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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전투는 드래곤들이 퇴각함과 동시에 이벨린이 이끄는 부대가 나타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강호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통로에서 등장한 여성 드래곤의 힘은 현재 그를 포함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강호씨!”
“이벨린...”
이강호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허겁지겁 달려온 이벨린이 그의 옆에 자리 잡았다.
그녀는 다급히 이강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어디 치명상을 입진...”
“괜찮다. 그 정도로 다치진 않았어. 전부 자잘한 생채기뿐이다.”
“후우... 그런가요.”
이강호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확실히 말해주자 이벨린의 입에서 진심 어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벨린이 자잘한 생채기를 치료하기 위해 치료마법을 걸자 이강호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경의는 모르겠다만 정말 고맙다. 만약 당신이 와주지 않았다면...”
“감사의 인사는 저 말고 루시아씨에게 하세요.”
“...루시아?”
“예. 그녀가 이곳까지 저희를 이끌어준 거거든요.”
“......”
이강호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잘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시아가 이끌었다고?’
이강호가 아는 한 그녀의 추적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아니 특수특성과 고유특성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그 순간, 루시아가 통로에서 뛰쳐나왔다.
이강호의 동공은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기에서? 들어간 걸 본적이 없는데...’
“강호씨!”
“루시아씨... 세현이는?”
“세현씨는 아직 그곳에 있어요. 먼저 가서 도와주라고해서 온 거예요. 이미 다 끝난 것 같지만...”
파앗-
쾅!
다음 순간 강렬한 뇌격과 함께 스토크가 이강호의 옆에 내려앉았다.
“스토크?”
“놈들은 이미 내뺀 거 같군.”
“......”
이강호는 당최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다.
분명 층을 올라오면서 흩어졌을 터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후... 듣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지만 우선은 정비부터 하도록 하지.”
* * *
유세현은 출구를 향해 발을 한걸음 내딛었다.
덜덜덜-
루시아에게 혼자 빠져나갈 수 있다 자신 있게 말한 그였지만, 그것은 루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허세였다.
발을 물론이거니와 전신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크윽...!!”
그는 결국 심각한 격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심장을 쥐어 잡으며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미안하지만 동료들이 도와주러 올 때까지 이대로 기다려야 될 듯 싶었다.
“후욱... 후욱...”
본래 생명체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호흡이지만 지금은 의식하지 않으면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기에 유세현은 눈을 감고는 호흡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고요해진 공간에는 호흡소리만이 잔잔히 메아리쳤다.
“크으으...”
전혀 반갑지 않은 불협화음이 울린 것은 1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방금 전의 신음소리, 그것은 유세현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유세현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제길...! 설마 살아남은 놈이 있는 건가?’
드래곤? 마교인?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정상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지만 방심은 금물.
유세현은 루베르크를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섰다.
그리곤 최대한 기척을 죽인 뒤 신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으으으...”
가까이 접근한 유세현의 눈에 비친 인물은 한 남자였다.
“양... 무원.”
“너... 너는...? 설마... 설마...천마...의 제자...인가...”
양무원은 유세현의 얼굴을 잊지 않았는지 그를 확인키 무섭게 즉각 반응했다.
유세현은 일순간 그를 쓱 훑었다.
별다른 생채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심장을 당했다. 이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유세현은 양무원이 자신을 어찌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힘을 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오래만이군 양무원... 그날 이후... 처음인가...”
그러자 양무원의 입가가 씁쓸한 미소로 번졌다.
“큭큭큭... 서로 꼴이 말이 아니로군. 그래... 침입자는 너였나.”
“......”
“크크크, 용케도 여기까지 알아내 찾아왔구나. 신기한 놈... 그러고 보면 넌 그때도 참 신기한 놈이었지.”
“...무공은 완성시켰나?”
“그렇게 묻는 걸 보니, 그년이 아직 그 무공을 사용한 적은 없나 보군. 하긴... 숙련되지 않았을 테니...”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기에 충격은 없었다.
“허억... 허억... 그... 년?”
유세현은 정보를 얻기 위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그는 애초에 양무원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래, 그 년... 세레나... 세레나 레퀴아르크.”
“세레나...”
세레나, 풀네임까진 몰랐지만 유세현도 분명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과거 알테리아 대륙인으로 신분을 속여 마교에 방문해 마법과 바꿔 무공을 연구한 드래곤.
