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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573화 (55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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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한 것인가?

    휘익-

    이강호가 즉시 시선을 돌려 정령왕들을 살폈다.

    만약 단순 재해라면, 별일이 아닌 것이라면 정령왕들은 반응하지 않을 테니까.

    [......]

    정령왕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마냥 바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잔잔하게 떨리는 것이...

    [이런 빌어먹을...]

    화르륵-

    후웅!

    지그시 입 밖으로 욕설을 토해낸 이프리트의 전신이 일순간 발화하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큭.]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정령왕들 또한 차례차례 자취를 감췄다.

    순식간에 공간에 홀로 남게 된 이강호는 재빨리 바깥으로 뛰쳐나가 근처에 있던 물의 최상급 정령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정령왕들이 모습을 갑자기 감춘 거냐!”

    [...미안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말에 이강호의 입이 굳게 닫혔다.

    언뜻 보면 불성실한 대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강호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게 됐군.’

    물리적인 이유로 환경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대리자들은 내구성이 약한 지구 같은 행성은 단순한 주먹질 한 번으로 부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무지막지한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순 물리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누군가 이 세계의 환경을 담당하고 있는 코어를 건드렸다는 뜻.

    ‘정령왕들이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때, 아직 절박한 수준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적들이 클리어에 근접해나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

    ‘이거 어쩌면...’

    본래 이강호는 처음 정령왕에게 말을 내뱉었었던 대로 정말 이 세계를 지키고 보호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이강호 본인은 이 세계가 멸망하던 말 던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인간의 유일한 희망 유세현.

    그가 튜토리얼부터 여태까지 쭉 함께해온 디네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 세계를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

    이강호는 그렇게 판단했다.

    최고 핵심 정보를 주지 않는 정령들을 도와 마냥 방어를 지속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 지경까지 가게 되면 정보를 준다 한들 막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설사 막는다 하더라도 이쪽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렇게 되면 말짱 도루묵.

    “후우...”

    이강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평소 모든 이에게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이강호였지만 이번만큼은 유세현에게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는 걱정이 앞섰다.

    이강호가 본 유세현의 유일한 약점.

    그것은 힘도 정신력도 아닌 고작 정이었으니까.

    그는 마왕의 힘을 얻어 튜토리얼부터 강했기에 자신의 사람들을 챙길 수 있었고, 잃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제6 유적 [가이드]에서도 그랬듯이 죽을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말한다면...’

    디네를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지만.

    아무쪼록 유세현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큰 상처를 입을지 그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전투에도 지장을 주겠지.

    그러니...

    ‘반드시 막아라.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도록...’

    이강호는 정말 오랜만에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응원했다.

    * * *

    머나먼 과거.

    현재 정령들의 세계라 불리는 이 세계가 정령들의 땅이 되기 전.

    행성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 중 무한한 힘으로 풍수지화를 넘어 모든 자연환경을 다룰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위대한 존재가 있었다.

    그는 수명이란 제한에 의미가 없었었기에 수없이도 많은 세월을 살았고, 많은 생명들이 꺼져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최후의 최후에 다다라 행성에 오직 그만이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을 느낀 그는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 생명의 나무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생명을 낳았다.

    그렇게 최초로 탄생한 정령이자 현재 정령들의 왕.

    이프리트, 아쿠리네, 보레아스, 실피리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굉장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단일 속성의 육체를 지닌 그들에게 행성의 대기 환경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생명의 나무가 된 정령들의 신, 정령신은 다시 한번 힘을 사용하여 행성의 전체 환경을 바꾸고 중추에 세 개의 기둥을 만들어 환경을 지속 가능케 했다.

    그들이 살 수 있도록, 보다 힘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이후 정령신은 결국 무리하게 힘을 사용한 여파로 영원한 잠에 빠졌다.

