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489화 (47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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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색 지대 서쪽 외각.

    “리베르씨, 드래곤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뭔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아뇨, 그대로 입니다. 여전히 일정 거리만 유지하고 있을 뿐 딱히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1번 조의 조장, 리베르의 보고에 이강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감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장님.”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베르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이강호의 낯빛이 싹 바뀌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7층으로 올라와 우연히 드래곤을 발견한지도 어연 이틀.

    행동양식으로 보건대,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놈들의 목적도 우리처럼 재료다.’

    보통 어떤 지역에서 적과 급작스럽게 조우할 시 대다수의 종족들은 자신들이 훨씬 우위에 서 있다 생각하지 않는 한 지금처럼 몸을 사리며 상대를 지켜본다.

    그래야지만 추후 일이 발생했을 때 보다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드래곤의 행동은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이들이 보기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이전 그린드래곤의 진형에서 위용을 펼친 사람들이 존재하는 만큼, 적도 신중해진 것이라고.

    그러나 이강호는 평범한 대리자가 아닌, 이곳에 막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특색을 파악하고 있는 대리자였다.

    그는 이 보라색 지대에선 재료 말곤 딱히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현재 드래곤들이 다른 이유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을 이유는 1도 없는 것이다.

    ‘굳이 다른 경우를 꼽자면...’

    드래곤들이 아직 이곳의 탐사를 끝마치지 못해 탐색중이라는 것 정도뿐인데, 단순 탐사라 치부하기에는 외곽에 배치되어 있는 드래곤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것도 단일 색상의, 블랙 드래곤들이.

    외곽 한 곳에 이 정도의 병력이 모여 있다는 건 블랙의 본대가 이 지역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뜻.

    그리고 지금까지 봐온바 드래곤들은 뭔가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웬만해선 종족 전체가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다.

    “후...”

    이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이식 막사를 빠져나와 동쪽을 향해 지고 있는 보랏빛 태양을 응시했다.

    ‘블랙 드래곤이라...’

    물론, 대처법은 이전 층에서 이벨린과 상의하여 마련해 전파해놓은 상태였다.

    이강호는 만약의 만약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팀들이 드래곤을 발견했다 하더라고 횡설수설하는 경우는 없을 터였다.

    “흐음...”

    그렇기에 지금 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진행이 빨라도 너무 빨라. 어떻게 벌써...’

    회랑으로의 길은 꼭꼭 감춰져있다.

    다섯 가지의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지만 비로소 힌트가 나타난다.

    그런데 벌서 재료 모으기라니.

    만약 과거에도 드래곤들이 지금 이 속도로 신의 회랑으로의 길을 뚫었다면 당시 인간들은 회중시계를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었을 터였다.

    인간 측이 회중시계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때는 6개의 신물 파편이 전부 모인 이후였으니까.

    “...후...”

    이강호는 여기까지하기로 하고 상념을 멈췄다.

    본디 이런 유의 생각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법이었기에 저번처럼 과거는 과거, 지금은 지금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는 편이 옳다.

    현재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이강호는 곧장 부팀장, 스피루를 불렀다.

    놈들의 의도를 파악한 이상 관찰은 여기까지.

    “부팀장님.”

    “예, 팀장님.”

    “4조, 5조 조장님을 불러주십시오. 수색을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시라도 빠르게 이 주위 재료를 모은다.

    그리고...

    ‘플란의 핵을 구하러 중심부로 향한다.’

    * * *

    “끙... 망할 몬스터를 빼놓고는 좀처럼 발견되는 게 없네요. 선배.”

    “그러게.”

    수색 5일차.

    그들은 여전히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잠시 고심하던 김주희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선배님. 무저갱 벽면을 수색 해보는 게 어떨까요? 강호 선배가 말했던 주위가 벽면 일 수도 있잖아요.”

    “흠...”

    유세현은 이에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김주희의 제안이 이상하다 생각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김주희의 제안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충분히 한 번쯤 생각해 볼법한 것이었다.

    “거기는 나중에 보고 일단은 더 숲을 살펴보자. 아직 안 가본 장소도 많으니.”

    그가 탐탁지 않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세현은 최근 가끔가다가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정확히 설명은 할 순 없었지만 마치 뭔가에 찔린 듯한 찌릿한 감각.

