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508화 (494/612)

-------------- 502/606 --------------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빠르게 반복해 깜빡여지는 유세현의 두 눈.

이런 시기에 그녀가 복귀 하다니? 천운인가?

김다혜가 참전을 한다면...

순간 그런 생각을 가진 유세현이었지만 그는 곧 그녀의 상태가 자신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산조각 부서진 갑주와 넝마쪽이 된 이너아머.

그리고 너덜너덜해져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망가진 피부.

“세현아. 괜찮...아?”

그러나 다가온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유세현에 대한 안부였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괜찮냐고 묻는 것인가.

내부에서 순간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유세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김다혜씨.”

“......”

그 답에 김다혜가 묵묵히 유세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김다혜는 이내 다행이라는 듯 작은 미소를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

“...김다혜씨. 던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

“아, 세현아. 그전에 이것부터 좀 맡아줘.”

김다혜가 대뜸 뜬금없이 내민 것은 자신의 포켓이었다.

“왜 이걸...”

이에 영문을 알 수 없어 유세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김다혜가 이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냥.”

이상한 이유였고, 이상한 행동이었다.

김다혜는 이렇게 기분에 따라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할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평소와... 다르다.

‘설마, 가짜?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눈앞에 있는 김다혜가 가짜라면 이런 짓을 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죽였을 터였다.

“빨리 받아. 그래야 계속 앞으로 향하지.”

“......”

계속되는 김다혜의 권유에 결국 유세현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둘은 이내 숲을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김다혜씨? 던전에서 언제 빠져나온...”

“얼마 안 됐어. 아리우스는 죽었고. 그것보다도 현재 상황을 알려줘 세현아.”

“보이는 대로입니다.”

유세현이 힘겹게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비석 근처에서는 거센 파공성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곳에서 승혜씨와 희수씨, 그리고 후욱... 주희가 드래곤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수적 상황은?”

“이쪽이... 후욱... 셋. 저쪽이 후욱... 여섯.”

유세현이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며 말했다.

별로 빠르게 걷지도 않았는데...

이에 잠시 유세현의 얼굴을 진득하게 응시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내놓았다.

“위급한 상황이구나. 내가 도와주러 가야겠네.”

신기하게도 왠지 모르게 무척 평온한 목소리였다.

“......”

유세현은 동조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었다.

기습이 실패한 만큼 지금 셋은 확실히 위험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원은 아마 그녀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단비와도 같을 것이다.

허나.

‘지금 김다혜가 간다고 한들...’

도움은 전혀 못될 게 분명했다.

그녀의 상태를 보건대 잘해봐야 뛰는 게 고작일 게 뻔한 탓이었다.

그렇기에 가라고 하는 것은 대놓고 말하지만 않을 뿐 그녀에게 사지로 뛰어들라는 것과 마찬가지.

‘내가 괜찮았더라면...’

유세현이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짚는 순간이었다.

치지지지직!

쿠구구구구!

“...이건?”

붕괴가 더욱 빠르게 가속되기 시작했다.

* * *

지금까지 유세현은 비석 근처에 있었기에 붕괴되는 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가속이 시작된 이제는 달랐다.

붕괴되는 속도가 순식간에 5배를 뛰어넘었다.

쿠구구구!

마치 이 정원의 종말을 알리듯.

고오오오오-

파수꾼의 거대한 그림자가 일대 전체에 드리운다.

꽃봉오리를 확인한 퀘루안이 즐겁다는 듯 외쳤다.

“하하하하! 꽃이 한 개 더 늘었군! 붕괴에 유세현이 떨어져 죽었나 본데?”

“...!!”

그 말에 셋의 시선이 일순간 꽃봉오리로 향했다.

정말로 꽃이 하나 더 개화되어 총 9개가 되어 있었다.

김주희의 눈동자가 마치 지금 붕괴되고 있는 대지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선배님이... 선배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리가...’

하지만 실제로 꽃은 개화되었다.

마땅히 죽은 자도 없는데.

“퀘...루아아아안-!”

“크크크, 그래, 그렇게 더 열심히 덤벼라 얼음여자! 그래야만!”

김주희가 허공에 생성된 얼음을 밟고 쇄도해오자 퀘루안이 눈을 번뜩 빛냈다.

흥분은 죽음으로 가는 최고의 지름길.

그는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확실히 김주희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하아아압!”

김주희가 창을 사선으로 휘둘러 목을 노렸다.

퀘루안은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는 척 연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라플라스.

“후후, 날 잊으면 안 되지.”

그의 팔 주위에는 어느새 세 개의 화염구가 생성되어 있었다.

‘이런! 너무 흥분했...’

퍼버벙!

“꺄악!”

화염구가 폭발하며 김주희의 가슴 주위를 그야말로 난자했다.

얼마나 위력이 대단한지 김주희가 빙백신공, 화염과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대리자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사망했을 수도 있는 화력이었다.

“으으윽.”

엄청난 타격에 비틀거리는 김주희의 육신.

퀘루안은 재밌다는 듯 크게 박수를 쳤다.

“하하하하하! 대단하구나! 얼음여자! 그걸 버텨내다니!”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속으론 내심 혀를 차고 있었다.

‘이걸 버텨내? 일개 인간 따위가? 유세현도 그렇고 대체 저년... 뭐기에...’

이 정도의 인물은 드래곤 중에서도 찾기 힘들다.

‘화이트 드래곤과 동급의 빙결능력을 지니고 있는 건가... 아니, 스킬만큼은 어쩌면 그 이상? 아무튼 터무니없군.’

지금 제거하지 못한다면 후에 엄청난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인물.

퀘루안은 잠시 주위를 쓱 훑어봤다.

“드레보스! 이 개자식! 죽어! 죽으라고!!”

