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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571화 (55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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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세계의 심층부, 북서쪽 절벽 위.

    높게 쌓아 올려져 있는 산호초의 방벽 뒤로는 최상급 땅의 정령, 보레크와 보레나를 포함하여 상급 중급 등등 다수의 하위 정령들이 차례차례 집결하고 있었다.

    [보레크님, 저희를 갑자기 왜 이곳으로...]

    [...미안하다. 너희에게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이 뒤는 다수의 보레크와 보레나의 본체가 잠들어있는 성지.

    이곳이 밀려버리게 되면 최상급 정령 다수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에 상급, 중급의 정령들이 대리자들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집결시킨 것이었다.

    보레크가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너희를 우리가 지켜줘야 되거늘...]

    [아닙니다, 보레크님. 지금까지 노력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적은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보태겠습니다.]

    [...고맙다.]

    경위를 이해한 하위 정령들의 위로에 보레크는 흙으로 된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재차 다졌다.

    그래, 아무리 적이 강하다 한들 동료들과 함께 죽을힘을 다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놈들을 막고, 이곳을 지켜낸다!’

    허나 보레크의 이런 각오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전원 공격, 놈들을 전부 말살하고 저 뒤에 있는 시설을 장악하라.”

    샤크아크족의 공격대 대장, 샤룬이 물갈퀴가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치켜세우며 정령들을 가리켰다.

    “공격해라!”

    “놈들을 도륙하고! 시설을 차지해라!”

    샤크아크족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헤엄치듯 상공을 유영하여 순식간에 정령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일방적인 살육.

    [아악!]

    [꺄아악!]

    이 세계의 환경이 정령들의 능력을 향상시켜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급, 중급, 상급의 정령들은 몇 번 공격도 하지 못한 채 샤크아크들의 손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보레크의 눈에는 어느새 다시 절망이 감돌았다.

    [이런 빌어먹을...]

    적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강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계약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끊기기 전, 여러 차원과 교류할 수 있을 당시.

    임의의 세계에 소환된 보레크는 그 세계의 최강자급에 준하는 힘을 지닌 존재였었다.

    그렇기에 계약이 끊긴 후, 처음 대리자라는 적들이 이 정령의 세계에 멋대로 들이닥쳤을 때 보레크는 쉽사리 침입자들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다른 세계의 최강자 급에 준하는 힘을 지닌 자신 같은 존재가 이 정령의 세계에는 수없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호오, 과연 최상급 정령이군. 이걸 버텨?”

    [크윽! 이놈!]

    쳐들어온 존재들은 하나같이 그가 알던 최강자급 보다도 훨씬 강하기 그지없었다.

    세계의 축복을 받고 있음에도 이렇게까지 힘에 부치다니?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이것도 버텨내 봐라.”

    쉬이익-

    샤룬이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젓자 그의 손아귀에 소용돌이치는 물의 구가 생성됐다.

    샤크아크족을 상위 종족 반열에 속하게 만들어준 종족 전용 스킬.

    [수구환(水球?)]

    콰과과과가-

    보레크가 재빨리 그가 지니고 있는 최상위 정령 방어 마법, 대지의 의지로 방어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크윽! 이게 무슨...!]

    바스슥-

    높은 외부 물리저항력을 지니고 있는 대지의 의지가 외부가 아닌 내부부터 바스러져 부서져간다.

    마치 모래성이 물에 젖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이.

    “왜, 놀랬나? 생각보다 더 버티지 못해서?”

    샤크아크족이 사용하는 수구환은 물리저항력을 일정 부분 무시하여, 내부부터 폭사시켜버리는 강력하기 짝이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내부보다도 외부가 단단한 흙의 정령에게는 거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셈인 것이다.

    “이만 꺼져라.”

    퍼억-

    [크헉!]

    결국 방어를 뚫은 샤룬의 손이 보레크의 흙으로 이루어진 가슴팍을 꿰뚫었다.

    보레크는 양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샤룬의 손을 붙잡고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아, 귀찮아.”

    파슥-

    샤룬이 그 상태 그대로 수구환을 만들어내자 보레크의 육신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바스스 부서져 내리며 역소환 되어 사라졌다.

    [보레크님!]

    [보레크!]

    수많은 보레나와 보레크가 이를 보고는 분개해 샤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후우... 너희는 이름이 왜들 그러냐? 왜 다 똑같은 거야?”

