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76화 (56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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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쩌적-

    쩌저적-

    컴퓨터 그래픽이 깨지듯 하늘에 금이 가며 유리 조각처럼 부스러기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이에 수많은 정령들은 잠시 넋이 나간 얼굴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령왕이 알려주지 않아 진실을 전혀 모르는 그들이었지만 그들 또한 이 세계의 일부,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

    세계가 붕괴되고 있음을, 끝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이것은...

    절대 복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못 선택했던 걸까요. 이프리트...]

    아쿠리네가 후회하듯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

    이프리트는 이 의미심장한 말에 입가에 그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을 뿐 답하지 않았다.

    [이제와 간혹 생각해요. 우리가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고 이 대리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선택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이미 지나간 일이야 아쿠리네. 그만 말해라.]

    정령들이 모르고 있는 진실.

    그것은 이 세계의 진실 말고도 다른 또 하나가 있었다.

    [이프리트. 우리가 정령신의 의지를 받들지 않고 도전했었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고...]

    [아쿠리네!]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이프리트가 거친 호통을 터트렸다.

    이프리트는 뭔 일이 있든 웃어넘기는 스타일이었던지라 이런 호통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쿠리네는 그제야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닫았다.

    휘이익-

    고요해진 만큼이나 빠르게 전장에서 멀어져 간다.

    더 이상 적이 한 명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이프리트가 천천히 입 열어 말했다.

    [몸도 안 좋은데 괜히 소리쳐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일인걸요. 당신도 맘이 좋지 않을 텐데... 제가 배려가 부족했어요.]

    [......]

    아쿠리네의 사과에 이프리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닫았다.

    이내 그가 생각을 마쳤는지 천천히 말했다.

    [아쿠리네. 우리가 이 대리전쟁에 참여했다면 당신의 생각처럼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유적을 지키는 가디언이 아닌 침략해야 되는 대리자가 되었을 테니. 그리고 우리 종족의 능력 특성상 꽤나 강한 축에 속하는 대리자가 되었겠지. 대리자가 되면 육체의 제약도 사라지니.]

    [......]

    [하지만 우리의 존재 이유. 순수성은 완전히 잃어버렸을 거다.]

    정령신은 정령을 만든 이유가 외로워서였던 만큼, 그들이 순수하고 즐겁게 아울러 살아가는 걸 원했다.

    그래서 그렇게 창조한 것이고.

    하지만 대리자가 된다면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니까.

    먹지 않으면 먹히게 되니까.

    [그게 우리 정령의 삶에 있어 의미가 있을까? 난 없다고 생각한다 아쿠리네.]

    정령들은 사실 이 대리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단지 참여하지 않은 것일 뿐.

    이프리트는 이제는 먼 과거가 된 선택했던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제가 당신들 앞에 나타난 이유는 이 세계의 대표자인 당신들에게 선택권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그들 앞에 나타난 자는 현재 도우미라 불리는 자들 중 하나였다.

    [뭐? 선택?]

    “예. 당신들은 대리자, 혹은 유적지에 속하는 가디언, 이 두 가지 포지션 중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대리자? 그게 뭐지?]

    “간략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리자는...”

    도우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두 가지 포지션에 대해 정령왕들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이상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났을 때 네 명의 정령왕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네가... 아니 너희가 뭔데 우리 세상을 맘대로 한다는 거야? 웃기는 놈들이네?]

    [우리가 가만히 이걸 지켜만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실피리오가 바람을 일으킴과 동시에 보레아스가 도우미의 주위를 순식간에 흙으로 둘러쌌다.

    물론...

    “죄송하지만 지금 당신들의 공격은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흥!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

    딱-

    도우미가 무심히 손가락을 튕기자 그들이 만든 바람과 흙이 단번에 사라지며 실피리오와 보레아스의 육신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순식간에 구속됐다.

    아쿠리네와 이프리트는 이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 최강의 존재인 정령왕 두 명이 이렇게 간단히 무력화되다니?

    [네... 네놈! 대, 대체 정체가 뭐냐!]

    [빨리 이거 안 풀어? 어?]

    도우미는 잡힌 보레아스와 실피리오가 바둥거리든지 말든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선택 기한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4시간 후까지입니다. 그때까지 선택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아무런 포지션도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 완전 소멸됩니다.”

    [...도우미...라고 불러달라고 했죠?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도우미씨?]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이 세계뿐만이 아닌 모든 세계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

    “이 세계가 특별 세계로 인정되어 이런 선택권을 받은 것 자체가 굉장한 혜택이니 잘 생각하고 선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른 종족들은 단 한 종족을 제외하곤 이러한 선택권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도우미의 말에 정령왕들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종족들은 이러한 선택권조차 받지 못했다니...

    [우리가 대리자를 선택하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죠?]

    “선택하는 순간, 지금까지 저와 나눈 대화를 전부 잊게 됩니다. 그리고 대리자로서 튜토리얼에 참가하시게 됩니다.”

    [유적의 가디언을 선택하게 되면요?]

    “기억은 유지한 채 가디언의 신분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할 일을 마친 도우미는 그들 앞에서 사라졌고, 정령왕들은 선택했다.

    정령신의 의지를 받들어 유적이 될지언정 현재를 유지하기로.

    그들은 그렇게 신물 파편을 지키는 가디언이 되었다.

    아쿠리네가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

    [알고 있어요. 이프리트. 확실히 우리가 우리답게 사는 건 대리자가 되지 않는 것뿐이었죠. 하지만...]

    아쿠리네의 머릿속에 어떤 한 존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운이 닿아 대리자와 함께함으로써 하급부터 시작하여 상급까지 빠르게 올라간 정령.

    이제는 정령의 명칭이 아닌 개인적인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 자.

    디네.

