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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진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대지로 피신한 퀘루안.
그는 거목의 꼭대기에서 확대 마법을 이용해 유세현이 있는 장소를 확인키 무섭게 당했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쓴 웃음을 토해냈다.
“하, 저 여자의 연기에 제대로 속았군.”
“...그러게 말이야.”
“네가 놈을 처리하는데 성공했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다. 라플라스.”
“어이어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걸 어떻게 처리해? 이 건틀렛 안보이나? 조금만 회피가 늦었다면 난 분명 죽었을 거다.”
“흥! 죽었긴. 그 건틀렛이 구닥다리라 그렇게 된 거겠지.”
“구닥다리라니!! 이게 어떤...”
퀘루안의 막무가내 같은 소리에 라플라스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퀘루안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의 이야기일 뿐 실제론 아니었다.
퀘루안은 라플라스가 착용하고 있는 건틀렛이 어떤 물건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먼 과거, 생명체들이 판도라에 떨어지기 전 대천사에게서 받은 오리하르콘 광물을 베이스로 수많은 마법을 곁들여 제작되어진 무려 에픽 등급 S+랭크 아이템.
천족의 힘이 섞인 무기는 당연하게도 마족에게는 극상성!
때문에 아무리 건틀릿이 이 공간의 영향에 의해 격하되었다고는 한들 어설픈 부패의 마력에 잡아먹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틀릿이 부패했다. 꽤나 심각하게.’
복원 능력이 있기에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세현의 어둠의 마력은 확실히 위험하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나가던 퀘루안이 순간 눈동자를 번뜩 빛냈다.
‘여기까지다.’
그가 보기에 유세현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도 몇 단계는 넘은 상태였다.
더 이상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놈은 끝났다. 이제는 싸울 수 없어. 여기에서도 바깥에서도.’
결론을 낸 퀘루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에 순간 당황한 라플라스가 급히 그를 누르려 했지만 퀘루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이! 퀘루안! 앉아라! 그렇게 있다간 놈들도 우리를 보게 될 거다!”
“들켜도 돼. 어차피 놈들은 지금 당장 우리를 공격하지 못 하니까.”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그러면 나중에...”
“그보다도 이동한다.”
“이동? 여기서 기다렸다가 체력이 회복되는 대로 공격하는 게 아니고?”
라플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의 원래 계획은 추가된 지원군이 적을 시 체력이 회복되는 대로 기습을 가해 끝장을 내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든 2명만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기에 모두들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왜 방법을 변경하는 거지 퀘루안? 이유가 있나?”
“크크크, 물론이지. 우리가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는 데엔 꽤 시간이 걸린다. 추후 기습을 한다 한들 놈들이 트랩을 설치하고 대비하고 있으면 스탯이 스탯인 이상 우리도 그냥은 못 넘어가.”
“...그거야 그렇겠지만. 이것 말고는 우리도 다른 방도가 없지 않나. 이곳이 붕괴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죽여야 되는 입장인데.”
“크크크, 라플라스...”
퀘루안이 큭큭 웃더니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 잘난 머리를 좀 써보는 게 어떻겠나. 넌 여기 와서 머리가 너무 굳었어.”
“...뭐?”
“아무튼 따라와라. 와보면 내가 하려는 게 뭔지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퀘루안이 이내 거대한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방향을 향해 저벅저벅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플라스는 이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잠시 머리를 긁적였지만...
“후...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저 녀석이 총대장이니.”
그 또한 이내 곧 퀘루안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숲에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크으으윽...”
“선배 괜찮아요?”
“난 괜찮... 큭!”
폭주는 멈춘 유세현이었지만 그의 상태는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 유세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 해봐야 걷는 것 정도.
‘후우...’
애써 한숨을 삼킨 김주희가 강희수와 유승혜에게 상황을 물었다.
“희수씨, 승혜씨 어떤가요?”
“......”
둘은 좀처럼 답하지 못했다.
유세현의 상태가 이런 그들이 현재 걸고 있는 것은 트랩을 깔고 쳐들어온 드래곤을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드래곤들은 쳐들어오긴 커녕 모습조차 드러낼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특수조건인 100일까지 남은 시간은 잘 해봐야 6시간 정도인데.
‘같이 죽자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다른 노림수가...’
곰곰이 생각을 이어나가던 김주희가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것 마냥 몸을 순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이놈들...’
깨달은 것이었다.
드래곤, 아니 퀘루안의 노림수를.
* * *
“크크크크, 인간 놈들 지금쯤 안전부절 못하고 있겠군.”
“어이 퀘루안. 놈들이 정말 올까?”
“크크크, 당연하지. 여태 경험하고서도 이곳의 법칙을 깨우치지 못하다니. 너는 그래서 그 뛰어난 능력과 고유특성을 지니고도 아직 총대장의 직위에 오르지 못한 거다 라플라스.”
“......”
라플라스는 퀘루안의 말에 순간 똥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재빨리 표정관리를 했다.
이렇게 시간이 경과된 이상 짜증나는 것은 둘째 치고 이제는 퀘루안의 말이 맞아 떨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놈들은 분명히 올 거다. 이곳 비석으로!”
그렇게 퀘루안이 호언장담하고 있을 무렵, 김주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김주희가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바로 이동을 시작해야겠어요.”
“예? 왜...”
“놈들은 이곳으로 쳐들어오지 않을 테니까요.”
여태까지 확인된 바, 태초의 정원은 비석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가 점점 붕괴되며 구역이 축소되고 있었다.
그 뜻은.
