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85화 (57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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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시우스, 어째서 실피리오를 그냥 그렇게 돌려보낸 거냐...”

    이야기를 마친 실피리오가 역소환 되어 자리에서 사라지고 정령들이 떠나자 지금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카그네프는 곧장 카시우스를 향해 득달 같이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구슬려 놈들의 조력자가 되었어야지!”

    그들은 카시우스가 실피리오의 마음을 흔든 덕에 현재 이곳의 흘러가는 대략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 듣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카그네프가 판단한 바...

    “카시우스! 뭐라고 좀 말이라도 해봐라!”

    이 세계는 무척 위태로워 보이기 그지없었다.

    실피리오가 나름 숨긴다고 숨겼지만 그녀의 성격상 말투나 행동 등등 초조함만큼은 숨기지 못한 탓이었다.

    이러다간 빛과 어둠의 지대에 남겨두고 온 그들의 세력이 재료와 단서를 찾아 끝에 다다르기 전에 이곳이 클리어 될지도 모르는 일!

    만약 그렇게 될 시 여태까지 해온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되기에, 카그네프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건 어쩌면 생물로서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심각한 상황을 크라베스는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

    “하하, 카그네프. 카시우스에게 너무 그러지 말아라. 카시우스도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일 테니.”

    크라베스가 웃으며 카그네프와 카시우스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그네프는 대번에 시선을 옮겨 크라베스를 노려봤다.

    “어이, 크라베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오나? 지금 우리가 해놓은 모든 것이 자칫 수포가 될지도 모르...”

    “하하, 농담 아니다만.”

    “...뭐라고?”

    “방금 한 말 그대로다. 난 진지하게 카시우스가 생각이 있어서 그 바람의 정령왕을 그냥 보내준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유? 흠... 그건 카시우스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어때? 카시우스도 이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거 같은데.”

    크라베스가 쓱 카시우스를 응시하자, 카시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카시우스는 크라베스의 말처럼 여태까지 진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카시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라베스의 말대로다. 난 생각이 있어서 실피리오를 붙잡지 않고 그냥 보냈다.”

    “뭐? 어째서...”

    “실피리오는 굉장히 고집이 있는 친구다. 한 번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

    “뭐? 그게 무슨...”

    “그녀는 우리가 적이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 우리의 조력을 원하진 않고 있었다. 아마 그 정도까진 당장에 신뢰가 가지 않았던 거겠지. 그러니 내가 아무리 조력자가 되겠다고 말했어도 결국엔 안됐을 거다. 되레 반감만 크게 샀겠지.”

    “흠... 뭐, 확실히 그 정령... 굉장히 고집이 있어 보이긴 했다만... 그래서?”

    “차분히 기다려야 된다. 그녀가 스스로 우리의 필요성을 깨닫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

    “...그래서 마지막에 그렇게 말을 한 거였나. 카시우스.”

    실피리오가 사라지기 직전.

    카시우스는 그녀에게 이곳에서 정확히 한 달간 기다린다고 했었다.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라고.

    “만약 그녀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땐 어쩔 수 없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이니까. 하지만... 실피리오가 내게 보인 초조함으로 보건대...”

    “한 달 안에 뭔가 생길 확률이 높다는 거로군.”

    “그렇다. 그러니 기다려보자. 실피리오는... 분명히 나를 다시 찾아올 거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카시우스가 확신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부서지듯 거칠게 흔들리며 하늘이 더욱 크게 박살 났고, 실피리오는 바로 그다음 날 한 달이라는 기간이 무색하게 그들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카시우스... 도와줘.]

    크라베스와 카그네프는 실피리오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 * *

    “이제 한 군데만 더 부수면 끝이네요. 여왕님.”

    “그래, 그렇구나.”

    “어차피 상대가 될 자는 없을 테니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하하!”

    짝짝짝!

    에반이 장난스럽게 물개 박수를 치자, 알베타스는 그런 에반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에반, 판도라 외부에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해 유세현 대신 어쩔 수 없이 얻은,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충직한 신하.

    “에반, 장난은 거기까지 하도록 하고. 곧 인간들과도 부딪치게 될 텐데...”

    “예. 그렇겠죠. 알고 있습니다.”

    “괜찮겠느냐?”

    “하하, 지금 신경 써주시는 건가요? 여왕님?”

    “군주가 되어 신하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당연한 이치. 더군다나 너는 내가 무척이나 아끼는 신하가 아니더냐.”

    “......”

    “싸우기 싫은 상대의 이름을 딱 한 명 말해 보거라. 그자와의 싸움은 피하는 것을 허락해주도록 할 터이니.”

    군주, 알베타스의 말에 에반의 표정이 굳으며 입이 순간 꽉 닫혔다.

    그는 지금까지 알베타스가 자신을 생각하여 인간과 관련된 전투에 일부러 최대한 투입시키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리 말한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봐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의미.

    강제로 수복시킨 자에게 이런 배려까지 할 필요는 애초에 없을 터인데.

    정말 지켜주고 싶게 만드는 귀여운 군주 아닌가.

    “배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왕님. 하지만 그 배려는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젠 어엿한 알베타스족이니까요.”

    “...흠... 그렇느냐. 무리할 필요는 없다만.”

    “무리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 네가 뭐 그렇게까지 각오를 했다면야... 하지만 방금 한 말을 거두진 않겠다. 사용할지 안 할지는 네가 상황에 닥쳤을 때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하도록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뭐 새롭게 나온 게 있나 애들에게 보고를 받으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거라.”

