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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493화 (47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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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

    곤히 자고 있던 유세현을 잠에서 깨게 만든 것은 풀잎을 타고 떨어진 한 방울의 물방울이었다.

    똑- 똑-

    솨아아아-

    물방울은 순식간에 소나비로 변모했다.

    유세현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뒤 눈을 감았다.

    ‘......’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무수히 많은 상념이 스친다.

    총 마력량이 강제로 줄어 마심원의 영향력이 적어졌기 때문일까?

    컨디션은 오히려 전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심정은 그와 반대로 꽤나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꿈은 본디 잘 기억나지 않기 마련이건만... 그는 막 방금 대면한 것 마냥 마왕과의 대화가 기억 한편에 또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왕의 그 폭언과도 같던 말.

    ‘루시뷀트...’

    그는 왜 그런 말을 구태여 내뱉은 것일까.

    정말로 실망해서? 한심스러워서?

    유세현은 의도를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천마와 함께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꽤 오래전이었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 사실 루시뷀트에 대해 아는 것 자체는 많지 않았다. 아니, 적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세현이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눴던 때는 마왕성에서 처음 대면한 당시뿐이었으니까.

    벨제뷔트와의 전투 당시 의식이 뒤바뀔 때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것은 딱히 대화라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유세현은 천마는 그렇다 쳐도 루시뷀트에게 자리의 일부를 내어주고 있을 이유가 딱히 없었다.

    루시뷀트는 비유하자면 잠복기인 종양과도 같은 존재.

    유세현이 누군가와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루시뷀트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바로 위기에 직면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런 이물질을 계속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놔두다니?

    그러니 본래 이성적으로 보면 유세현은 지금이라도 그를 거부하는 게 맞았다.

    유세현이 루시뷀트를 거부한다면 루시뷀트는 당장 내면에서 초라하게 사라지게 될 터다.

    ‘......’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세현은 루시뷀트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왜일까?

    연민? 자유를 갈망하던 그의 모습이 불쌍해서? 아니면 마심원을 승계해준 것에 대한 얄팍한 보상?

    [...세현씨.]

    [......]

    [세현씨!]

    유세현이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전음이 날라 왔다.

    강희수였다.

    [무슨 일입니까? 희수씨. 설마...?]

    [예, 맞아요. 누군가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거리는?]

    [50m]

    50m, 그 말에 유세현의 이마에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

    50m는 정말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다.

    그 정도로 접근하면 웬만큼 감이 좋지 않은 대리자조차도 접근을 눈치 챈다.

    ‘그런데 내가 눈치 채지 못하다니... 역시...’

    [총 수는?]

    [여덟이요.]

    4 대 8.

    무려 두 배 차이.

    지능이 낮은 몬스터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세현은 일단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그냥 지나칠지.

    하지만...

    슈슈슈슈!

    파바방!

    풀숲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압축 공기포가 유세현과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유세현은 그것이 컨트롤이 가능한 1서클 마법, 매직미사일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무섭게 다른 나뭇가지를 향해 도약했다.

    파앗!

    타닥-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는 유세현과 일행.

    ‘제길, 역시 알고 접근한 거로군.’

    유세현의 인상이 살짝 구겨짐과 동시에, 마법을 날린 장본인 퀘루안의 인상도 미세하게 구겨졌다.

    ‘뭐야? 이걸 피해?’

    퀘루안, 그는 [기척제거]라는 라플라스만큼이나 굉장히 특수한 고유특성의 소유자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에게까지 특성의 적용이 가능했다.

    드래곤들이 무저갱에서 들키지 않고 접근이 가능했던 게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내 고유특성이 고작 놈들의 감지마법에 걸렸을 리는 없고... 특수한 탐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 놈이 놈들 중에 있나보군.’

    순식간에 결론을 내놓는 퀘루안.

    유세현은 착지하기 무섭게 김다혜와 강희수, 유승혜와 나란히 도주를 시작했다.

    수적으로 불리할 때 드래곤과 조우 시 일단 도주, 이것이 그들이 미리 정해둔 작전이었다.

    그 행동에 퀘루안이 혀를 차며 명령을 하달했다.

    “쫓아!”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 *

    “저놈들 뒤도 안 돌아보는군.”

