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8/606 --------------
마왕은 코 닿는 거리까지 목표물에 접근해놓고 어째서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일까.
급작스럽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아니, 무슨 변화를 갑자기 맞이했기에.
‘아무쪼록 계획을 수정해야겠군.’
스륵-
세레나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왕의 갑작스런 이상행동은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세레나조차도 신경이 갈 정도로 기이하기 그지없는 일이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언제나 최우선시하는 것은 목표의 달성.
세레나가 툭 손가락을 튕겼다.
딱-
스슥-
“부르셨습니까. 세레나님.”
그러자 세레나의 옆으로 한 명의 여성형 레드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래, 잠시 나갔다 와야겠구나. 쉴린, 예전에 했었던 것처럼 네가 잠시 내 역할을 맡아줘야겠다.”
“알겠습니다.”
총괄자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것이니 이유를 물어볼 법도 하건만 쉴린은 한 치의 망설이 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쉴린은 키르쉬나처럼 맹목적으로 세레나를 따르는 충복 중 하나였다.
“그럼 바로 변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거라.”
그리고 그런 쉴린의 고유특성은...
꾸물꾸물-
트드득-
쉴린의 전신이 마치 진흙 점액처럼 꿈틀거리더니 얼굴부터 발끝까지 세레나와 똑같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는 인간의 편에 선 제르오펜처럼 그 희귀하기 짝이 없는 고유특성, 의태의 소유자였다.
“후... 잠시 잘 되었나 확인해보겠습니다.”
변형이 끝나자 쉴린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점검에 들어갔다.
“잘 된 것 같군요.”
그리고 이런 쉴린의 고유특성을 알고 있는 인물은 세레나를 제외하곤 키르쉬나를 포함하여 극히 일부뿐이었다.
“그럼 이곳은 저에게 맡기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세레나님.”
“그래, 내가 없는 동안 대역을 잘 부탁하도록 하마.”
“예, 알겠습니다.”
쉴린이 자신감 있게 답하자 세레나가 장소에서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췄다.
* * *
“저, 저들은...”
드래곤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 당도하는데 성공한 카시우스가 한 생명체를 눈으로 확인하기 무섭게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왜? 아는 놈들이냐? 카시우스?”
“......”
“아, 아는 놈들이냐니까?”
“......”
“...카시우스... 지금 뭐 하자는 행동이지? 안다면 안다 모른다면 모른다 답을 해라.”
이 모습에 의문을 느낀 크라베스와 카그네프가 닦달하며 캐물었지만 카시우스에게서 되돌아오는 것은 깊은 침묵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현재 카시우스의 귀엔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앞으로는 절대로 보지 못할 것 같았던 존재가 지금 눈앞에 버젓이 존재했다.
결국 참다못한 카그네프는 카시우스의 멱살을 낚아채려 했다.
“이 자식이 진짜... 어이 카시우스 지금 내 말이...”
“잠깐! 가만히 있어봐라 카그네프. 지금 놈의 귀에는 정말 우리말이 안 들리는 거 같으니.”
“뭐?”
“뒤를 한번 돌아봐봐라.”
카그네프가 크라베스의 말마따나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뒤를 살폈다.
“...뭐냐 이건 대체...”
카그네프는 그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카시우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엘프들이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마치 못 볼 걸 마주한 존재처럼.
크라베스가 말했다.
“봤지? 저런 상태니 잠시 기다려보자고. 곧 정신을 차릴 거다.”
“후... 대체 저게 뭐라고...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군.”
“카그네프.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이강호의 기억을 읽었을 때 정말 여기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었나?”
“그렇다. 당시 이강호는 늦게 이 유적에 진입했고 이 세계는 이미 닫힌 상태였다. 네가 생각하기에 그런 놈이 이곳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같나?”
“...흠... 확실히 그렇군... 이강호 녀석 당시에는 약했던 모양이구만.”
“약했다기보다는 기반 세력이 없었지. 내가 본 기억에서 당시 인간은 거의 전멸 상태였으니까.”
“크큭, 그랬단 말이냐?”
“그래.”
