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8/606 --------------
운기조식을 끝마치고 눈을 뜬 유세현은 시선을 좌측으로 옮겼다.
5m 너머 바위 위, 그곳에는 루시아가 걸터앉아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지금 근래 익힌 무공을 죽을힘을 다해 수련하는 중이었다.
‘잘되고 있는 모양이네.’
일순간 집중력을 모아 그녀의 상태를 살핀 유세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녀의 몸속의 마나는 빠르면서도 유하게, 마치 활력 넘치는 10대 마냥 흐르고 있었는데 이는 꽤나 빠른 성취를 이룰 때 발생하는 현상으로 무척이나 좋은 현상이었다.
‘재능이 꽤 있는... 크윽!!’
욱신-
그 순간 유세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의 통증에 가슴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게 또...’
몸을 어느 정도 가눌 수 있게 된 이후로 시간이 일주일이 더 흐른 상태건만 유세현의 몸 상태는 그리 썩 나아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별 차도가 없다.
‘...왜 이러는 거지...?’
과거에도 겪어 본적 있는 일, 그러나 지금과 그때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때는 아주 조금씩... 미약하게나마 점점 나아졌지만 지금은 이 이상으로는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오래 걸리는 것이라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나으련만...
‘만약... 낫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가 머릿속에 맴돈다.
유세현은 격통이 지나간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어? 오빠, 운기조식 끝냈어?”
“어, 방금 막.”
“올~ 타이밍 좋은데? 그럼 이거 좀 마셔봐.”
그때 저편에서 걸어온 유혜인이 유세현에게 불쑥 병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웬만한 상처 따위는 단숨에 치유해버리는, 이제는 고작 2병 밖에 남아 있지 않는 최상급 회복 포션이었다.
유세현은 손을 휘저으며 사양의 의사를 표현했다.
“됐어. 괜찮아.”
“뭐가 괜찮아! 오빠 심장 상태 아직도 이상하잖아! 내가 모를 거라 생각...”
“이미 마셔봤어 혜인아. 이벨린씨가 줘서.”
“...차도가... 없어?”
“응.”
“......”
그 말에 유혜인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다친 오빠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
유혜인의 기분을 읽은 유세현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말했다.
“야야, 원래 이런 건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져~ 알잖아? 그리고 이거 살짝 욱신거리기만 할 뿐 별거 아니야~”
“...정말로? 아닌 거 같은데?”
“진짜야 인마. 아마 포션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특수특성으로 인해 발생된 현상이라 뭔가 안 맞기 때문인 거겠지.”
“음... 하지만...”
“아, 진짜 괜찮다니까? 그보다도 강호는? 회의 중이야?”
“어? 강호 오빠? 아니, 레피아 언니랑 정찰 나갔어. 어제 회의에서 말했던 건데 오빠도 참석해서 알고 있잖...”
유혜인의 말이 마지막 부분에서 뚝 끊겼다.
모종의 위화감을 느낀 것이리라.
‘오빠가 이런 걸 까먹을 리가 없는데...’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유세현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아 맞아. 그랬었지. 깜빡했네.”
“...오빠... 혹시...”
“혜인아 오빤 운기조식 좀 더 할 테니까. 뭔 일 있으면 좀 알려줘.”
“어... 어?”
“이걸 해야 좀 더 빨리 낫지. 그럼 부탁한다.”
말을 끊어버린 유세현은 그녀가 뭐라 더 말할 틈도 없이 자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유혜인은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유세현은 유혜인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비스로 눈을 뜨고는 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는 그대로 털썩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계획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이유는 회의 진행 중 격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눈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내색하지 않고 참을 때면 유세현은 주위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투에서도 큰 영향을 미쳐 제대로 된 전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큰일이군...’
하지만 해결할 방법 따위, 지금의 유세현에겐 없었다.
그저 자연치유 되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
‘하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인간 세력도 언제까지고 마냥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시간은 금 조각 따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자원이니까.
‘최대한 노력 해보자.’
유세현은 눈을 감고 다시 운기조식을 하기위해 힘썼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흘렀다.
격통은... 내심 불안해했던 것과 같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유세현은 이제 고백해야 될 때가 온 것을 깨달았다.
숨겨두면 추후 동료들에게 무지막지한 민폐를 끼칠 수 있었다.