    그녀는 성격이 일반적인 정령과 다른 만큼, 대리자가 못 된 것을 엄청 분해하고 있었다.

    대리자가 되었다면 코인을 먹고 더 강해져 세계를 지킬 수 있었을 거라면서.

    [그래서 그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왕이라는 이유로, 진실을 아는 존재라는 이유로, 정령들 모두를 위한 행동이었다 한들 동의 없이 그런 선택을 마음대로 한 게 정말 괜찮은 행동이었던 건지.]

    [......]

    아쿠리네의 말에 이프리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스스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남은 기둥은 2개.

    그들은 고요함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이동을 한동안 계속했다.

    * * *

    빛과 어둠의 지대 심층부.

    열심히 인원들을 움직이며 단서와 재료를 모으고 있던 제넥은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뭐냐, 저놈들... 어떻게...”

    그가 응시하고 있는 장소에는 대리자들이 있었다.

    지금껏 줄곧 견제해오던 드래곤이나 엘프, 블러드 소울 등등이 아닌 전혀 다른 종족.

    “마...왕?”

    마족들이.

    “이런 미친...”

    대체 어떻게 놈들이 심층부에 이렇게 빨리 다다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정보도 없을 터인데.

    “제길...”

    아무쪼록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마족의 등장은 어마무시한 변수.

    하루빨리 이 사실을 이강호와 이벨린에게 알리고 어떻게 대응할지 피드백을 받아야...

    거기까지 제넥이 생각한 순간이었다.

    휙-

    무려 200km나 떨어져 있는 장소.

    빛을 끝없이 흡수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 숨으면 존재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검은 바윗산 뒤에 엄폐하고 있던 제넥을 향해 마왕 루시뷀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

    이게 들키다니?

    ‘빌어먹을!’

    타다닷!

    제넥은 발각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기 무섭게 망설이지 않고 도주를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병력들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쪼개져 분리되어 있는 상황.

    마왕군 본대에 둘러싸이게 되는 순간 아무리 그라고 할지언정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으응? 뭐지...?’

    허나 마왕은 제넥의 염려처럼 그를 뒤쫓지 않았다.

    기본 스테이터스가 SSS랭크에 달하는 대리자에게 200km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고, 제넥은 인간 중에 무척 강한 강자에 속하는 존재였지만 그래 봤자 인간.

    그조차도 마왕의 흥미를 이끌어 낼 순 없었던 것이다.

    그가 현재 관심 있는 인간은 오직...

    ‘유세현...’

    마왕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림과 동시에 병력을 이동시켰다.

    데프하우어 아니, 세레나가 준 정보대로.

    그가 있는 정령이 세계로.

    제넥은 자리에 멈춰 다시 한번 더 마왕군의 동향을 살피다가,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닫기 무섭게 다급히 이강호에게 전령을 띄웠다.

    물론 안타깝게도...

    “안타깝지만 너희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그 전령들이 이강호에게 다다르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네, 네놈들은!”

    “그럼 죽어라. 인간.”

    인간들의 동향을 줄곧 주시하고 있던 키르쉬나와 그녀의 부대원들이 전령들의 앞을 막기 무섭게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 * *

    많은 병력들을 움직이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왜 움직이는가.

    어째서 그쪽으로 가야 하는가.

    만약 아무런 이유 없이 움직이다 일이 꼬여버리게 되면 신뢰를 잃어 어렵게 잡은 지휘권을 허무하게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마족의 갑작스런 등장과 이동은 세레나가 병력들을 움직이는 데 있어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왕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왜 급히 다른 세계로 이동했는가.

    “제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가 알아내겠습니다.”

    세레나가 차분히 말을 내뱉자 모든 로드들이 의구심 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했다.

    “자네가... 직접 말인가?”

    현재 세레나는 모든 드래곤들을 움직이고 있는 총 지휘관.

    그런 그녀가 직접 이 작전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어렵게 얻은 총지휘 권한을 잠시나마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는 셈이 되었다.

    현재 지니고 있는 권력에 해만 되는, 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일에 어째서 자발적으로 나선단 말인가!

    “제가 직접 가서 눈으로 변수를 확인하는 편이 앞으로의 계획을 진행하는 데 있어 지장을 가장 덜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레나의 말에 다수의 로드들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세레나의 말처럼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는 그녀가 직접 보고 판단을 내리는 편이 제일 좋긴 하리라.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부대는 어떻게 구성할 생각인가 세레나.”

    “이런 일을 대비하여 준비해놓은 부대가 있습니다.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 나머지 추가 인원들은 여러 곳에서 골고루 차출하여 구성할 생각입니다.”

    정석적이면서도 모두에게 납득을 주는 답.

    단순히 세레나의 하위 부대로만 구성했다면 의구심을 샀겠지만, 여러 곳에서 추가로 차출한다면 만일 세레나가 딴 맘을 품고 다른 일을 벌일지라도 곧바로 보고를 받을 수 있기에 로드들도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자네가 없는 동안 지휘권은 누가 맡지? 지금에 와서 각자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알겔라우스가 눈을 번뜩 빛내며 물었다.

    세레나는 이에 차분히 답했다.

    “예, 맞습니다. 로드님들께서 괜찮으시다면 임시로 총지휘권을 맡아주실 후임을 제가 정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미리 정해둔 이가 있나?”

    “예.”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보지. 괜찮은 인물이라면 우리도 납득하고 수용하도록 하겠네만... 아니면...”

    “물론 기준에 충분히 맞으실 겁니다.”

    “그래, 그럼 누군가.”

    “바로 알겔라우스님. 본인이십니다.”

    “으음? 뭐?”

    세레나의 말에 지금까지 줄곧 꼬치꼬치 캐묻던 알겔라우스의 눈썹이 쓰윽하고 올라갔다.

    디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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