔이나 마셨을까, 많이도 남았다.
진혁이 바텐더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눈썹을 들썩이자, 바텐더가 머쓱하게 웃으며 검지 하나를 세웠다.
‘오늘도 내가 다 마시겠네.’
남은 술은 킵 해두면 그만인데, 땄으면 다 마셔야 한다며 근성을 보이는 홍수정이었다. 술도 약한 사람이.
세인그룹 회장의 외동딸. 스물아홉이던 홍수정이 세인중공업 현장사무소에 사원으로 입사하며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진혁은 계약직 대리였고, 홍수정의 사수였다. 거친 곳에서, 일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에게 배우도록 하라는 회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모두가 조심하며 홍수정의 눈치를 봤지만 진혁은 달랐다. 부사수의 사소한 실수에는 단단히 혼을 냈고, 큰 과실은 자신이 나서서 해결했다.
진혁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해요.”
회장이 보낸 금일봉도, 특채 조건도 관심 없다며 마다하고 진혁은 묵묵히 일만 했다.
홍수정이 보기에 조직 내 모두가 진혁에게 의지했다.
그래서였을까. 홍수정도 진혁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승진을 거듭하며 계열사를 이동할 때마다 진혁에게 젖과 꿀······, 꿀로 꼬드겨 자신을 보좌하게 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크고 달달한 꿀이었다.
“제가 이렇게 빨리 올라올 수 있었던 건 팀장님 덕분이예요.”
술이 몇 잔 돌았음에도 어쩐 일인지 홍수정이 제법 또렷하게 말했다. 불콰한 얼굴로 상체를 숙이고 올려다보는 건 여전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무님 공입니다.”
“아이-,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오-.”
꼿꼿한 진혁과 달리 홍수정은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떨어질 듯 흐느적거렸다.
“저를 데려오신 게 전무님이시니까요.”
홍수정은 이게 무슨 뜻일까 고민하며 고양이 눈을 깜빡였다.
나를 알아본 당신의 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름의 유머가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홍수정의 반응이 귀여워서 손진혁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그려졌다.
“어! 어어-! 우서떠! 우터떠!”
웃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는 남자였으니 놀랠만했다. 필사적으로 삿대질을 하던 홍수정이 기어이 풀썩 쓰러졌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지는 여자가 이제까지 버틴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둘 사이에는 700ml 위스키 한 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
“오퐈라고 해도 돼야?”
아뇨.
“오퐈, 내 별명이 왜 대마법사인지 알아야?”
압니다.
“오퐈는 꾸미 모에야?”
진혁의 등에 업혀 다리를 달랑이며 홍수정이 쉼 없이 앵알거렸다.
꿈.
‘내게 꿈이 있었던가.’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을 꿈이라 부르던가. 진혁은 다재다능했지만, 무엇도 꿈꿀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읽고 외우며 시험만 잘 본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니.
‘그나마 대학도 중퇴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잘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라도 살고 싶었다.
진혁도 부모님의 사랑 속에 개구쟁이로 살던 때가 있었다.
엄마, 아빠······.
“오퐈는 달리기가 그렇게 됴아야?”
좋아합니다. 달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행위였으니까. 숨이 차오르도록 달려야 심장이 쿵쿵 뛰었으니까.
신이 난 사람처럼 다리를 달랑거리며 앵알대는 홍수정을 무시하고 묵묵히 걸었다.
“오퐈 고자에야?”
오냐오냐 했더니 선 넘네.
업은 채로 후방낙법 칠까. 진혁이 중얼거렸다.
“오퐈.”
소셜 포지션도 있는 분이 부하 직원에게 오빠는 좀 아니지 않나. 인간관계, 그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많은 진혁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분야였다.
“아, 오쁘와아-.”
대답이 없자 홍수정이 다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네.”
“라면 머꼬 갈래야?”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라면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술만 마시면 라면 타령을 하지 않았나. 유학 생활이 길어져 라면에 중독된 거라는데, 당사자 주장 외에 믿을만한 증거가 전무했다. 그래서 전무인가.
“호텔 다 왔습니다. 라면은 다음에 먹죠.”
