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482화 (46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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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허억...”

    갈라진 땅,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던 괴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있는 거대한 탑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 탈출한건가...”

    괴물의 육체는 한눈에 봐도 어디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넝마쪽이 되다 못해 갈기갈기 찢겨 산산조각이 난 갑주, 지혈이 되지 않아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

    괴물은 조심스레 팔을 들어 머리를 더듬거리다가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크아아아! 젠장하아아알!”

    괴물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위엄 가득하던 2쌍의 뿔 중 각기 다른 위치의 두 개의 뿔이 완전히 박살나 부러져있었다.

    벨제뷔트는 살기가 가득 담긴 보랏빛 눈을 번뜩이며 곧바로 부하들을 소집했다.

    아크샤와 파라간, 아가레스 이하 휘하 병력들.

    “보고해라.”

    “제 1부대, 병사급 25명 사망, 중대장급 5명 사망...”

    드래곤들이 적당히 했기에 처참한 수준까진 아니었다. 충분히 재기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크으으으으...!!”

    벨제뷔트는 도통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루시펠에 이어 최고 심복인 데프하우어의 소실.

    반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실뿐이었다.

    “벨제뷔트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벨제뷔트는 수하의 질문에 딱히 답할 수 없었다.

    평소 무수히 많은 계책을 내놓던 그였지만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후...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그럼 놈들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포기? 설마 그럴 리가. 다만 지금은 회복이 먼저다.”

    명령이 떨어지자 마족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이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벨제뷔트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젠장... 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런 꼴이...’

    그의 두 눈동자에는 인간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둘,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두 남자의 얼굴이.

    ‘이강호... 유세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분노가 솟구치며 두통이 더욱 심해진다.

    벨제뷔트는 진정하기 위해 잠시 바위에 몸을 기댔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벨제뷔트. 아직 괜찮다. 충분히 재기 가능하다. 회복을 한 뒤 천천히 다시 쌓아올리면...’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어?”

    그가 올려다보고 있던 저편 하늘, 높은 상공 위로 수없이 많은 빛의 날개가 펼쳐졌다.

    * * *

    “공격하라!”

    “놈들은 빈사상태다!”

    슈우우우!

    쾅!

    천족들이 휘광을 발산하며 마족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벨제뷔트는 아연실색하여 그답지 않게 새파랗게 질렸다.

    ‘왜 천족이 지금 여기에...’

    운이 안 따라 주고 자시고 그런 걸 넘어선 정도의 악재.

    “오르엠님의 원수! 널 단죄해주마 벨제뷔트!”

    선봉으로 치고 온 가브리엘이 벨제뷔트를 발견하고는 성창을 들이밀었다.

    벨제뷔트는 허탈함에 어깨를 들썩였다.

    ‘이건... 끝났다.’

    만전의 상태에서 싸워야지만 비등비등한 것이 천족이다.

    탑에서 이리저리 구르고 구르다 드래곤에게 처참하게 당하기까지 한 지금, 벨제뷔트는 일말의 솟아날 구멍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이라도 무너지지 않는 이상... 이 전투에서 살아날 가능성은...

    “가브리엘! 물러나야 된다!!”

    “뭣? 미카엘!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노...놈! 아니 놈들이 오고 있다!”

    허겁지겁 날아온 미카엘이 다급히 가브리엘에게 전언했다.

    가브리엘은 미카엘이 한 손짓을 따라 그가 가리키고 있던 방향을 살폈다.

    천족의 빛조차 수그러들게 만드는 한없이 새카만, 밤보다 어두운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치지지지직-

    금속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나는 마찰음과.

    저벅- 저벅-

    조급함이라곤 일체 찾아 볼 수 없는 여유로운 발걸음.

    캬아아아아아-!!

    들짐승의 괴성에 눈을 뜬 벨제뷔트에게 비친 것은 거대한 양날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한 장신의 해골병사였다.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해골병사의 턱이 벨제뷔트를 비웃듯 딱딱딱 부딪친다.

    벨제뷔트가 읊조렸다.

    “...레오릭.”

    “......”

    그러자 그렇게 불린 해골병사, 거칠게 움직이던 레오릭의 턱이 단번에 정지했다.

    벨제뷔트를 쓱 흘긴 레오릭이 옆으로 빠져 무릎을 꿇었다.

    “......”

    저벅- 저벅-

    그러자 수많은 마수와 마족이 정갈하게 도열 되어있는 그 길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얼어붙을 것만 같은 흑빛의 갑주. 거대한 대검, 투구사이로 비치는 붉은 안광.

    벨제뷔트는 그를 보자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오랜만이로구나. 벨제뷔트.”

    “...루시뷀트...”

    마왕 루시뷀트, 그가 벨제뷔트를 내려다보았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벨제뷔트의 전신을 짓눌렀지만, 고개를 조아리지 않은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루시뷀트가 느긋하게 말했다.

    “포부 있게 떠난 것 치곤 무척 참담한 꼴이로군.”

    “......”

    벨제뷔트는 아무런 말도,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떠들어봐야 비웃음만 사게 될 거라는 것을 그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루시뷀트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 처참하게 당한 기분이 어떤가?”