고개를 끄덕인 카그네프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카시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타닷-
그런 카그네프의 바람이 무색하게 정신을 차린 카시우스는 난데없이 이 세계의 몬스터로 추정되는 생명체를 향해 질주하는 기이한 행동을 취했다.
“...?! 뭐야? 저놈?”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순간 당황한 카그네프와 크라베스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적이 약해 보일지언정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무작정 접근하려 하다니?
“이런, 쫓자! 카그네프!”
“빌어먹을 카시우스...!”
그들은 이를 갈며 다급히 카시우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저놈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이! 카시우스! 너 지금 대체 진짜 뭐하는 짓거리... 이런...!”
“공격이 온다!”
콰과과과-
크라베스가 외치기 무섭게 카시우스의 접근을 알아챈 몬스터들이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그들을 향해 공격을 감행해 왔다.
쿠구구구-
엄청난 바람의 폭풍이 그들 전신을 휩쓴다.
“크윽, 이 빌어먹을...! 카시우스으으-!!”
카그네프가 이를 뿌득 갈았다.
몬스터가 날린 스킬의 위력은 그의 입장에선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약하기 그지없었지만 문제는 카시우스의 돌발행동으로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것.
카그네프의 인내심은 지금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으으-!!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카시우스! 너 저놈들 다 쓰러트리고 보...”
마침내 더 이상 못 참은 카그네프가 카시우스에게 이를 드러내려던 순간이었다.
[바람의 중급 정령들이여! 들어라! 나는 바람의 정령왕 실피리오의 친구이자 엘프의 수장 카시우스다! 대화를 하고 싶다! 공격을 잠시 멈춰주길 바란다!]
카시우스의 입에서 마력을 듬뿍 실은 거친 사자후가 퍼져나갔다.
‘...뭐라고?’
카그네프와 크라베스는 순간 눈이 동그랗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해본 말이건만 정말 몬스터와 아는 사이라니?
“크라베스. 넌 어떻게 생각하나.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 어디 잠시 지켜보자고.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크라베스와 카그네프는 이에 잠시 자리에 정지해 응전하려던 것을 멈췄다.
스르륵-
한순간 큰 정적이 일더니 마치 마법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거세게 공격해오던 몬스터들의 공격이 잦아든다.
카시우스는 마치 아기를 대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섰다.
[...정말... 카시우스 맞네...]
그러자 그를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인지, 한 여성형 바람의 중급 정령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시우스는 한눈에 그 정령이 누군지 알아보고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이네. 내가 아는 그 실핀. 맞지?”
[...응. 맞아. 너와 계약했었던...]
“잘 지냈어?”
마치 헤어졌던 연인과 재회한 것처럼.
실핀을 향해 말하는 카시우스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하하, 잘이라... 뭐 얼마 전까진 나름 잘 지냈었어.]
“얼마 전까진?”
[응. 이유는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실핀이 마찬가지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있는 웃음이었다.
“...실핀. 실피리오를 불러줄 수 있어?”
[...불러서 뭘 하려고? 너와 우리는...]
침략자와 침략당하는 자의 관계일진대.
“......”
마지막 실핀의 말에 카시우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렇다.
자신은 이 세계를 부숴야 되는 대리자였고, 그녀는 이 세계를 지켜야 되는 유적지의 생명체였다.
하지만...
“그래도 꼭 대화를 해보고 싶어 실피리오와. 부탁할게 실핀.”
[......그럼 옛날의 정을 봐서 한번 말은 해 볼게. 실피리오님이 만나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다. 실핀.”
[...뭘... 이 정도로...]
실핀이 고마워하는 카시우스의 얼굴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이렇게 재회한 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슈우우욱-
이윽고 실핀이 만들어져 있는 정령 마법진을 통해 통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에 이 모습을 지금까지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카그네프가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어이, 크라베스.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니냐. 지금 부르고 있는 실피리오라는 녀석... 보통 녀석이 아닐 거 같은데... 만약 이 모든 게 저 정령이란 놈들이 쳐 놓은 함정이라면...”