이벨린, 아린, 남궁시영, 이태광 그리고 이강호까지... 핵심 멤버들을 불러내어 말하자,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마를 붙잡은 이강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데?”
“솔직히 말하면 격통이 일어날 때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겠어.”
“그 정도야? 그건...”
“그래 깨어났던 그때와 똑같아...”
생각한 것보다도 더 최악의 상태에 김주희, 루시아, 아퀼라의 입가가 달싹였다.
“근데 예전엔 회복 됐었잖아?”
“그렇지.”
“근데 왜 지금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스텟이 높은데... ”
뭔가 이상하다.
이강호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탑의 패널티를 받고 있어 이런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지금 유세현은 패널티를 없애주는 결정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 현상은 외부적 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 유세현 자체의 문제라는 뜻이 되는데...
“왜 회복이 되지 않는지 알 것 같아?”
“아니... 전혀.”
“하기야 알면...”
“전 알 것 같군요.”
그때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돋보이는 여성, 루시펠이었다.
“알 것 같다고?”
“예.”
“뭐지?”
“생명.”
루시펠은 아주 간결하게 말했지만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응?”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면, 제6 유적 [가이드]를 유세현과 함께 한 넷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져 거칠게 흔들렸다.
깨달은 유세현이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그게 있었지...”
“오빠 그게 뭔데?”
유혜인의 질문에 유세현이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쓱 움직였다.
유혜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명의 반을 사용해서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어떤 표정이 될지...
“저주를 받았어.”
“저주?”
“어, 오르엠한테.”
그렇기에 유세현은 거짓말을 했다.
네 명이 그를 씁쓸한 표정으로 응시했지만, 유세현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하루 흘러 회의가 시작됐다.
“드래곤들의 모습이 더 이상 관측되지 않습니다.”
“아마 올라간 것이겠죠.”
“어떻게 할 겁니까 이강호씨. 엘프들과 델바람들의 동향은 아직 딱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만...”
쏟아지는 물음에 이강호의 시선이 일순간 유세현에게 향했다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만약 그가 회복이 가능했다면 이강호는 시간의 소요를 감수하며 그가 완치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 용의가 있었다.
허나.
‘그럴 수 없다면...’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가치.
“움직이도록 하죠. 7층으로 향하겠습니다.”
* * *
해발고도 3만 높이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평원.
상공을 날고 있던 아르펜과 엘라뉘스가 지면에 착지하자 대기하고 있던 레드드래곤, 카루아는 둘에게 머리를 굽혔다.
“위대한 블루와 그린의 로드를 뵙습니다.”
“어, 그래 카루아. 오랜만이다.”
아르펜이 손을 휙휙 흔들며 경박하게 인사했다.
엘라뉘스는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래, 이게 그의 특징인 걸 어찌하랴.
“카루아. 퀴르벨은?”
“막사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십니다.”
“드라프나우어도 와 있느냐.”
“예, 그렇습니다. 엘라뉘스님. 덧붙이자면 시르벨린님 알겔라우스님도 도착해 계십니다.”
“오~ 그럼 우리가 꼴진 거야?”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아르펜님. 시간상 늦지 않으셨으니...”
“뭐가 아니야. 제일 늦게 도착했으면 꼴진 거지. 아무튼 안내나 좀 해봐.”
“예.”
엘라뉘스와 아르펜이 카루아의 안내를 받아 막사 내부로 들어섰다.
막사 내부에는 육각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각 지정된 자리에는 각기 다른 머리색을 한 4명이 앉아 있었다.
아르펜이 여느 때처럼 손을 흔들었다.
“오~ 다들 오랜만~”
“아르펜! 경박하다!”
그러자 금빛의 머리칼을 지니고 노인이 노발대발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골드드래곤의 로드, 알겔라우스였다.
“아르펜! 네가 정녕 블루의 로드라면 체통을 지켜라!”
“어후... 우리 알겔라우스 또 화났네.”
“이게...!!”
“그만 좀 화내. 너가 무슨 레드야? 너 골드잖아~ 골드~”
“으으으...”
알겔라우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지식한 그는 품위 없는 아르펜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자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은발의 미인이 말했다.
“참아라. 알겔.”
“오~ 시르벨린. 지금 알겔라우스 챙기는 거야?”
“흥! 멋대로 떠들어라. 네 헛소리가 어디 한두 번이냐.”
“에이 헛소리라니~ 그렇게 말하면 듣는 드래곤 섭하...”
