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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님!]
“으응? 최상급 땅의 정령?”
[예, 맞습니다. 보레나라고 합니다.]
“아, 예. 그런데 갑자기 왜...”
[아, 안 그래도 힘써주시고 있는 와중에 정말 죄송한 말입니다만 김주희님께서 직접 맡아주셨으면 하는 적이 있어서...]
“제가요?”
[예. 저희로써는 상대 자체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상대 자체가요? 다른 놈들에 비해 많이 강한가 보군요.”
[예, 맞습니다.]
“어디에 있죠?”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김주희가 수락하는 모습을 보이자 보레나는 잔뜩 화색하며 샤룬이 있는 곳을 향해 앞장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샤룬, 놈의 손에 동족이 당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보레나는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레나가 지금까지 상대해본 최강의 적, 샤룬이 있던 장소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 어...?!]
어느 한 곳을 응시한 보레나가 당혹을 터트리며 대뜸 갑작스럽게 자리에 멈춰 섰다.
그 행동에 뒤따라온 김주희가 보레나가 보고 있는 적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저한테 맡기고 싶다던 적이 저기 있는 쟤인가요?”
[아... 아...]
보레나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들리지 않아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현재 보레나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커, 커헉... 대, 대체 네놈은 뭐기에... 어떻게 내가 이토록 쉽게...”
수많은 정령들을 학살한 샤룬, 그가 한 인간에게 목을 붙잡힌 채 힘겹게 바둥거리고 있었다.
반응이 없자 김주희가 말했다.
“흠, 맞나 보군요. 그럼 제가 나설 차례는 오지 않겠네요.”
[기, 김주희님... 저, 저분은 대체...]
그새 샤룬의 목을 잘라버린 유세현을 응시하며 보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김주희는 가볍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선배에요. 저의.”
그 후 공방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령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뭐? 막혀?”
[예.]
샤룬의 패배 소식을 들은 알베타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 흙의 최상급 정령 소환장치의 파괴 작전은 알베타스가 친히 기습과 교란을 펼쳐 빈틈을 만들어 만든 나름 공을 들인 작전이었었다.
샤크아크족은 흙의 정령들의 천적, 종족의 7인자 샤룬까지 보냈기에 억지로 실패하려 해도 실패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패배한 다른 요인이 있겠군.”
[예.]
“무엇이냐 그게.”
알베타스의 물음에 보고하던 베아렉클이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마치 별로 말하고 싶지 않는다는 듯.
“베아렉클.”
허나 알베타스가 그의 이름을 읊자, 베아렉클은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이 갑자기 나타나 끼어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예. 정령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었는지 우리 쪽만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알베타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예상외의 변수로 인해 계획이 무산되어 더욱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하건만.
“후후, 그래. 그 방해에도 벌써 여기까지 다다랐단 말이지.”
중얼거리는 알베타스는 입꼬리를 올린 채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베아렉클.”
[예.]
“그도 거기에 있었나?”
[...예.]
“후후후, 그렇단 말이지...”
알베타스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등장은 달갑지 않은 일인 것이 사실이었으나, 반대로 줄곧 가지고 싶었던 남자의 등장은 알베타스에게 그것조차 잊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흥분을 주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오랜만에 거칠게 요동친다.
지금의 그는 이전보다 얼마나 강해졌을지, 얼마나 더 늠름해졌을지.
“아아...”
떠올리니 당장에 만나러 날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장에 날아가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아니, 지금은 참아야 한다. 지금은...’
알베타스가 몸을 배배 꼬며 끓어오르는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금은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시기였다.
감정에 먹혀 거사를 그르치는 건 우매한 자들이나 하는 짓.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알베타스가 베아렉클을 향해 말했다.
“후후, 베아렉클.”
[예.]
“그래서 내가 말했던 것은? 끝냈느냐?”
[예, 완벽합니다. 모두 여왕님께서 명을 내리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후후. 그래?”
베아렉클의 말에 알베타스의 입가에 더더욱 짙은 미소가 맺혔다.
비록 야심차게 준비했던 최상급 흙의 정령 소환 장치의 파괴 작전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실 이 작전조차도 다음 계획을 위한 발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그녀가 노리는 것은...
“정령들의 동향은?”
[예상했던 것처럼 우리의 2차 공격을 대비해 소환 장치 근처로 병력들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럼 그곳을 지키고 있는 병력들은?”
[많이 빠지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이전보다는 경계가 줄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좀 더 놈들을 몰아붙여 다른 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뒤 하시겠습니까.]
“너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냐. 베아렉클.”
[제 생각에는 조금 더 몰아붙여 다른 쪽으로 병력을 빼낸 뒤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베아렉클의 말에 알베타스가 잠시 턱을 짚고는 고민에 빠졌다.
본래 그녀는 방금 베아렉클이 말한 것처럼 좀 더 몰아붙여 정령들을 다른 장소로 집결시킨 뒤 그곳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니, 그냥 지금 바로 한다.”
[바로...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간들이 정령 쪽에 붙었다고 했지? 시간을 주면 그들이 우리의 노림수를 파악할지도 모른다.”
알베타스는 또다시 변수를 두고 싶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게 여왕님의 뜻이시라면...]
베아렉클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저편을 향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 * *
인간 진형의 도움으로 큰 피해 없이 영역을 지키는 데 성공한 정령 진형.
이강호는 이를 명분으로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 4대 정령왕들과 회담을 가졌다.
이강호가 차분히 회담실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너인가. 인간들의 대표가.]
팔짱을 끼고 있던 흙의 정령왕, 보레아스가 제일 먼저 반응하여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땅의 정령들을 구해줬기 때문인지 딱히 적의는 없는 모습.
[흥! 대리자와 회담이라니...]