    그리고 그러한 감각은 무저갱에 가까워질수록 발생 빈도수가 많아졌다.

    ‘후...’

    하지만 몸 상태가 이상해진 지금 그것을 굳이 말로 내뱉을 순 없는 법.

    말하면 김주희의 걱정만 커질 터다.

    “흠, 선배가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야...”

    다행히도 김주희는 군말 없이 유세현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세현 답지 않다라고 생각을 하긴 했으나 지금까지 유세현이 일을 미룰 때는 구태여 설명해주지 않을지언정 분명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뭐~ 사실 없어도 상관없지만.’

    김주희는 지금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죽어나가는 이 빌어먹을 탑 7층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웃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아무튼 좋은 건 좋은 것이었다.

    ‘후후후, 나중에 루시아한테 자랑해야지~’

    그렇게 김주희가 마음속으로 싱글벙글 하고 있는 사이, 유세현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주위를 잽싸게 훑었다.

    방금 또 그 기묘한 감각이 그를 스쳐지나간 상태였다.

    ‘......’

    이번엔 마력의 흐름까지 살핀 그였지만 위화감은 역시나 딱히 없었다.

    유세현은 쓴 침음을 삼켰다.

    ‘젠장, 역시 그냥 몸 상태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인가?’

    유세현이 살았던 지구에서는 CRPS,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는 병명의 난치병이 존재했다.

    그건 몸이 실제론 아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살짝만 건드려도 칼로 베거나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병이었다.

    웃기지 않는가? 아프지도 않은데 고통을 느끼다니.

    어찌 보면 말장난 같은 병.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엄연히 존재하는 병이었고 겪는 환자는 하루하루 극심한 통증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감각 이상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CRPS의 환자와 유세현은 겹치는 점이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유세현은 결국 결론을 내놓았다.

    ‘지금부터는 이 감각을 감각기관 이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라 보고 무시하는 편이 옳다.’

    이제부턴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

    “김주희, 무저갱의 벽면, 네 말대로 조사하도록 하자.”

    “예? 정말요? 방금 전엔...”

    “그건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유세현이 인정하자 김주희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생각을 바꿔 의견을 들어주다니.

    “히히,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그럼 선배님, 지금 바로?”

    “응, 무저갱 쪽으로 이동하도록 하자.”

    그 말을 끝으로 두 팀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동을 감시 마법으로 대략적으로 살피고 있던 트랄바루체는 즉각 드라프나우어에게 보고를 올렸다.

    “놈들이 무저갱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흐음...”

    말을 들은 드라프나우어가 차분히 턱을 들어 전방을 쓸었다.

    그의 앞에는 이곳에 막 도착한지 얼마 안 된 증원군들의 대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레드의 대표, 퀘루안.

    골드의 대표, 알리크스.

    실버의 대표, 실라우벨.

    마지막으로 그린 쪽의 에르비아크.

    드라프나우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하고 있자, 한 명의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드라프나우어님...”

    표정이 미약하게나마 구겨져 있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별로 맘에 들지 않은 모양.

    “실례지만 설마 고작 인간들 때문에 지금 저희를 소집하신 건 아니시겠죠?”

    “...!! 퀘루안! 감히 로드님께 그따위 언동을...!!”

    “그만, 됐다.”

    레드드래곤, 퀘루안의 망발에 트랄바루체가 단번에 들고 일어섰지만, 드라프나우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드라프나우어는 별 대수롭지 않는 것 마냥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 때문에 지원을 요청 한 것이다.”

    “...무슨...”

    “너도 들었을 터지 않느냐. 5층에서 있었던 그 일을...”

    “...그건...”

    일을 직접 겪은 에르비아크를 슬쩍 흘긴 퀘루안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건 4개의 종족이 한꺼번에 쳐들어와서 그렇게 된 게 아닙니까.”

    당시 그 전장을 경험한 레드드래곤 카스디아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퀘루안이었지만 그는 그 일화가 과장되어 부풀려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대체 뭐기에 4개의 종족을 동시에 움직이도록 만든단 말인가!

    ‘흥! 우연이 맞아떨어진 것뿐이다.’

    퀘루안은 그렇게 치부했다.