    “불리한 입장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라플라스의 말에 툭 답한 퀘루안의 눈동자에 매섭게 날이 맺혔다.

    이상하게도 서서히 간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퀘루안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점점 차이가 발생하는 거지?’

    스탯은 분명 동일할 터인데.

    게다가 상대는 어떤 스킬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뭐지? 대체...’

    “퀘루안, 점점 거리가 벌어지고 있다만...”

    “알고 있어.”

    “어떻게 할 거야? 지금 상태에선 내 고유특성도 못 맞추는데.”

    “잠자코 기다려 봐라.”

    퀘루안이 그리 말하며 눈치를 주자, 그의 옆에 붙어있던 두 명의 드래곤들이 각각 좌우측으로 흩어졌다.

    두 드래곤들은 나뉘기 무섭게 마법을 사용해 일행을 노렸다.

    [윈드 커터.]

    비록 2서클의 마법에 불과하지만, 지금으로선 상당한 마력을 소요하는 부담이 가는 마법이었다.

    쉬이익-

    유세현은 몸을 살짝 틀어 흡사 곡예를 펼치듯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해냈다.

    퀘루안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속도에 적응이 안 될 텐데 엄청난 담력이군... 하지만...’

    순간 퀘루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속도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게 꽤 놀라웠을 뿐 퀘루안은 유세현이 피하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대놓고 쏘는 것도 못 피한다면 지금까지 못 살아남았을 터다.

    그의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촤악!

    쿠구구구!

    쾅!

    윈드 커터가 지나가며 잘라버린 나뭇가지와 나무토막들이 우수수 유세현과 일행을 덮쳤다.

    유세현은 이를 악물었다.

    본래라면 손으로 툭 털기만 해도 튕겨 나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을 장애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랐다.

    ‘이 자식들... 머리좀 썼군.’

    속도는 자연스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라플라스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호오~ 그래서 윈드 커터를?”

    “감탄은 됐고, 알지?”

    “예예~ 물론 알고 있습죠~”

    라플라스가 답하기 무섭게 퀘루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슈슈슉!

    그러자 여태껏 그를 뒤따르고 있던 4마리의 드래곤들의 움직임 갑자기 빨라지며 따라붙기 시작했다.

    몸을 가속시키는 마법, 헤이스트.

    김다혜가 황급히 외쳤다.

    “세현아! 이대론 따라잡힐 거야!”

    싸울 것이냐, 아니면 모든 마력을 보법에 쏟아 도주할 것이냐, 선택하라는 것.

    그때였다.

    치잉!

    모두가 적에게 한 순간 시선이 팔린 찰나의 틈을 타,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이건...!!’

    유세현은 재빨리 천마군림보로 방향을 틀어 회피하는데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그러지 못했다.

    “이, 이게 뭐야!”

    빛의 큐브에 갇힌 세 명.

    큐브는 라플라스의 고유특성이었기에 그들이 깨부수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제길...’

    유세현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김다혜에게 감정이 남아있어서라던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 셋을 지금 잃게 된다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 될까.

    “자, 각오는 되셨나?”

    퀘루안이 즐겁게 웃었다.

    확실히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즐거움이었다.

    라플라스도 자신이 할 일을 했다.

    “반갑다 내 특성에 걸린 인간들아. 그럼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룰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 룰 첫 번째, 너희들은 앞으로 그곳에 정확히 20분간 격리 된다.”

    라플라스의 말이 귓가에 쩌렁쩌렁 울린다.

    유세현은 라플라스의 선언을 듣는 순간 문득 한 가지 방도가 번뜩 떠올랐다.

    그는 라플라스가 입을 열새라 곧바로 끼어들었다.

    “룰 두 번째! 만약 20분이 지나기 전에 벗어나기를 희망한다면...”

    “라플라스를 그곳으로 소환해 쓰러뜨리면 된다. 갇힌 자는 라플라스를 소환할 자격을 지니고 있고, 갇힌 자가 원한다면 라플라스는 그것에 무조건적으로 응해야 된다.”

    “......”

    유세현이 난데없이 끼어들어 룰을 설명하자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솨아아아-

    쏟아지는 비만큼이나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는 분위기.

    당황한 라플라스와 싸늘하게 표정이 굳은 퀘루안이 유세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퀘루안이 물었다.