홍수정을 알아본 호텔 직원들이 달려 나왔다. 바닥에 내려 하이힐에 탑승하니 꼬꼬마가 훌쩍 커졌다. 침실에 드는 모습을 확인 후 담당 매니저에게 입단속을 당부했다.
“얘기 새나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 물론입니다.”
어차피 한두 번도 아니니 직원들이 알아서 할 터.
땀도 식힐 겸 호텔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찬바람이 돌기 시작한 계절, 훅 달아오른 몸으로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다.
지갑에서 사진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사진 속 모델을 차례대로 짚었다.
‘엄마, 아빠, 나, 장군이.’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다.
어린 아들만 남겨두고 너무 일찍 떠나셨다.
세상 누구보다 곱고 상냥했던 엄마.
영화배우보다 잘생기고 다정했던 아빠.
‘내일 만나러 갈게요.’
눈동자에 바람이 불어 사진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지갑에 갈무리하고 호텔을 나섰다. 망토처럼 제 몸을 감싸는 찬바람이 기껍지 않았다. 넓은 어깨를 한 차례 무심하게 흔들어 떨어냈다.
***
진혁은 오늘도 일찍 출근했다.
그룹사 주요 프로젝트 PM으로 있는 팀원들의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고 있자니 본부장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본부장 지시사항이라며 매일 저런다.
커피 향을 맡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팀원들이 상신한 보고서 팀장 확인란에 전자결재 서명을 했다.
아직도 정규 근무시간보다 이른 시간, 짬을 내어 개인 자산을 확인했다. 오피스텔은 처분할 생각이고, 주식과 예금 등, 모두 합치면 40억에 달하는 자산.
아빠가 일구신 땅 중 겨우 지켜낸 조막만 한 덩어리는 내려가 살아야 하니 그냥 두고······.
‘스톡옵션 행사해서 합치면 60억 정도 되려나.’
조용히 혼자 살기에 넉넉한 자산이다.
이제 슬슬 차를 사도 될 것 같다.
시골에 내려가 살려면 그게 좋겠지.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직 40분이나 남았는데. 팀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석사, 박사, 그리고 해외법인장 출신 팀원까지. 하나같이 실력과 경력을 갖춘 인재들이다. 심지어 팀장보다 직급이 높은 팀원도 둘이나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팀원도 있었지만, 진혁의 육성과 관리를 거쳐 이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기획가로 성장했다. 자신이 떠나도 이들이 홍수정을 잘 도울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두뇌가 뛰어나다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진혁은 자신의 성공 뒤에 홍수정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홍수정이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여, 빠른 은퇴를 선언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결심한 일이었다. 속세를 벗어나 엄마, 아빠에게 사랑받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사는 것. 진혁의 남은 계획이었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동기부여 없고 열정이 고갈된 남자의 선택지라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팀장님, 전무님 출근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메신저가 있는데도 굳이 직접 와서 전하는 본부장 비서였다.
재킷을 걸치고 비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본부장실에 들어서자 홍수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어색하게 웃었다.
“에흠! 팀장님, 어제는-.”
“민용락 부장이 진행하는 전자 해외법인 사업 다각화 보고서 결재 올라갔을 겁니다.”
“아, 네.”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고 자주 있는 날 중 하루였을 뿐이다.
감정이 거세되고 감각이 둔해진 진혁은 달리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었고.
“저-, 오늘 C-level 정기 회동이 있는데요······.”
“벌써 그렇게 됐군요. 알겠습니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홍수정은 아버지 홍기준 회장을 만나는 걸 꺼렸다. 마치 반항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손진혁이 고위임원 회의에 대신 참석했고, 홍기준 회장도 문제 삼지 않았다.
“죄송해요, 번번이.”
“아닙니다. 그럼-.”
가볍게 목례하고 본부장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부모님 산소에는 내일 첫 버스로 가야 할 것 같다. 식혜는 고향에 가서 사면 되고, 망둥어 말려둔 게 냉동실에 있으려나. 술을 입에 대지 않던 부모님은 식혜를 좋아하셨다.
“민 부장님, 저 호텔에 갈 테니 팀원들 일찍 퇴근시키세요.”
“넵! 주말 잘 보내십시오, 팀장님!”