반면, 바람의 정령왕, 실피리오는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다.
그녀는 대리자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 내부에 꽤 대단한 열기를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얻은 거지?]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공사를 떠나 이강호가 지니고 있는 화염을 언뜻 알아보고는 흥미로워했다.
‘대충 성격들이 보이는군.’
주위를 쓱 훑은 이강호가 물의 정령왕, 아쿠리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아쿠리네는 인간 세력을 심층부로 초대한 장본인인 만큼 중재자 및 사회자 역할로서 회담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적이 어디까지 뻗어 들어왔는가.
어떻게 막아내고 있는가.
이강호는 그들이 하는 말들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차례가 오자 문제점을 지적했다.
“어째서 정령들을 혼합해서 배치시켜 놓지 않는 거지?”
[뭐라?]
“어째서 정령들을 혼합해서 배치시켜 놓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
외층부부터 시작하여 이강호가 쭉 봐왔던 바, 정령들은 자기 속성끼리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불과 흙, 불과 바람, 바람과 물 등등 혼합하면 훨씬 강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있었다.
보레아스가 말했다.
[우리는 대리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무척이나 자유롭게 살아왔다.]
“계급이 있음에도 말인가?”
[그렇다. 계급은 그저 진화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해 임의로 만든 것일 뿐 명령권자로서의 권한은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령왕이란 건...”
[그저 제일 많은 진화를 한 개체... 정도라고 보면 된다.]
“......”
그 말에 이강호의 입이 일순간 꾹 닫혔다.
정령왕은 태초부터 그렇게 태어난 생명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진화를 거쳐 성장한 존재였다니?
아무쪼록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기에 이강호는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그럼 부모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리는 건 안 되나? 긴급한 사태인 만큼 그 정도는 괜찮을 텐데?”
[부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한테 부모가 어디 있어.]
이에 답한 것은 보레아스가 아니라 실피리오였다.
이강호는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가 최하급 정령들을 탄생시키는 게 아닌가?”
[아닌데?]
[아니다만...]
“...물의 정령왕, 아쿠리네가 디네에게 딸이라고 부르는 것을 봤다. 그럼 그런 대체 뭐지?”
[그냥 단순히 애칭이겠지 뭐.]
“......”
[아, 그냥 좀 대충 넘어가. 어차피 별로 크게 의미 없는 거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린 정령을 낳지 않아. 알았냐?]
실피리오가 답답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이강호는 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확실히 실피리오의 말처럼 정령왕이 정령들을 낳는 게 아니라면 이 이야기는 더 말해봐야 시간낭비였다.
하지만 이쯤 되면 떠오르는 하나의 의문.
“근데, 너희들이 정령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정령들은 어떻게 탄생하는 거지?”
[......]
그 질문에 모든 정령왕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마치 들어선 안 될 질문을 들은 것 마냥.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답을 준 건 아쿠리네였다.
[정령은 그냥 자연히 태어납니다.]
“자연히?”
[예. 그저 자연스럽게. 정수가 집결돼서.]
“...흠... 그렇단 말이지...”
이강호가 쓱 정령왕들의 눈치를 훑었다.
정령왕들은 속성에 따라 색만 다를 뿐 전부 완벽한 인간형을 하고 있었는데, 눈빛을 보니 더 물어봤자 답을 줄 것 같은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되레 더 캐물으면 신용도만 낮아질 것 같은 느낌.
‘정령 탄생 비화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긴 한데...’
아무쪼록 현재 이강호의 목표는 제넥이 이끄는 진형이 빛과 어둠의 지대 심층부로 넘어와 클리어의 단서를 찾을 때까지 정령들과 힘을 합쳐 알베타스의 공격을 저지하는 것.
그는 이 의문을 가슴 한편에 묻은 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 말했다.
“정령들을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했으니 하는 말이다만, 정령들의 움직임을 보면 딱히 자유롭게 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던데.”
[그렇다. 지금 대부분의 정령들은 고맙게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방어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걱정마라. 우리도 바보는 아니다. 이미 조치를 취했다.]
[뭐, 재배치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긴 하겠지만 말이야.]
이프리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불꽃을 살짝 내뿜었다.
이강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괜한 말을 꺼낸 셈이 됐군.”
[뭐, 그런 셈이지.]
“좋아. 그럼 우리가 어딜 방어하는데 도움을 주면 되지? 참고로 우리 쪽은 죽으며 완전 끝이라 인원들을 너무 분산시키는 식의 도움은 줄 수 없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아쿠리네가 나머지 세 정령왕을 쳐다봤다.
나머지 세 정령왕은 아쿠리네와 눈을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쿠리네가 이어 말했다.
[계속해서 정령들이 잠들어있는 소환실의 방어를 도와주면 좋겠군요. 크게 30곳 정도 되는데...]
“30곳? 너무 많다만.”
[그중에서 10곳만 맡아주세요.]
“흠, 그러도록 하지.”
이강호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우리 인간 진형을 전혀 신뢰하지 못해 이상한 장소의 방어를 맡기면 거절해버릴 생각이었지만, 소환실은 정령들의 입장에서도 나름 중요한 장소였다.
‘뭐 가장 중요한 장소는 아니겠지만.’
그들이 생각이 있는 한 아마도 그건 절대로 인간 측에 방어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뭐, 우리도 이 정도의 신뢰가 딱 좋지.’
“그럼 우리가 맡을 위치를 알려줘라.”
[예. 그러죠.]
그 말을 끝으로 아쿠리네는 방어해야 될 지점을 이강호에게 알려주었다.
볼 일을 끝낸 이강호가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쿠궁!
쿠구궁!
갑작스레 옆에 있는 산호성의 창문 밖으로 수많은 번개가 쏟아지며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령의 세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