“놈들은 비석 주위에 있을 거예요. 우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길 바라면서.”
“......”
강희수와 유승혜의 표정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이 그렇게 나왔다면...
‘열세를 극복하여 뚫어야 되는 건 되레 우리 쪽...’
이는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을 뜻했다.
“붕괴가 시작되기 전까지 다다라야 그나마 승산이 있어요. 트랩 등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요?”
“해내야죠. 무조건...”
불안 섞인 강희수의 질문에 안타깝게도 김주희가 할 수 있는 답이라고는 이것뿐이었다.
김주희는 곧장 앉아있던 유세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배 죄송하지만 체력을 아껴야 해서 업어드릴 수는 없어요. 걸으실 수 있죠?”
“...물론이야...”
그렇게 유세현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으로, 그들은 최후의 여행이 될지도 모르는 짧으면서도 긴 여행을 시작했다.
* * *
[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자리를 잡고 있네요.]
꼬박 5시간을 걸어 도착한 비석의 근처.
드래곤들은 김주희의 예상처럼 거대한 비석의 근처 거목에 대놓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일부러 자신들이 여기 있음을 광고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에 김주희와 유승혜, 강희수는 서로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주희가 수화로 말했다.
[선배님. 여기서 쉬고 계세요.]
[아니, 나도 함께...]
[걷는 것도 힘드시면서 뭘 하시려고요. 그냥 계세요. 솔직히 민폐에요.]
김주희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독설을 퍼부었다.
평소 김주희가 유세현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사람들이 봤다면 놀라서 까무러쳤을 정도의 직설적 화법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무리해서라도 따라 오실 테니까...’
[......]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인지 유세현은 침묵했고, 김주희는 쓰라린 마음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렸다.
[준비 되셨죠?]
[네. 물론이에요.]
[예, 됐습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기습방법은 좌, 우, 정면 세 방향에서 동시에 광역 무공을 날려 놈들을 없애거나 큰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판단컨대 현재로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럼 퍼지세요. 작전시간은 지금으로부터 2분 뒤!]
[예!]
답하기 무섭게 세 명의 여성들은 순식간에 보법을 운용하여 자리에서 흩어졌다.
유세현은 말없이 김주희가 사라진 숲을 응시했다.
그녀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꾸구국-
꽉 움켜쥔 유세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힘만 정상적으로 사용이 가능했더라면 큰 힘이 되었을 터인데.
막연히 기다려야만 되는 꼴이라니.
분하다.
미칠 듯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세현이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둠의 마력은 그를 더욱 괴롭힐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가 작은 침음을 흘리며 재차 주먹을 꽉 움켜쥔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오-
‘이, 이건?’
갑작스레 땅의 울림이 시작되며 마지막 붕괴를 알리는 대붕괴가 시작되었다.
* * *
‘하필 이 타이밍에! 아니, 오히려 잘 된 건가?’
주위가 혼란해지면 틈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광역 무공을 운용했다.
“쓰읍...”
콰아아아앙-!
허나.
“크흐흐흐! 그래! 역시 왔구나! 왔어! 얘들아!”
“예!”
퀘루안의 신호에 라플라스를 포함한 5명의 드래곤들이 양손을 모으고 재빠르게 영창을 개시했다.
지이이잉-
그러자 마력이 서로 공명하며 현재의 마력으론 감히 사용할 수 없는 수십 겹의 배리어가 순식간에 그들의 주위를 감쌌다.
‘...!!’
덕분에 피해는 제로.
‘이런... 협동 마법이라니!’
기습에 실패한 김주희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창을 치켜세우고 적들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이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 사투.
어떻게든...
‘놈들을 처리한다.’
이어서 강희수와 유승혜도 달려들기 시작했고, 퀘루안은 그런 그들을 보며 큰 조소를 내뱉었다.
“큭큭큭! 그렇게 마력을 낭비한 채로 어떻게 우리를 이기려고!”
둘 세력은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 * *
챙!
채쟁!
중간에 위치한 거대한 줄기가 유난히 눈에 띄는 홀의 중심부.
그곳에선 쇠와 쇠의 마찰로 생기는 파열음이 연신 끝없이 울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빠악-
“크윽!”
이윽고 둔탁한 음색과 함께,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던 여성의 몸이 뒤로 멀찍이 밀려났다.
제대로 맞은 것인지 여성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이에 남성이 천천히 다가오며 안쓰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만 포기해라 김다혜.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후욱... 후욱... 그런 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야.”
“...결국 끝까지 저항할 셈인가. 좋다 확실히 보내주도록 하지.”
아리우스의 육신이 순간 가속하여 김다혜에게 쇄도해왔다.
김다혜는 아리우스가 오른쪽 주먹을 치켜세우자, 흠칫 놀라하며 왼쪽 팔을 주시했다.
여태까지 보여준 그의 특이한 공격방식 때문이었다.
오른손으로 페이크를 주고 왼손으로 공격하는 척하지만 그것조차도 페이크.
곧장 내려찍기가 날라온다.
그리고 거기까지 어떻게든 방어해내면 보통은 끝나는 게 정상이었지만 아리우스는 기이하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몸을 틀어 박치기를 가해왔다.
아리우스는 선천적으로 신체가 다른 여타 드래곤들과는 조금 남다른 모양이었다.
덕분에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대체 몇 수를 읽어야 되는 것인지.
‘무슨 이런 신체가... 뼈가 없기라도 한 건가? 대처가 안돼!’
빠악-
“악!”
태초의 정원(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