민용락 부장이 장난스레 절도있게 대답했다. 계열사 해외법인장 출신에 법무팀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소비자보상 관련 소송에 패소해 직위해제 후 권고사직 위기에 몰린 걸 진혁이 팀원으로 데려왔다. 쉰이 넘었고 직위도 진혁보다 높은데, 어리고 직급 낮은 팀장이라고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며 업무에 열의를 보였다.
진혁이 책상 밑에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사모님 생신 축하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부장님만 믿고 갑니다.”
“아이고! 매번 이거 어쩔-. 어허허, 고마워요.”
세상 뻣뻣한 진혁이었지만 제 사람들은 확실히 챙겼다.
***
진혁보다 젊은 임원도 몇 있었다.
그러나 임원단의 시선은 진혁에게 쏠려 있었다. 마치 영화배우 같은 아우라를 풍기며 사장단과 임원들 틈에서 홀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가.
껄렁하기로 유명한 세인네트웍스 대표이사가 진혁의 팔을 툭 쳤다.
“홍 전무랑은 잘 돼가?”
“무슨······.”
“에헤이-, 사람 내숭은.”
둘이서 호텔을 들락거린다는 소문 때문이겠지.
마침내 회장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고, 임원단이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모두가 허리를 깊이 숙이는데, 진혁은 깍듯하지만 가볍게 숙일 뿐이었다.
키 큰 사람이 그러니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허허-, 우리 그룹 실세께서 여기 계셨구만.”
홍기준 회장이 진혁에게 다가와 등을 두드리고는 팔을 잡아끌었다.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남겨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것 보라니까, 사위로 낙점한 거야.”
“한 달도 안 돼 이혼한 딸내미가 얼마나 눈에 밟히시겠어? 벌써 10년도 넘었지.”
“이혼이 아니라 홍 전무가 파투낸 거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칠순이시니 딸한테 경영권 넘길 준비하려는 거 같네.”
“딸이 아니라 사위한테 넘기려는 거 아닐까요? 홍 회장님도 장인 사업 물려받으신 거잖습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 잘하면 그룹 전통이 될지도 모르겠어.”
남자는 나이가 들면 양기가 입으로 간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것은 참으로 진실된 말씀이었다.
***
회동을 마치니 어두운 하늘에 찬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회장을 배웅하기 위해 호텔 앞에 임원들이 도열했다.
진혁의 앞에서 홍기준 회장 차량이 멈춰서더니 VIP석 창문이 내려갔다.
“손 팀장은 차가 없지? 비도 오는데 내 차로 함께 가세나.”
방향이 다른데도 굳이 동승을 권하는 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뜻일 터.
타인에 무관심한 진혁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네, 그럼.”
기사로 있는 김 부장이 급히 내려 운전석 뒷좌석 문을 열었다.
김 부장에게 묵례하고 차에 올랐다.
진혁을 태운 차가 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자 임원들의 허리가 일제히 꺾였다.
비록 자신에게 하는 인사는 아닐 것이나 임원들의 배웅을 받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김 부장, 비도 오고 좋은데 좀 멀리 돌아갑시다.”
“예, 회장님.”
무슨 말씀을 하려고 이러시나. 예상되는 화두가 있었지만 굳이 예측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은 따로 있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도 나눴다.
그러다가 홍기준 회장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자넨 꿈이 있었나?”
회장의 시선은 빗줄기가 꽂히는 차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진혁은 말없이 품 안의 얇은 지갑에 손을 얹었다.
지갑에는 사진 한 장뿐이다.
그때 홍기준 회장이 진혁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포개 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얼마만의 온기인지 헤아릴 틈도 없이 홍기준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올 것이 왔구나.
노인의 면전에서 거절할 용기는 없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야 할까. 이거 왠지 남은 생이 꼬일 거 같은 느낌인데.
“딸아이 엄마하고도 얘기가 된 건데······.”
엄마까지 나왔다.
홍기준 회장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낼 때였다.
“우리 따-.”
꽈아아앙-!
끼이이이이-!
굉음과 함께 차체가 흔들리고 몸이 급격히 쏠렸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늙은 회장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막았다.
***
아주 오래 누워 있었던 것 같다.
뺨이 왜 축축하지? 진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