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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485화 (47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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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펜의 너무도 쿨한 거절에 장내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장소에 대한 탐사는 어쩌면 탑 공략보다 중요할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특별한 일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퀴르벨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가 이리 쉽게 발을 내뺄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진심인가? 아르펜?”

    “응. 우리 블루는 동참하지 않도록 않겠어.”

    “...나머지는?”

    퀴르벨이 쓱 로드들을 훑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를 줄곧 주시하고 있던 아르펜의 눈빛이 일순간 빛났다.

    ‘퀴르벨 녀석... 사실은 초조해 하고 있군.’

    그러나 이러한 걸 파악한 것은 오직 아르펜 뿐이었다.

    나머지 로드들이 퀴르벨에게 집중하고 있었더라면 그들 또한 충분히 퀴르벨의 마음을 어렴풋 눈치 챌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 그들은 딴생각에 잠겨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알겔라우스가 제일 먼저 입을 열어 답했다.

    “우리 위대한 종족, 골드는 동참하도록 하겠다.”

    “우리도 하도록 하지.”

    이어서 나머지 로드들이 줄줄이 동참을 택했다.

    “흠. 그럼 하루 뒤 이곳에 전령을 보내라. 작전을 하달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퀴르벨의 상태는 어느새 본래대로 되돌아가 있었다.

    회의가 마무리 된 뒤, 아르펜이 엘라뉘스에게 물었다.

    “왜 참가 한 거야? 엘라뉘스? 뒤가 굉장히 구린 일이 될 텐데.”

    “그래서다.”

    “응?”

    “가까이 있어야 그나마 감시가 가능하지 않겠나.”

    “흐음... 뭐 맞는 말이지만 결국 걔네 뜻대로 움직여 줘야 되잖아? 퀴르벨이 틈을 줄 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만?”

    “그렇겠지. 그래서 말이다만 아르펜.”

    “응?”

    “거래를 하지 않겠나?”

    “거래?”

    아르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라뉘스가 훗 하고 웃었다.

    “내가 뭘 제안할지 알고 있으면서 괜히 그러는군.”

    “후후, 네 웃는 모습은 귀엽거든. 이렇게 하면 그렇게 반응할 거라 생각했지~”

    “......아무쪼록 정보를 제공해주겠다. 해보겠나?”

    그렇게 말하는 엘라뉘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아르펜도 장난기를 싹 없애고 말했다.

    “괜찮겠어? 연합을 속이는, 신뢰에 금이 가는 일이 되는 건데?”

    “주사위는 레드에 의해 이미 던져졌다.”

    “하긴.”

    “그래서 대답은?”

    “후후후, 우리 엘라뉘스가 직접 부탁하는 일인데 안 해줄 수야 없지. 나도 레드의 노림수가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엘라뉘스와 아르펜의 눈이 교차했다.

    드래곤 내 세력 중 비밀 협약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 * *

    인간들이 7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무렵, 마왕이 이끄는 마군은 이미 한 번 이 길을 지난 이력이 있는 벨제뷔트의 정보를 토대로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박살내며 무서운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었다.

    쾅!

    콰과광!

    “군주... 이시어. 모든 적을 섬멸했습니다.”

    모든 무리를 박살낸 벨제뷔트가 루시뷀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차분히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영혼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잘했다. 마군단장. 자리로 돌아가 보도록.”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벨제뷔트는 루시뷀트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본대로 돌아오자 뒤통수로 여러 시선이 뜨겁게 느껴진다.

    루시뷀트는 굴욕적이게도 그에게 본래 지니고 있던 휘하 부대를 이끌게 했다.

    [패배자...]

    [비굴한 놈.]

    당연하게도 그를 조롱하는 수많은 조소가 귓가에 맴돌며 메아리쳤다.

    참다못한 벨제뷔트가 마력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그건 환청이었다.

    ‘......’

    벨제뷔트의 어깨가 축 쳐지고 고개는 푹 숙여졌다.

    자신은 왜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인가.