    “너... 어떻게 이놈의 특성을 알고 있지?”

    이에 유세현도 퀘루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전 층, 6층에서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룰을 알고 있지.”

    “......”

    퀘루안의 눈이 일순간 라플라스로 향했다.

    그런 전투, 보고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라플라스는 피식 실소를 내뱉으며 최대한 어이없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흥! 개소리로군. 6층이라니. 퀘루안, 난 저런 놈 모른다.”

    그 말을 들은 유세현은 비로소 확신했다.

    ‘이놈들 역시 파가 나뉘어져 있었군. 지금 이 부대를 이끄는 퀘루안이란 놈은 세레나가 무공을 완성했다는 것을 모른다.’

    이건... 이용할 수 있다.

    유세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일부러 인상을 구긴 뒤 다음 말을 이었다.

    “무슨 소리냐. 지금 날 모른 체 하는 거냐? 난 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6층, 너희가 마교인들을 이용해...

    콰광!

    그러자 라플라스가 갑작스레 공격해왔다.

    “퀘루안! 놈의 어이없는 헛소리! 더 들을 필요도 없다! 당장 죽이자고!”

    “야, 라플라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갑자기...”

    슈슉!

    쾅!

    그의 말이 끝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유세현에게 접근한 라플라스가 건틀릿을 착용한 팔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고위 대리자라고는 도무지 생각지 못할 정도의 너무도 직선적인 공격이었다.

    유세현은 검을 비틀어 우측으로 살짝 흘림과 동시에 무릎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가격했다.

    빠악-

    “캬아악!!”

    라플라스는 단번에 땅을 뒹굴며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 말 몇 마디에 이리도 흔들리다니. 어지간히 들키기 싫었었나 보군.’

    스르륵-

    쨍그랑!

    라플라스가 기절함에 따라 셋을 포박하던 공간단절이 해제됐다.

    “이런...”

    세 명이 갑자기 풀려나자 드래곤들은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퀘루안은 아차하며 황급히 유세현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유세현은 이미 근처의 다른 자를 노리고 있었다.

    “인간 따위가 어딜...”

    뻐억!

    노려진 드래곤은 당황을 감추면서 다급히 대응했지만 1:1로는 도무지 유세현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묘한 움직임과 기묘한 검법.

    2명이 순식간에 다운되자 유세현은 차라리 지금 모두 쓰러트릴 생각을 가졌다.

    딱 보니 놈들은 스택과 마력양이 부족하여 본체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

    그때였다.

    “이게 기고만장해져서... 어딜 감히...”

    콰아아아아!

    다음 타자를 향해 질주하는 유세현을 향해 우측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열이 화염이 쏟아졌다.

    예상외의 속도를 지닌 화염이었다.

    유세현은 황급히 내뺐지만 너무도 빨라 전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치이익-

    “크으윽...!!”

    분명 살짝 스쳤을 뿐이건만...

    불꽃은 스탯에 맞춰 약화된 갑주를 뚫고 우측 팔에 새까만 그을음을 남겼다.

    화상 입은 피부 가죽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물.

    ‘마법? 하지만 F랭크의 마력으로 어떻게 이렇게 빠른 화염 마법을......?!’

    그리 생각하며 마법을 날린 장본인, 퀘루안을 응시한 유세현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퀘루안의 모습이 용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확히는 머리만... 소형화 상태로.

    퀘루안이 히죽 웃었다.

    “왜, 신기하나? 하긴 처음 보겠지. 부분 변화하는 드래곤은.”

    “......”

    유세현은 셋에게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그대로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딜!!”

    이에 다른 드래곤들은 다급히 쫓으려 했지만.

    “그만.”

    퀘루안이 그것을 제지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한다.”

    “예? 제일 걸리적거리던 놈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지금 처리하는 편이...”

    “어차피 그 스텟으로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회복 못 해. 저놈의 오른팔은... 이제 이곳에서 나가기 전까진 사용 못 한다.”

    “아...”

    “그리고 쫓아가려면 머저리같이 기절한 이 두 놈 버리고 쫓아가야 되잖냐. 뭐가 있을 줄 알고 놔두고 가냐?”

    “하긴...”

    드래곤들은 멀어져가는 유세현 일행을 잠시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태초의 정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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