    무심한 한마디와 함께 샤룬은 그들을 차례차례대로 거침없이 부숴나갔다.

    샤크아크 종족의 7인자, 샤룬.

    그는 그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 대리자였다.

    흙의 정령들은 침음을 터트렸다.

    [큭! 보레아님! 우리들로만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됩니다!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아요!]

    [안다! 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자들은 지금 현재 아무도 없었다.

    알베타스의 공격이 너무 광범위하기 짝이 없어 각자 맡은 구역을 사수하기만으로도 급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크윽...]

    보레나가 스스로의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적어도 불의 정령들만 있었더라면 그 화염으로 육체를 강화해 더 잘 싸울 수 있었을 터인데.

    [크악! 보레나님... 죄송합...]

    아주 잠깐 처지를 한탄했을 뿐이건만, 그새 수십의 흙의 정령들이 역소환 되어 사라졌다.

    [이런...]

    희망이 1%도 없음을 느낀 보레나와 보레크의 눈동자엔 절망이 맺혔다.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이제와 자체 역소환을 해 도망쳐봤자 늦었다. 놈들은 우리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그래.]

    보레나와 보레크가 애써 눈을 부릅뜨며 투기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샤크아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흐아아압!]

    이 싸움의 끝에 있는 것이 소멸뿐이라면...

    ‘그렇다면 동족에게 해가 되는 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

    서걱-

    파드득-

    그렇게 생각하던 보레나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아...]

    강제 역소환 될 때의 감각.

    [이런... 이렇게...]

    당하다니.

    역시나 저들에겐 절대 이길 수 없단 말인가.

    희망은 정녕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보레나가 완전히 역소환 되려던 찰나였다.

    “아니?”

    “저놈들은 뭐야?”

    의식의 끈이 끊기기 직전, 청력이 거의 소실되어 잘 들리지 않는 보레나의 귓가로 샤크아크들의 당황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어? 저놈들이 갑자기 왜... 대체 뭐 때문에...’

    변수는 없을 터인데.

    보레나는 이에 어떻게든 시력을 되살려 눈앞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큭!’

    슈우욱-

    몸은 따라주지 않았고, 그녀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역소환 되었다.

    * * *

    보레나와 보레크의 본체가 잠들어있는 소환실.

    [허억!]

    거칠게 눈을 뜬 보레나는 역소환된 여파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천천히 본체를 움직였다.

    어차피 이곳은 샤크아크의 공격으로 곧 파괴될 예정, 이젠 더 이상 소환실을 이용할 수 없을 터이기에 본체로 응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로 나가자.

    [후우... 너도 당했나 보군 보레나.]

    그곳에는 진즉 당한 수많은 동료들이 즐비해 있었다.

    모습을 보건대...

    [정말 나가 응전할 생각인가? 보레나?]

    억겁의 세월을 살았다곤 하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생명체.

    막상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가서 싸우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야지.]

    이에 보레나는 간략히 답하고는 그들을 뒤로한 채 출구로 향했다.

    보레나는 그들이 마음을 바꿨다고 한들 딱히 매도할 생각은 없었다.

    죽음의 공포란 당초 그런 것이니까.

    그 어떤 드센 의지조차도 꺾어버리는...

    [자, 잠깐! 보레나! 기다려라! 아직 늦지 않았다! 애들이 시간을 끌어줄 동안 퇴각하면 어쩌면 우리는 무사히...]

    [그럼, 버티다가 뒤늦게 역소환 될 그 애들은?]

    [......]

    보레나의 한마디에 많은 정령들이 입을 다물었다.

    출구에 선 보레나는 크게 호흡을 골랐다.

    두근- 두근-

    마나의 근원이 거세게 요동친다.

    한차례 각오를 했음에도 죄여 오는 죽음의 공포는 그만큼 쉽게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

    [후우...]

    그래도 보레나는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그녀가 외부로부터 완전 격리되어있던 소환실을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무슨...]

    보레나의 입이 대번에 떡 벌어졌다.

    “크윽! 저놈들은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강하다! 저 흙덩어리 놈들과는 달라! 조심해라!”

    바깥은 새롭게 등장한 존재들과 그에 맞서는 샤크아크들의 전투로 인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보레나가 멍하게 있자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보레크가 날아와 상황을 일러줬다.