    목숨을 구걸한 것은 본인이었지만 그는 그 선택을 거듭 후회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없었다.

    군단장이지만, 마기병보다 못한 존재.

    총사령관 레오릭에게서 명령을 하달 받은 벨제뷔트는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크샤...”

    “죄송하지만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직책으로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군단장님.”

    “...그래... 10연대장...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진군하라.”

    벨제뷔트라는 존재는 루시뷀트에게 머리를 조아린 그날 죽었다.

    벨제뷔트는 살아있는 인형처럼, 시체처럼 생활했다.

    * * *

    “벨제뷔트.”

    “예, 말하...십시오. 총사령관님.”

    “군주께서 이번에도 최단거리를 원하신다. 방법을 말해라.”

    레오릭의 물음에 벨제뷔트가 입을 열었다.

    “예. 이 층은...”

    마왕의 군세에 흡수된 이후, 벨제뷔트가 가장 긴 시간 대화를 나눈 인물은 정말 우습게도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레오릭이었다.

    “저 두 개의 산 정상에 있는 수정구를 동시에 부순 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을 이어나가는 벨제뷔트.

    본래라면 어마어마한 굴욕이었지만, 지금의 벨제뷔트는 레오릭을 상대하는 게 과거 부하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마음이 편했다.

    “진군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군단장이 할 일은 딱히 없었기에 벨제뷔트는 총사령관인 레오릭의 옆에 위치해 상황을 함께 지켜봤다.

    한참 지켜보는 와중 레오릭이 뜬금없이 말했다.

    “벨제뷔트.”

    “...말... 하십시오.”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군.”

    “......”

    벨제뷔트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레오릭의 조롱에도 그는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레오릭이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벨제뷔트.”

    “예.”

    “네가 지니고 있는 동화의 능력... 최대 몇 명에게 사용이 가능하지?”

    정말 생뚱맞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벨제뷔트는 의아해하면서도 답했다.

    “3명에게 사용 가능합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다시 묻겠다. 지금 몇 명에게 동화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지?”

    “...3명에게 사용 가능합니다.”

    “그럼 너의 충복이었던 데프하우어는 죽은 건가?”

    “......”

    레오릭의 물음에 안 그래도 별로 좋지 않던 벨제뷔트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연결고리가 강제로 뜯겨 나가는 그때의 느낌... 그건 벨제뷔트에게 있어선 별로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예. 죽었습니다.”

    어차피 이제 와 데프하우어의 생사는 의미가 없어진 상황, 자세히 말해봐야 좋지 않은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었기에 벨제뷔트는 그리 답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따라와라.”

    레오릭이 몸을 휙 돌렸다.

    벨제뷔트는 이놈이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의문이 일었지만 일단 잠자코 뒤를 따랐다.

    레오릭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후방을 담당하고 있는 그의 심복이자, 전대 서큐버스 퀸인 나차쉬의 뒤를 이은 나르슈나의 앞이었다.

    “나르슈나. 그것을 꺼내라.”

    “예, 알겠습니다.”

    레오릭이 명령하자 나르슈나가 포켓을 뒤적여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입방체를 꺼냈다.

    스스스-

    입방체의 크기는 외부에 노출되기 무섭게 순식간에 불어났다.

    철책으로 촘촘히 이루어진 입방체의 내부를 살핀 벨제뷔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이건?”

    “후후, 어때? 벨제뷔트? 이런 건 너도 처음보지?”

    입방체는 감옥이었다.

    내부에는 한 인물이 팔다리가 잘린 채 구속되어 빈사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쿠룬 종족?”

    “훗, 잘 알고 있네?”

    나르슈나가 그저 쿡쿡 웃는 반면, 벨제뷔트는 사정을 듣기 위해 차분히 레오릭을 응시했다.

    그러자 나르슈나가 벨제뷔트를 발로 툭 친 뒤 말했다.

    “야야, 나를 봐 나를. 총사령관님을 왜 봐?”

    “......”