    이에 이프리트, 아쿠리네, 보레아스, 실피리오 최초의 네 정령들은 정령신에 대한 존재를 불문에 부쳐 아무도 모르게 하고, 나무에서 태어난 정령들의 의식이 깨어나기 전에 다른 장소로 옮겨 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했다.

    행여나 그럴리는 없겠지만 추후 희박한 가능성으로 쳐들어온 대적자들이 이 세계의 중추, 생명의 나무에 다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정령들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재조성 된 이 세계에서 영원히 즐겁게 뛰어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정령들의 세계는 완성됐다.

    * * *

    “뚫어라! 저 기둥을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막아! 더 이상 못 가게 해야 돼! 조금만 버티면 아쿠리네님이 오실 거다!]

    쉬이익-

    콰과광-

    [꺄악!]

    세 개의 기둥 중 하나가 존재하는 핵심 중추 1번 지역.

    그곳에서는 밀리고 밀리는 팽팽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썩 꺼져라!]

    슈욱-

    콰과과과-

    에르크록시가 거칠게 물보라를 일으키자 샤크아크족 한 명이 콧웃음을 치며 달려들었다.

    상어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샤크아크족에게 물의 정령은 흙의 정령 다음으로 상대하기 편한 속성이었다.

    “흥! 어디서 물의 정령 따위가 우리에게... 여기가 니네 땅인 거 같지? 아니야~”

    마치 유영하듯 물의 기류를 타고 순식간에 에르크록시에게 접근한 샤크아크, 후루론이 삼지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보통의 정령은 이 한방을 견뎌내지 못했기에 이번에도 후루론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허나.

    쿠구구구구-

    팅-!

    회오리치는 물보라가 압축되어 검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후루론의 삼지창을 튕겨냈다.

    “아니?”

    이에 그의 얼굴에는 일시적으로 놀라움이 맺혔다.

    근접 전투로 이것을 방어하는 정령은 처음 본 탓이었다.

    여태까지 물의 정령들은 일단 붙으면 잼병이었었는데...

    “호오, 물의 정령 주제에 너는 좀 다르다 이거냐? 그럼 어디...”

    살짝 물러난 후루론이 풍차를 돌리듯 삼지창을 빙글빙글 돌렸다.

    쿠구구-

    궤적을 따라 거대한 물의 소용돌이가 생성된다.

    “이것도 한번 막아보시지!”

    후루론이 창을 힘껏 내지르자 소용돌이는 일대의 물을 집어삼키며 창과 함께 에르크록시를 덮쳤다.

    콰과과과-

    누가 봐도 위협적인 일격.

    허나 에르크록시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되레 더더욱 접근했다.

    “호오, 이걸 안 피하고 맞대응해? 그게 될 것 같나?”

    비아냥이 곧바로 날아왔지만 에르크록시는 상관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치지직-

    챙!

    물의 칼이 부러진다.

    후루론의 말처럼 그의 일격은 평범한 공격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어설프군.]

    에르크록시도 당연히 이렇게 될 것이라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노림수는 애초에 방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쿠구구-

    콰아앙!

    후루론의 창이 에르크록시를 찌름과 동시에 부서진 물의 검의 파편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비산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아악!”

    둘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멀리 날아갔다.

    후루론은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이마를 붙잡곤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네놈... 네노오오옴-! 감히 자폭 기술을 사용...”

    [누가 자폭 기술을 썼다는 거지?]

    “...아니?!”

    허나 후루론이 채 말을 다 끝낼 새도 없이 그의 앞에 다다른 에르크록시가 작게 읊조렸다.

    후루론은 정상적인 상태의 에르크록시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눈이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후루론이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분명 폭풍을 담은 내 창이 제대로 적중한 걸 봤는...”

    역소환이 안된 것이 어지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글쎄.]

    푸슉-

    결국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에르크록시의 검이 뚫려있는 갑주 틈으로 후루론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퍼벙-

    에르크록시가 검을 다시 한번 폭발시키자 후루론의 육신은 그대로 갈가리 찢겨 조각조각이 났다.