쿵!
“거기까지.”
그때 테이블이 크게 울렸다.
다부진 마초의 인상과 그에 걸맞은 붉은 장발을 소유하고 있는 남성이 한 일이었다.
“퀴르벨...”
“좀 앉아라. 아르펜. 장난치기 위해 모인 게 아니니.”
“...음... 뭐, 그렇지. 알았어.”
아르펜이 엘라뉘스 좌측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비로소 착석하자, 지금까지 잠자코 일관하고 있던 현 블랙의 로드 드라프나우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를 모은 이유는? 퀴르벨?”
“귀중한 정보를 얻어서 알려주기 위해서다.”
퀴르벨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에 엘라뉘스와 아르펜은 순간적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설마?
“2주일 전. 내 수하들이 8층에 존재하는 이형 공간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
“이형 공간?”
“그래. 파악하기 쉽도록 정보화 시킨 데이터를 넘겨주지.”
퀴르벨이 손짓하자 마나로 제작된 정보의 데이터가 5등분 되어 각 로드의 앞으로 날아갔다.
로드들은 그 정보를 받기 무섭게 안색이 돌변했다.
만약 제공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곳은 지금까지 탑을 올라오면서 봐온 특별한 이형 공간 중에서도 한 단계 차원을 달리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직접 창조한 장소라...”
“흥미롭군.”
신이 직접 창조한 공간.
지금까지 그런 장소는 신물 파편이 묻혀있는 유적뿐이었다.
아르펜이 물었다.
“어떻게 이런 걸 알아냈지?”
“우연이다. 당연한 거 아니겠나?”
정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건 가진 자밖에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판도라에서 우연이란 말은 무척이나 좋은 변명거리였다.
단서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이런 장소에서라면 더더욱.
“그래서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
“당연히 조약 때문이지. 뭔가를 찾으면 일단 공유하고 보기로 하지 않았나.”
거짓말도 유분수.
아르펜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순수한 목적에서 공유를 한 것이라면 다른 정보도 같이 내놓았어야 정상이었으니까.
결정의 위치가 있는 그곳에 대한 정보를.
그렇기에 아르펜은 툭 떠봤다.
“퀴르벨. 이 탑 당연히 레드측에서 공략할거지?”
“아, 물론이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함께 공략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참가해도 좋다.”
“으음?”
그 말에 아르펜, 엘라뉘스 뿐만 아니라 이하 로드들의 눈썹이 일순간 들썩였다.
공략권은 그것을 발견한 자의 특권, 그 특권을 아무 조건도 없이 나누어주겠다는 건 너무도 미심쩍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퀴르벨 본인도 스스로 잘 아는지 말을 덧붙였다.
“대신 공략 중에는 내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줘야 된다.”
“흐음... 막 다루겠다 그런 건가?”
“뭐, 그렇지. 하지만 방패막이라던지 불공평한 일을 요구하는 건 없을 거다.”
“당연히 그래야지. 대가는? 만약 공략했는데 아이템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나눌 거지?”
“그때는 공평하게 홀짝으로 정하도록 하겠다.”
홀수 짝수.
그것은 마지막까지 맞춘 자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갖는 운으로 하는 도박이었다.
각 로드들이 개수를 합의하여 문제를 내기에 조작은 절대 불가능.
참고로 지금 파편 조각은 퀴르벨이 지니고 있는데, 이 또한 홀짝으로 얻은 것이었다.
“크... 그놈의 홀짝!”
알겔라우스가 분개했다.
그는 결승에서 퀴브벨과 붙었으나 아쉽게 패배하여 파편 조각을 얻지 못한 이력이 있었다.
“어떻게 할 건가. 참가 할 건가? 안 할 건가?”
퀴르벨이 물었다.
아르펜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난 도박은 약한데 말이지. 홀짝 말고 딴 방법으로 하면 안돼?”
“전투로 정하자는 건가? 그랬다가는 무조건적으로 피를 보게 된다만? 전력을 다하는 만큼 분명 누군가는 죽게 되겠지.”
“으음... 그건 그렇긴 한데...”
“지금은 이 방법이 그나마 제일 괜찮은 방법이다.”
“끙...”
따지고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피 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고한 로드들이 선택한 방법이 고작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도박이라니.
“에이... 그럼 난 안할래. 탑이나 올라가지 뭐.”
신의 회랑(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