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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517화 (5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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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

    온몸의 신경이 뒤틀려 고통이 찌릿찌릿 밀려오는 감각 속에서 힘겹게 눈을 뜬 강희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난...”

    “오, 정신이 드셨나요?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그녀의 회복을 전담하고 있던 남성, 쟝 피에르가 물었으나, 강희수는 이에 좀처럼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현재 그녀의 정신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분노 때문에 잠시 잦아들었던 슬픔이 밀려온다.

    “희수씨는 정말 운이 좋으셨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상태셨거든요. 조금만 더 큰 피해를 입었었더라면 회복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 말처럼 친구는 죽고 자신만이 살아남았다.

    “...승혜야...”

    마치 작은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 마냥 눈이 아파왔다.

    물리적 아픔이 아닌, 정신적인 아픔이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막아 봐도 눈물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아...”

    쟝은 그제야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군요... 심란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저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지시기 바랍니다.”

    “...흑...흑흑...흑으으으...”

    그녀는 쟝이 사라지고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 * *

    “...으...”

    “괜찮냐? 유세현?”

    고통에 몸을 뒤척이는 유세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으음?”

    이에 눈을 뜬 유세현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중한 친우를 확인하기 무섭게 반가운 어조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강호...”

    “어, 나다. 늦어서 미안해.”

    “...으으...”

    유세현이 일어나려 몸을 뒤척였다.

    이강호는 이를 재빨리 제지했다.

    “어어, 그만.”

    유세현은 분명 엄청난 속도로 몸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심각한 상태였다.

    “더 누워있어. 안전하니까.”

    “...그러냐?”

    “어.”

    “...주희나 루시펠씨...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오~ 주희도 깨어나자마자 그 말부터 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역시 뭔가 통하는 게 있나보네~”

    “...야, 임마...”

    “미안하지만 세현아. 많이 죽었어.”

    “......”

    “널 포함해 생존자는 6명밖에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이강호의 얼굴은 꽤나 어둡기 그지없었다.

    “...여섯?”

    “응. 사실 그마저도 기적이긴 하지만.”

    무려 블랙드래곤 본대에게 둘러 쌓여진 상태였다.

    보통의 종족이이었다면 드라프나우어가 등장한 시점에서 증원부대는커녕 이강호가 도착할 때까지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했을 터였다.

    “더 나아가 루시펠씨와 사람들은 곧바로 도주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며 널 기다렸어.”

    “...뭐? 날? 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죽...”

    유세현의 안색도 그를 따라 마찬가지로 어두워졌다.

    유세현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이강호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너무 죄책감은 갖지 마, 내가 보기엔 그렇게 했기에 여섯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100명 남짓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그 견고한 포위를 뚫고 빠져나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가능이었다.

    이강호는 사람들이 진형을 유지한 채 도주하지 않고 싸웠기에 드래곤들이 적잖이 당황했고,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세현아,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응?”

    “사실 이 기적은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잘했더라도 네가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기적이야.”

    유세현은 그 말에서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너가 엄청나게 많은 인원들을 쓰러뜨렸다고 김주희나 사람들에게 들었어. 너... 어떻게 된 거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거야?”

    “......”

    유세현이 잠시 입을 닫고 침묵했다.

    정말 한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유세현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이강호에게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유세현이 내민 손바닥 위에서는 그가 방금 내뿜은 어둠이 마치 유영하듯 자유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이강호의 동공은 대번에 크게 확장되었다.

    “유세현. 너...”

    “응, 정상으로 돌아왔어.”

    “후... 역시 그렇군. 정말 다행이야.”

    이강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이번일로 인해 꽤나 손실을 봤다곤 하지만 유세현의 힘이 원래대로 되돌아온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플란의 핵도 손에 들어왔다. 이젠 향할 수 있어 그곳으로.’

    “그뿐만 아니라.”

    그때 유세현이 계속해서 이어 말했다.

    “응? 또 뭐가 있어?”

    이강호가 의문을 갖는 순간 유세현이 고백하듯 작게 속삭였다.

    이강호의 입은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특수특성이 변화했다고?’

    특수특성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거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하다니?

    ‘그녀... 덕분인가?’

    이강호가 유세현이 넘겨준 아이템을 응시했다.

    기억의 피리.

    김다혜가 찾은, 회귀한 이강호조차도 모르는 신원미상의 아이템.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세현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강호는 솔직하게 물어봤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의도로 물었을 테지만 유세현은 그의 소중한 친구였다.

    이강호는 무거워 보이는 유세현의 짐을 조금이라도 함께 덜어주고 싶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세현아. 적에 대한 정보는 다른 이들에게 너의 프라이버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간략히 들으면 되니까.”

    “...아니야. 말해줄게. 너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세현이 이윽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내용은 길지 않았다. 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 특수특성은 변화했어.”

    말을 마친 유세현이 비로소 입을 닫았다.

    이강호는 그런 유세현을 잠시 묵묵히 응시하다 한마디를 건넸다.