“흠... 확실히 그러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우리는 막 이곳에 다다라 이곳의 환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니까.”
“그렇지? 역시 지금이라도 그냥 놈들을 쓸어버리는 게...”
“아니, 그래도 일단 그냥 한번 지켜봐 보자고. 혹시 아나? 대박이 터질지.”
크라베스가 보기에 카시우스는 저 정령이란 존재들과 보통 친한 것이... 아니 친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서로의 입장이 달라져 경계하고는 있다지만...
‘그 입장이 침략자와 침략당하는 자의 관계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보통 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확률은 나름 제법 된다.’
쿠구구구-
마침내 일대에 거친 돌풍이 일며, 그 돌풍속에서 타 정령과는 완전히 생김새가 다른 여성형 정령이 나타났다.
산들바람, 폭풍 등등 마치 바람이라는 단어의 정의, 그 자체가 정형화된 듯한 모습.
“...실피리오...”
카시우스가 작게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실피리오를 응시하는 카시우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련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과거의 동반자.
[오랜만이네. 카시우스. 여긴 어쩐 일이야?]
하지만 다가와 그렇게 말하는 실피리오의 눈동자는 예전과 달리 무척이나 차갑기 그지없었다.
[너도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온 거야? 대리자의 신분으로?]
“아니, 실피리오. 그런 게 아니야. 난...”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돌아가. 난 지금 그걸 말하려고 이곳에 온 거야.]
실피리오가 싸늘하게 말했다.
카그네프는 이 모습을 보기 무섭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글러먹은 거 같은데?”
“흐음, 글쎄... 어디 한번 계속 봐 보자고.”
반면 크라베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크라베스와 카그네프, 두 사람의 이목이 다시 카시우스에게 집중된 순간이었다.
카시우스가 실피리오를 또렷이 응시하며 말했다.
“실피리오... 너 지금 많이 힘들구나.”
[...뭐? 갑자기 그게 무슨 거지 같은 소리야? 내가 왜 힘들어?]
“넌 힘들 때 그런 표정을 짓잖아. 지금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은 거지?”
[......]
실피리오의 눈가와 입이 순간 씰룩였다.
예전부터 카시우스는 그녀의 기분을 읽는 데 귀신이었다.
안 본 지 한참 되어서 이제는 전혀 못 알아챌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귀신이네. 카시우스.’
하지만 이 세계를 지키는 수호자로서 이를 인정할 수는 없는 법.
[전혀 아니니까 걱정마라. 이 세계를 침범한 머저리 같은 대리자들은 충분히 잘 격퇴 중이니.]
“아니잖아.”
[아 맞다니까. 내가 맞다는데 니가 뭔데 마음대로 판단질이야?]
“...정말 그런 거라면야 다행이지만...”
[정말이니까 신경 꺼라.]
“...알았어. 네가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야... 실피리오. 많이 보고 싶었다.”
카시우스가 아련하게 실피리오를 쳐다보며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깜짝 놀란 실피리오는 다급히 두 발자국을 물러났다.
[이런 젠장할! 멈춰! 너와 나의 지금 관계를 잊은 거냐? 거리 유지 못해?]
“아... 그런가?”
[후우... 생각이란 걸 좀 해라 카시우스.]
“하하, 그러도록 할게. 지금 이곳에서 말하는 건 괜찮지?”
[...어, 뭐...]
실피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떠나라고 했을 테지만 그녀는 예전부터 카시우스의 페이스에 쉽게 말리는 타입이었다.
기회를 잡은 카시우스가 말했다.
“실피리오, 네가 괜찮다고 했으니 이제 그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을게.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적이 늘지 않았어? 마족이라던지, 드래곤이라던지, 인간이라던지...”
그 말에 실피리오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세계에 처음 당도한 게 분명한 그가 예상보다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시우스. 너...]
“실피리오. 정말 마지막으로 대리자의 신분이 아닌 너의 친우이자 동반자였던 카시우스로서 물어볼게. 너... 정말로 괜찮아?”
[......]
실피리오는 그 물음에 이번에는 거짓으로 답하지 못했다.
습격(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