    에반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알베타스가 수고하라는 듯 손짓했다.

    그렇게 에반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린 찰나였다.

    찌잉-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싹한 감각이 그의 목덜미를 찔렀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 느낌은...!’

    치잉!

    곧장 칼집에서 검을 꺼낸 에반이 알베타스의 우측에 위치한 산호 기둥을 향해 검격을 내질렀다.

    쌔애액-

    콰앙!

    쿠구구구궁-

    산호성을 지지해주고 있던 메인 기둥 중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자 순간적으로 산호성이 거칠게 흔들린다.

    에반이 허공을 응시하며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그러자 바스러진 기둥 주위 풍경이 흔들리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과거 인류 최강이었던 자. 대단하군요. 에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세레나 레퀴아르크. 역시 당신이었나.”

    “네. 맞아요. 오랜만이네요 에반. 그보다 역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당신은.”

    “...뭐, 그렇지. 회중시계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이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이었으니까. 역시 예상대로 기억을 잃지 않게... 아니 우리처럼 되찾을 수 있게 모종의 장치를 해뒀었던 모양이군.”

    “예, 맞아요. 역시 예상하고 있으셨군요.”

    “왜 이곳에 온 거지? 단순히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

    트득-

    에반이 자세를 다잡았다.

    임시라곤 하나 이곳은 여왕이 머물고 있는 거처, 보안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런 이곳을 이토록 손쉽게 뚫다니?

    “진정하시죠 에반. 저는 당신이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여왕을 암살하거나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에 세레나는 양손을 내밀고 휘휘 내저으며 공격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했다.

    허나.

    “......”

    에반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묘한 불쾌한 감각이 그의 전신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방심하지 말라고, 믿지 말라고.

    ‘후...’

    그러고 보면 그때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

    접점 하나 없었던 그녀가 마치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나 신의 회중시계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사람 좋은 말을 내뱉었던 바로 그때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말은 정말 소름 끼치기 그지없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거절할 순 없었지만...

    “......”

    불쾌감이 극도록 치닫는다.

    스슥-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한 에반이 선 공격을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난 괜찮으니 멈추거라 에반.”

    지금까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알베타스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 싸울 맘이 없다고? 그럼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세레나여.”

    알베타스가 마치 광대를 쳐다보는 듯한 눈초리로 세레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에게 알려줄 게 있어서입니다. 여왕이여.”

    세레나는 즉각 반응했다.

    “호오, 내게? 네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선 알베타스가 짙은 웃음을 머금고는 세레나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천천히, 마치 적이 아닌 신하에게 향하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

    에반은 그러한 여왕의 모습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신감이 있다고 해도 세레나는 보통의 대리자가 아닌 특수한 인물.

    기습공격이라도 가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후우...’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여왕인 알베타스를 믿는 것뿐이었다.

    알베타스가 저렇게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기에.

    이윽고 세레나에게 다다른 알베타스가 얼굴을 쓱 들이밀며 말했다.

    “그래, 내게 알려줄게 무엇이냐.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허락할 터이니.”

    세레나는 이에 곧장 미소로 화답하며 입을 열었다.

    “여왕이여, 유세현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여동생?”

    “예, 유혜인이라고 하는 여동생이죠.”

    세레나가 손가락을 빙그르르 돌렸다.

    지잉-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 옆으로 이 세계의 일정 지대를 스캔해놓은 듯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세레나는 이곳의 위치부터 설명했다.

    “지금 보고 있는 이곳은 여기 산호성 정문을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약 2450km 정도 가량 가면 나오는 지역입니다.”

    “호오, 그래서?”

    세레나는 알베타스가 답하기 무섭게 곧장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방금 말한 유혜인이란 여자는 지금 이 근처에 있습니다.”

    “호오, 이 근처 말이냐? 그래서?”

    “제가 알려드리려 했던 건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왕이여.”

    “호오, 그렇느냐? 그래서?”

    알베타스가 눈을 번뜩였다.

    계속되는 알베타스의 이상한 반문에 세레나가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이냐 세레나여.”

    알베타스의 입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

    세레나는 이러한 알베타스의 모습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상황을 즐기듯 웃고 있던 알베타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이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짜고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아니면 이용당한다고 생각되어 중간부터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하는 말을 마지막까지 웃으며 들어주었는데?

    아니면 그런 모습은 연기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부터?

    어렵다. 그 무엇보다도 무척이나.

    감정을 연구하여 감정이 없음에도 지니고 있는 데이터를 토대로 대략적인 맞춤 연기가 가능한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통계 어차피 통계.

    만능은 아니니까.

    ‘아무쪼록 내가 알베타스의 심기를 건든 모양이군.’

    세레나는 거기까지 생각 한 뒤 하던 생각을 접었다.

    세레나의 목표는 싸움이 생기던 말던, 상대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알베타스에게 이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리스크 없는 함정에 욕망을 못 이겨내고 뛰어들도록.

    “무례했다면 사과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왕이여. 그럼 저는 할 일을 끝냈으니 이만...”

    할 일을 끝낸 그녀가 자리를 이탈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멈추거라 세레나여. 아직 넌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알베타스가 세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레나는 블링크로 그것을 회피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쉬이익-

    마치 어디에 나타날지 알고 있었던 것 마냥 한 발 앞서 움직인 알베타스가 바람처럼 쇄도했다.

    콰아아앙!

    재차 세레나의 앞에 다다른 알베타스가 이번엔 진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 세레나여. 그래서? 답은?”

    습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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