    실제로 판도라에서는 우연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말이 안 되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

    이어서 병력의 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퀘루안이 기다렸다는 듯 선언했다.

    “죄송하지만 드라프나우어님. 저희는 저희 방식대로 남은 재료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가 남았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퀘루안!! 너 이 자식!!”

    “뭐? 내가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했나? 트랄바루체? 인간 때문에 불렀다곤 하나 그건 부수적인 것이고 본 목적은 재료 채집 아닌가. 방식이 맞지 않아 우리 방식대로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이...!!”

    트랄바루체의 입술이 격하게 떨렸으나, 그는 그 이상 떠들지 못했다.

    아니꼬운 것과 별개로 퀘루안의 논리에 틀린 것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지원의 경우, 지시에 따르고 안 따르고는 대표의 재량이었다.

    “뭐, 그러도록 해라. 퀘루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로드시어.”

    드라프나우어가 허락하자 퀘루안이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드라프아우어가 이어 물었다.

    “자,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할 것이냐.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럼 저희도...”

    이어서 실버, 골드가 제각각 움직이는 것을 선언했다.

    지시에 따르겠다고 한 이는 오직 그린드래곤, 에르비아크 뿐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이후 간략히 정보를 받은 4명의 드래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출구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퀘루안이 혀를 찼다.

    “에르비아크, 그렇게 해서까지 로드에게 잘 보이고 싶더냐? 난 너 그렇게 안 봤었는데 말이지.”

    “...그런 게 아니다 퀘루안. 넌 경험해보지 못해서 별로 와닿지 않나 본데 놈들은...”

    “그런 게 아니긴.”

    “후우... 그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멋대로 생각해라.”

    “흥! 니가 구태여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니 걱정 마라.”

    땅에 침을 퉷 뱉은 퀘루안이 씩씩 거리며 자신의 부대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휙 돌렸다.

    잔뜩 열에 받쳐 있는 그를 본 에르비아크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퀘루안.”

    “왜, 임마?”

    “설마 바로 움직일 생각이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 신경 끄고, 넌 여기서 개처럼 잘 붙어나 있으라고?”

    그 말을 끝으로 퀘루안은 길목 너머로 사라졌다.

    “후우...”

    에르비아크는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끝없는 어둠밖에 존재하지 않는 무저갱.

    “큭...!”

    단서를 찾아 외벽을 타고 있던 유세현은 난데없이 찾아온 강렬한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 뭐야 이건 또?’

    마치 바늘로 뇌를 찌르면 이러할까?

    ‘제길... 갈수록 태산이군.’

    유세현은 어쩔 수 없이 이동을 멈추고 몸 상태를 살폈다.

    마력을 운용하여 통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낸다.

    “...!!”

    잠시 뒤 원인을 알아낸 유세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곧장 김주희를 불렀다.

    “김주희!”

    “예, 선배! 왜요?”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자.”

    “...예?”

    통각을 일으킨 원인은 등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등에 새겨져 있는 신물 파편이 신호를 보냈다.

    이건 분명... 경고가 틀림없었다.

    여기에 있지 말라는.

    “김주희, 철수명령 내려.”

    “아, 알겠어요 선배!”

    그때였다.

    “팀장님! 찾은 것 같습니다! 이곳에 묘한 글이 적혀있습니다!”

    김주희가 이끄는 팀원 중 한 명이 운 좋게 글귀를 발견했다.

    본래라면 기뻐해야 될 일.

    하지만 김주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오한을 느꼈다.

    ‘지금 이 타이밍에?’

    “수정 기록구에 영상 담으세요! 현 시간부로 이곳에서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지금 바로요?”

    “바로!”

    김주희와 유세현의 다급한 지시에 사람들이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부리나케 지표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강자인 김주희가 이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파바바박!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절벽을 오르는 인원들!

    그들이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치지지직-!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눈에 포착될 정도로 집대된 마력의 덩어리가 상공에 소용돌이쳤다.

    본능적으로 누가 발생시킨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넌더리를 쳤다.

    “이럼 염별할!”

    “드래곤이다!”

    쿠구구구!

    9서클, 감히 인간은 발현할 수 없는 최고위 마법이 절벽 상부를 향해 빗발쳤다.

    7층 무저갱(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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