    “고생 많았다. 유세현.”

    유세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강호...”

    “다혜씨도 네가 살아남아서 기쁠 거야.”

    “......”

    유세현은 그저 침묵했다. 목숨을 빚진 자로서 그는 더 이상 이에 대해 꺼낼 말이 없었다.

    “쉬어라. 세현아.”

    이강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래곤도 물러난 현재 숨도 돌릴 겸 유세현과 다른 주제로 대화의 꽃을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급히 처리해야 될 다른 일이 있었다.

    ‘음성저장기에 파일이 저장돼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건 분명 내가 저장한 게 틀림없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모습을 숨긴 이강호가 사일러스 마법을 주위에 구사하기 무섭게 음성저장기를 틀었다.

    [여길 뚫으면 이제 아이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응? 아이템? 무슨 아이템을 말하는 거지?’

    이강호는 그 나름대로 추리하며 흘러나오는 말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놈들이 그 아이템을 사용할 생각이 없어서.]

    ‘사용할 생각이 없다고?’

    두 번째 문장을 들은 이강호의 고개가 갸웃 꺾였다.

    아직은 아리송하기 그지없었다.

    판도라에선 특수한 저주류 아이템이 아닌 바에야 지니고 있거나 사용하는 쪽이 무조건 적으로 좋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뭔가 패널티가 있는 건가?’

    [이강호, 만약 아이템에 도달하게 되면 부탁해. 반드시 #*[email protected]를 살려서 끝을#&%*@...]

    이강호는 세 번째 문장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거론된 아이템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EX 아이템.

    신의 회중시계.

    ‘그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아귀도 들어맞고.

    ‘하기야 우세한 쪽에서는 회중시계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지.’

    어차피 우승에 가까운데 누가 괜히 회귀를 해서 그 귀찮은 걸 반복하려 할까!

    허나.

    ‘내가 무엇인가를 살려야 된다고?’

    그 문장은 이강호에게 모종의 불안감을 선사했다.

    살려야 한다니?

    자신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제길... 모르겠군.’

    이윽고 마지막 문장이 울렸다.

    [우린 더 이상... #[email protected]!%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그에겐 아리송한 문장이었다.

    ‘제길, 중요한 부분은 전부 노이즈 처리가 되어있다니... 쯧.’

    이강호는 답답한 마음에 혀를 차다 이내 생각을 달리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다. 어쩌면 이게 나아진 것일지도 몰라. 기억은 안 나지만 어쩌면 첫 번째 들었던 문장도 예전에는 노이즈 처리가 되어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자리에 앉아 분석을 시작했다.

    자신의 회귀를 아는 김주희나 유세현이 함께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둘은 아쉽게도 부상 중이었다.

    ‘하나 하나 세세하게 판다.’

    그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첫 번째 문장이나 두 번째 문장조차도 무려 두 시간 넘게 분석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역시 이 두 문장은 더 이상 분석할 가치가 없다.’

    아이템의 정체는 파헤쳐졌으니까.

    중요한 건 역시나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장.

    이강호는 우선 녹음기에 저장되어있는 대화의 시기를 추측했다.

    ‘내용만 보면 마지막 결전 직전... 아니 직전이 분명하다.’

    비록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타인에게 [부탁]이란 말을 잘 쓰지 않았으니까.

    죽기 직전 혹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상을 입었을 때, 그럴 때 하는 말이 부탁이었다.

    ‘아무튼 시기를 알아낸 건 행운이다.’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다 보면 단서를 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강호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웠던 최후의 결전을 떠올렸다.

    당시 자신은 수많은 적을 헤치우...

    “어?”

    기억을 되짚어가던 이강호의 입에서 당황 섞인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안 난다.’

    전혀.

    ‘뭐지? 왜?’

    화등잔만하게 커진 이강호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신의 회중시계는 기억이 나는데, 그것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기억나지 않다니?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이강호는 기억을 되짚었다.

    언제부터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이런...’

    회귀한 후 결전을 떠올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과정은 말 그대로 과정.

    그리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굳이 되새길 필요가 있는가?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허나 그렇기에.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이상해...’

    이강호는 더욱 큰 괴리감을 느꼈다.

    그는 현재 신의 회랑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과 회중시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의 중요도를 따지자면 당연히 회랑으로 향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회랑으로 향하는 방법은 기억이 누락되지 않은데 반면에 결전의 기억은 누락이 되다니?

    회랑으로 향하는 방도보다도 결전의 기억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인가?

    ‘크... 대체 이게 무슨...’

    이강호는 기억 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끝까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장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돈다.

    [반드시 #*[email protected]를 살려서 끝을#&%*@...]

    [우린 더 이상... #[email protected]!% 없으니까...]

    대체 뭘 살리라는 것인가. 대체 뭐가 없다는 것인가.

    ‘회랑... 빨리 회랑으로 가야 해.’

    답은 그곳에 있을 테니까.

    “큭...”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 이강호는 터벅터벅 이벨린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나갔다.

    신의 회랑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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