    “......”

    “왜 말을 하지 못하나? 혀라도 잘린 건가?”

    “......”

    치잉-

    “군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거냐!”

    빛처럼 움직인 레오릭의 도끼날이 벨제뷔트의 목에 닿았다.

    “답해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제뷔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직시하고 생의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했군. 벨제뷔트.”

    “...그렇...다. 죽여라.”

    “후후후후.”

    벨제뷔트가 다분히 말하자 벨제뷔트의 병력들은 사색이 되는 반면, 루시뷀트는 무엇이 즐거운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래살고 볼 일이로군. 천하의 벨제뷔트가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걸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

    “벨제뷔트. 정말 죽고 싶나? 이대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싶나?”

    루시뷀트가 다분히 말하자, 입술을 질끈 곱씹은 벨제뷔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죽고 싶어 하는 자가 사실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방도가 전혀 없으니, 포기하는 것이지.

    덜덜덜-

    그 예로 벨제뷔트의 몸은 그답지 않게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있고 싶건만 도무지 조절이 되지 않았다.

    루시뷀트가 벨제뷔트의 어깨에 툭 손을 얹었다.

    “네 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벨제뷔트?”

    덜덜덜-

    그저 손을 올린 것뿐이건만, 지금 이 순간 벨제뷔트는 마왕이 너무도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과거 멋모르고 덤볐다가 작살났을 때가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무릎을 굽힌 마왕이 쓱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안광과 보랏빛 안광이 정면으로 마주한다.

    벨제뷔트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벨제뷔트.”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벨제뷔트는 정신이 토막이나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두렵다. 너무 두렵다. 미칠 듯이.

    “왜 내 눈을 피하나? 어차피 다 내려놓은 거, 내가 두렵지 않을 터인데.”

    “......”

    “옛정을 생각하여 깔끔하게 끝내주도록 하마.”

    전신에서 식은땀이 물처럼 새어나오고 있는 것을 본 루시뷀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검을 쥐었다.

    벨제뷔트는 허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그것을 응시했다.

    목이 잘리고, 머리통이 으깨져 죽는 마지막 모습이 상기된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렇게 죽기 위해 그렇게 기를 쓴 것인가. 자신은 이 정도에 불과했던가.

    이래서는 예전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무섭다.

    죽는 것이 미치도록.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벨제뷔트는 깨달았다.

    ‘그래... 난... 마왕을 능가할 수 있는 재목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2인자로써 살아갔어야 되는 그런 운명이었던 거라고.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그는 역시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쉬이익!

    루시뷀트의 검이 빠르게 그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벨제뷔트의 머리가 움직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쿵!

    대검이 머리를 조아린 벨제뷔트의 목 바로 옆에 떨어져 박혔다.

    루시뷀트가 신기한 듯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벨제뷔트?”

    “사, 살려주십시오! 제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뭘?”

    “저는 군주가 될 재목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는 그저 군주님의 충직한 개에 불과합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목숨을 다해...”

    벨제뷔트가 머리를 조아린 채 연신 구걸했다.

    핵심 간부, 아크샤와 파라간을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이를 눈살을 찌푸리고 지켜보고 있었으나 벨제뷔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살려만... 살려만 주신다면...!!”

    “그만.”

    한참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 루시뷀트가 툭 말을 잘랐다.

    벨제뷔트는 순식간에 움직이던 입을 멈추었다.

    다가간 루시뷀트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네 진심 와 닿았다.”

    “하옵시면...”

    “선처 해주도록 하지.”

    “아... 아...!!”

    그 후 벨제뷔트는 몇 번이고 셀 수 없을 정도로 감사를 외쳤다.

    고개를 조아린 채 연신 그렇게 떠드는 그의 모습에서는 과거 지니고 있었던 위엄이나 거만함, 오만함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만 일어나라. 군단장.”

    명령한 루시뷀트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 탑에 진입할 것이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지금 분명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후우... 후우...”

    “선배...”

    꽝꽝 얼은 차가운 물수건을 유세현의 이마에 얹은 김주희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날 이후 3일이 흘렀건만, 유세현은 고열을 앓으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세현 선배...”

    “김... 주희...”

    그때, 눈을 뜬 유세현이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김주희의 안색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선배! 정신이 드세요?”

    “응... 괜... 으윽...”

    유세현이 엄청난 격통에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서, 선배님...!!”

    “괘, 괜찮아. 버티다보면 나아질 거야.”

    유세현이 그녀를 안도시키기 위해 애써 피식 웃어 주었다. 그건 과거의 그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선배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김주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짜고짜 사죄했다.

    유세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가 왜 미안해해.”

    “제, 제가 제대로만 행동했어도... 제넥의 고집을 말리기만 했어도... 선배님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으셨을...”

    “괜찮아. 고집을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해서 그런 거잖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김주희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유세현은 알고 있다는 듯 답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김주희는 더 미안했다.

    김주희는 그새 말라버린 물수건을 다시 꽝꽝 얼려 그의 머리위에 얹어주었다.

    신의 회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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