    빠직-

    벨제뷔트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핏대가 솟구쳤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과거 자신의 밑에 깔려 아양 대는 것밖에 하지 못하던 계집 따위에게 마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어쭈? 표정 봐~? 그러다가 나 한 대 치겠어? 벨제뷔트?”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독이 바짝 올랐구만. 내가 너 밤에 한두 번 상대해 봤냐? 너 내가 아직도 그 옛날 걸레처럼 보이지?”

    “......”

    “야. 나 지금 너랑 같은 군단장이야. 군단장. 너랑 ‘동.급.’ 응?”

    나르슈나가 벨제뷔트의 이마를 손으로 툭툭 쳤다.

    “야, 열은 되레 내가 더 받아. 어? 어디서 패배한 개 따위가...”

    “나르슈나.”

    레오릭이 한 마디 했다.

    나르슈나는 곧장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이쯤 하겠습니다. 잘 들어 벨제뷔트.”

    나르슈나가 쓰러져있는 쿠룬족을 가리켰다.

    “이놈의 이름은 쿠니아칸. 대전사야. 꽤나 대단한 놈이지.”

    “......”

    “그리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네가 할 일은 이놈을 네 심복으로 만드는 거야.”

    “...이 사지다 떨어진 놈을 말인가? 아무리 대전사라고 쓸모가 없을 텐데?”

    “아, 그거?”

    후드득-

    나르슈나가 포켓을 열자 그곳에서 넝마쪽이 되어 뜯겨져 있는 팔 다리가 우르르 지면에 떨어졌다.

    “자 이제 해결 됐지?”

    “......”

    “아, 그리고 심복으로 만들라고 했는데 이놈을 병력으로 사용하기 위함도 있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어.”

    “으음? 뭐지?”

    “이놈이 지니고 있는 아이템.”

    화신의 멸화창.

    “귀찮게시리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아공간 포켓에 넣었지 뭐야. 그것을 회수하도록 해.”

    “호오...”

    벨제뷔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멸화창이 어느 정도의 아이템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귀찮음을 감수하며 지금껏 살려놓은 것을 보아하니 보통의 아이템은 아닐 터였다.

    자신이 있으면 그 아이템을 쉽게 회수할 수 있다.

    그는 루시뷀트가 봐준 것이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정말 어느 정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해.’

    그가 예전 알던 루시뷀트는 자비가 없는 군주였다.

    일개 병사라면 몰라도 반역의 주모자를 살려둔다는 건 그의 성격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벨제뷔트는 루시뷀트가 포용해주었을 때 사실 굉장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대전사라...’

    쿠룬에 대해선 잘 모르는 벨제뷔트였지만, 그는 대전사가 쿠룬에 몇 없는 전사 중의 전사를 지칭하는 말이란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즉 슨.

    ‘쿠룬의 본대와 대판 했다는 건데...’

    그런 것 치고는 마군의 피해는 거의 없어보였다.

    과여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패배 이후, 일부러 최대한 생각 없이 살아온 벨제뷔트였지만 일단 한 번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의 두뇌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 탑은 왜 오르고 있는 거지?’

    본래라면 남아있는 마지막 유적으로가 최후의 파편을 노리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 마왕의 군세나, 시간상으로 볼 때 이미 많이 진행되고 있어야 정상이다.

    ‘설마 이 탑에 뭔가가 있는 건가? 파편보다 중요한?’

    벨제뷔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추후 나르슈나를 찾아갔다.

    재잘대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자극하면 뭔가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뭐야, 벨제뷔트. 여긴 웬일이야?”

    “이 대전사, 쿠니아칸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 정보를 알면 동화를 보다 빨리 진행시킬 수 있어서 말이지.”

    “흐음. 그런 거야? 난 또~ 나한테 안기고 싶어서 온 줄 알았네.”

    “......”

    “그래서? 뭘 묻고 싶은데?”

    “성격. 혹은 이놈이 따르던 자의 이름 등등. 일단은 아무거나 좋다. 내가 알아서 걸러 들을 테니 아는 대로 말해봐라.”

    “으음... 아무거나라...”

    신의 회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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