    놈에게서 코인이 터져 나오자 에르크록시는 가슴에서 동그란 장치를 하나 꺼냈다.

    슈슈슉-

    그가 장치를 높이 들어 올리자 곳곳으로 터져나간 코인은 빠르게 장치 속으로 회수되었다.

    그렇게 주위 모든 코인이 장치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에르크록시는 폭풍이 걸려있던 삼지창에 날아갔었던 허리춤에 손을 쓰윽 갖다 댔다.

    [......]

    물의 정령인 그의 이마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위험했었다.

    허리춤 근처에 그의 메인이 되는 핵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이 방심하여 재빨리 다른 위치로 옮기는 걸 못 알아챘기에 망정이었지 만약 알아채서 중간에 움직이는 핵을 따라 경로를 바꿨더라면...

    ‘죽을 뻔했군...’

    그렇다.

    현재의 에르크록시는 본체 상태였다.

    아니 자신을 제외하고도 이곳에 있는 모든 정령들이 본체 상태였다.

    이곳 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 되는 지점, 소환실을 거치지 않는 본체 상태는 이 세계의 축복 덕에 보다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생력이 높은 에르크록시 정도의 강자는 핵만 잃지 않는다면 사실상 거의 무적.

    [후우...]

    눈을 잠시 질끈 감은 에르크록시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본체 상태로 싸우는 것은 사실상 거의 처음이었기에 아무리 탑 3안에 드는 에르크록시라고 할지언정 보통 긴장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무한 재생을 할 수 있다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역소환이 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소멸, 정말로 죽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어디...’

    아무쪼록 에르크록시는 침투에 성공한 다른 적들이 있나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가 있던 곳은 핵심 지역의 거의 근처였는데, 이곳까지 파고든 적들의 실력은 그만큼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세 명의 적을 더 해치운 뒤 추가로 등장한 두 명의 샤크아크들을 동시에 쓰러트렸을 때였다.

    “호오, 샤로오나와 두리안이 동시에 덤볐는데도 이기지 못하다니... 너, 다른 애들과는 좀 다르구나?”

    어둠침침한 동굴의 저편.

    우락부락한 육체와 바다처럼 새파란 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남성체의 샤크아크가 에르크록시를 향해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촉박한 상황에 맞지 않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에르크록시는 놈의 기이한 행동에 바짝 긴장을 하고 전투를 치를 준비를 했다.

    에르크록시가 물의 검을 만들어 겨누자 놈이 말했다.

    “허허, 그렇게 바짝 긴장 안 해도 돼. 딱히 갑자기 기습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

    “그보다도 이름을 듣고 싶은데... 네가 혹시 그 정령왕이냐?”

    [......]

    “허허, 아까 보니 벙어리는 아닌 것 같던데... 혹시 답하기 싫은 건가?”

    [...네놈, 대체 뭐하는 놈이냐.]

    “응? 나?”

    에르크록시에 역질문에 놈이 볼을 긁적였다.

    그가 별 대수롭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흠, 나 말이지... 나... 일단은 얘들의 수장이야.”

    [...!!]

    “편하게 키쿨이라고 불러라.”

    수장.

    그 말에 에르크록시의 눈동자가 일시적으로 지진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도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는데 수장이라는 자가 등장하다니!

    에르크록시가 당황하여 있자 키쿨이 말했다.

    “질문은 그걸로 끝인가? 그럼 다 질문했으면 내 질문에도 답해주지 않겠어? 네가 정령왕인가?”

    [...아니다.]

    “...그래?”

    키쿨이 쯧 한숨을 내쉬며 아쉽다는 듯 목을 긁적였다.

    에르크록시는 그 모습에 이를 으득갈았다.

    얼마나 자신이... 아니 정령왕님이 만만하게 보였으면...

    [이놈이...]

    분노에 찬 에르크록시는 키쿨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다.

    정령의 세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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