“정말 미안하지만 너는 여기까지다. 강희수.”

“큭! 젠장!”

“유승혜. 포기해라. 포기한다면 그간의 정을 생각해 단칼에 보내주겠다.”

“단칼은 얼어 죽을 단칼! 무슨 그게 개소리야! 너희가 포기해!”

강희수와 유승혜가 최선을 다해 분개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만간 자신의 수하들에게 당하리라.

‘그럼 나도 슬슬 진짜로 끝내볼까?’

나머지 둘이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파악한 퀘루안은 재차 마무리를 하기 위해 라플라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번 공격으로 끝낸다.]

[알겠다.]

양쪽에서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하는 퀘루안과 라플라스.

김주희가 아무리 창술의 귀재라 하나 그들의 협공은 현 상황에서 완벽히 방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력도 떨어졌고, 체력도 다했다.

파바바박-

“아아악!”

가드가 점점 풀린다. 방어가 불가능하다.

땅이 주위까지 거의 다 붕괴되고 모든 걸 태우는 전류가 빠르게 좁혀들고 있어서 도주도 불가능한 상황.

‘후후후, 끝이다.’

라플라스의 공격을 방어할 동안 김주희의 뒤로 돌아간 퀘루안은 곧장 폴리모프를 부분 해제했다.

울룩부룩-

얼굴이 거칠게 꿈틀대기 시작한다.

트드득-

순식간에 드래곤의 얼굴로 변화한 퀘루안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 이것만 내뱉으면...

‘죽어라.’

후우우우웅!

그가 날숨을 내쉬는 순간, 세상이 정지했다.

* * *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유세현과 김다혜를 향해 다가오는 붕괴.

뇌전이 모든 것을 태우며 다가오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걸어나가던 김다혜는 갑작스레 발을 멈춤과 동시에 혼잣말하듯 읊조리기 시작했다.

“세현아. 나 그때 일 아직도 후회하고 있어.”

“허억... 허억... 지금 상황에 무슨...”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거.”

“김다혜씨... 말할 힘이 있다면 먼저 뛰어가셔서 셋을 도우시기 바랍...”

“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던 걸까?”

평소 그가 하는 말이라면 그토록 어려워하며 새겨듣던 그녀였지만, 지금 김다혜는 유세현이 거칠게 질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의 말을 무시했다.

“난 무서웠어. 혹시나 정말 만에 하나 내가 병들었다고 하면 너가 날 버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네가 그럴 리가 없는데.”

“김다혜씨... 거듭 말씀드리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붕괴가 더욱 가속 되고 있...”

“세현아. 나 주희씨가 너무 부럽다? 강하고 아름답고. 너에게 무척 중요한 사람이라는 게 떡하니 보여서.”

“......”

“세현아. 내가 여태까지 버틸 수 있던 원동력이 뭔 줄 알아?”

그렇게 묻는 김다혜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네가 나를 용서해줘서 다시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야. 비록 연인으로 돌아가지는 못할지언정.”

“......”

“하지만 이젠 포기할래. 난 네가 제일 힘들 때 그만한 짓을 한 여자니까.”

김다혜가 그의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곁으로 다가갔다.

유세현은 이에 시선을 돌렸다.

마음도 진즉 사라진 마당에 그냥 재차 질타하면 될 터인데.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유세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다가온 김다혜가 대뜸 유세현의 갑주를 붙잡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넌 살아줘.”

“?!”

“살아서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세계의 끝을 봐줘.”

고개를 갸웃할 새도 없이 허공에 붕 뜬 유세현의 신체가 비석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얼마의 마력을 들이 부어 던진 것인지 장난이 아닌 속도였다.

이 정도의 마력은 현재의 김다혜로서는 사용할 수가 없을 터인데.

‘대체 왜? 어쩌려고?’

빙글빙글 도는 몸에 따라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하지만 그렇게 빙글빙글 도는 세상 속에서도 유세현의 시야엔 점점 멀어져가는 김다혜의 모습만큼은 또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뛰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이쪽이 아닌...

‘...설마!!’

전류로 몸을 던지기 전 김다혜가 유세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스스슥-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지막 꽃이 개화하자 눈앞에 나타난 하나의 알림창과 함께 태초의 정원 전체가 잿빛으로 물들며 모든 것이 정지했다.

붕괴도, 전류도, 파수꾼도.

그리고 대리자도.

“큭! 이, 이게 뭐냐!”

퀘루안을 포함한 모두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온몸을 감싼 것 마냥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발사한 브레스는 입가 주위도 떠나지 못한 채 마찬가지로 멈춰있는 상황.

“빌어먹을!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왜! 아니 왜 그보다도 갑자기 조건이?”

대리자들은 저마다 모두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발산했다.

지금까지 전투로 죽은 인물은 제로, 유세현이 붕괴에 휘말려 죽었다 쳐도 1개가 부족해야 정상인 탓이었다.

“크으으! 대체 왜! 왜!!”

퀘루안의 거친 포효 속에서 비석의 정 가운데에 거대한 꽃이 맺히기 시작했다.

맺힌 꽃은 곧 씨를 날렸고, 씨는 모든 대리자들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대리자들은 곧장 정보를 읽었다.

아이템명: 플란의 핵

등급: 에픽 [??? Rank]

상세정보: 플란이라 불리 우는 꽃의 핵입니다. 특수한 힘에 의해 자세한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플란의 핵?”

아이템을 살핀 퀘루안이 유일하게 움직여지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플란의 핵은 별로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놈들을 전부 다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걸 놓쳐버리다니!

스스스-

이어서 대리자들의 앞에 뒤틀린 공간이 하나씩 나타났다.

[EXIT]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였다.

진마眞魔(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