    [저들은 지원군이다! 보레나!]

    [지원군?]

    [그래, 에르크록시... 아니 디네라는 상급 물의 정령이 우리를 위해 데리고 왔다!]

    [...상급?]

    보레나의 고개가 순간 갸웃 옆으로 꺾였다.

    상급 물의 정령은, 흙의 정령과 동급, 천적이고 자시고를 떠나 저런 강자들과 마주할 수조차도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급 물의 정령이 샤크아크를 상대할 수 있는 지원군을, 그것도 대량으로 데리고 올 수 있단 말인가?

    [아무쪼록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저들은 우리의 아군이다! 그러니 도와라 보레나!]

    [...아, 알았다!]

    보레나가 정령마법을 사용해 하늘로 날아올라 주위를 살폈다.

    행여나 밀리고 있는 인간들을 찾아 돕기 위함이었지만...

    [뭐야?]

    인간들은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하기 그지없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보레나.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주위를 학살하고 있는 이강호의 불길이 비쳤다.

    [멸격대염천(滅激大炎天)]

    콰과과광-

    “크아아악!”

    물과 불이 붙으면 보통 물이 승리하기 마련이건만... 이강호의 불꽃은 샤크아크의 물을 뚫고 들어가 몸을 불태웠다.

    저자의 저 불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정령왕 이프리트가 생각난 보레나였지만 정령왕은 정령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다른 쪽을 응시했다.

    이번에 바라본 곳에서는 다수의 샤크아크족을 홀로 상대하고 있는 김주희가 있었다.

    트드득-

    챙-!

    “큭! 제기랄! 저 빌어먹을 냉기...”

    “젠장! 어떻게 저런 년이 저런 강력한 냉기를 지니고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녀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전신을 물로 두르고 있는 샤크아크들은 몸을 물리며 힘을 쉽사리 발휘하지 못했다.

    김주희가 싱겁다는 듯 말했다.

    “선배님! 이놈들 생각보다 약한데요?”

    “뭐, 뭐...? 이 계집이!! 어딜 감히 뚫린 입이라고 그딴 망발을...!”

    “아, 정말 약해서 말 한 건데 뭐 어쩌라고.”

    빡-

    “크악!”

    김주희의 창대에 복부를 제대로 가격 당한 한 샤크아크족, 프리크가 부상당한 곳을 붙잡고는 눈을 부라렸다.

    허나.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촤좌작-

    숨을 채 한번 쉴 틈조차도 주지 않고 이어지는 김주희의 연속타.

    “크아아악!”

    김주희의 창술은 매섭고 날카로우면서도 강력하기 그지없어 반격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크윽! 어, 어째서...”

    당하는 프리크의 눈이 격렬하게 깜빡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자신은 단순한 일반 병사가 아닌, 이 공격대에서 10위 안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아무리 놈이 카운터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크악!”

    결국 가드가 고통으로 인해 뚫리자 기회를 포착한 김주희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사실 너 강해. 근데 멘탈이 좀 많이 약하네. 고작 이런 말에 그렇게 흔들리다니 말이야.”

    “뭐, 뭐라...?”

    “그럼 잘 가라.”

    “아, 안...”

    서걱-

    말을 끝낼 새도 없이 냉기를 머금은 김주희의 날카로운 창이 프리크의 목을 그대로 베어 넘겼다.

    그 모습을 본 보레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프리크는 보레나와 보레크 다수가 합공해도 끄떡도 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 자가 저렇게 쉽게 당하다니?

    보레나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주희가 옆에서 거들던 디네에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마디 했다.

    “야 디네야, 너 저런 애들한테 맞고 있었던 거냐? 으이그 허접해서는~”

    [아, 뭐래. 그냥 니 능력이 쟤들의 상극인거 뿐이거든? 그리고 내가 방금 전에 니 등 뒤 방어해준 거 기억 안 나냐? 누가 보면 혼자 한 줄 알겠어?]

    “호호, 그런 일이 있었던가?”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내가 더 성장만 해봐라...]

    잠시 투닥거린 김주희와 디네가 빠르게 다른 샤크아크들을 찾아 달려들었다.

    보레나는 쿵쾅거리는 마력을 애써 추스르고는 그런 김주희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저들이라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이 들던 그놈 또한 맡아 줄 수 있을 것이라 보레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소환실 공방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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