“후우... 후우... 놈이 네가 만든 무공을 흡수한 건가?”
“그렇... 커헙!”
양무원의 입에서 각혈이 쏟아졌다.
폐를 당한 것도 아닌데 피를 쏟는 걸 보니,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빌어먹을... 내가, 내가 어떻게 일궈낸 것을...”
쿵!
부들부들 떨던 양무원이 지면을 힘껏 내리치자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지금까지 핏물에 잠겨 보이지 않던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엔 서적 비스무리하게 생긴 물품이었다.
유세현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허억... 허억... 양무원... 그건...”
“크, 큭... 이거 말이냐?”
양무원이 흘끔 서적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관심 꺼라... 무공서지만...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무공서이니...”
“무공서?”
“망령으로... 쿨럭! 만든... 실패작이다. 말도 안 되는 부작용을 지니고 있지.”
양무원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끌끌 웃었다.
이에 눈치 빠른 유세현은 그가 그것으로 뭘 하려 했던 것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양무원... 설마 그걸로...”
“눈치가 참 빠르구나. 그래... 진짜와 바꿔치기해서 그년을 내 수족으로 만들려 했다. 뭐, 결국엔 실패했지만...”
양무원이 무공서를 꽉 움켜쥐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련이 남아있는 게 틀림없었다.
“크...크큭... 내 마지막이 고작 이거라... 커헉!!”
양무원의 몸이 잉어처럼 펄떡 튀어 오르며 발작했다.
끝이 온 것을 느낀 것인지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천마의 제자... 아니 유세현... 네가 부럽구나. 난 너무 하찮은걸 쫓고 있었다.”
“......”
“1인자라는 영광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마존이 건... 3인자이건... 결국 다 똑같은 것을...”
양무원이 덜덜 떨리는 팔을 내밀었다.
내민 손에는 무공서가 들려있었다.
“가져라... 다시 생각해보니... 쓸모가 있을 거 같구나... 적에게 익히게 하면... 그놈은...”
털썩-
양무원은 그것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유세현은 그의 유산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그리곤 피의 바다가 된 질펀한 땅에 드러누워 피칠갑이 된 무공서의 정보를 힘겹게 읽어 내려갔다.
아이템명: 무원심법
등급: 에픽 [SSS- Rank]
상세정보: 마교 교주 양무원이 우연히 창시해낸 심법입니다.
사망 직전 무원심법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무원심법은 여타 심법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심법으로 사용 시 보다 정밀한 마나 제어가 가능해지며 스킬 발현에 있어 뛰어난 효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 망령의 원념이 그대로 서려 있어 근본이 되는 힘을 지니지 못한 자가 익힐 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됩니다. 이 정보는 창시자가 인정하지 않은 사람에겐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죽을 만큼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
내용보다는 아이템명이 눈에 들어온다.
“무원심법이라...”
왜 창시자나 개발자들은 다 자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일까.
‘많이... 어울리지 않군...’
유세현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복귀한 아르펜은 돌아오기 무섭게 제렉스에게 마족 사냥의 결과를 물었다.
“아르펜님의 말씀대로 적당히 했기에 저희 쪽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벨제뷔트는?”
“꽁지 빠져라 도망쳐 탑을 이탈했습죠.”
“흐음...”
다 예상했던 바, 거기까지 들은 아르펜은 더 이상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지금 그보다도 100배 중요한 것은...
“그런데 아르펜님, 카스디아를 추적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설마 놓쳤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시겠죠?”
“야 이놈아! 나 로드야 로드! 놓쳤겠냐?”
“하하... 그래서 설마라고 했잖습니까. 설마. 그럼 끝까지 추적은 하신 거네요?”
“물론이지 임마!”
“뭐 알아낸 게 있으십니까?”
제렉스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르펜은 주위를 한번 슬쩍 흘기고는 주머니에서 결정을 꺼내 제렉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정보를 읽기 무섭게 제렉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신기하지? 레드 놈들이 어떻게 알아낸 걸까?”
“결정이 많았습니까?”
“아니 없었어. 쥐꼬리만큼도.”
“에? 그럼 별로 의미가 없는 거 아닙니까? 결정 한두 개 정도로는 택도 없는데.”
“뭐, 애당초 결정이 별로 생성되지 않았던 거라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카스디아의 그 행동. 그 당황.
“그곳에는 분명 대량의 결정이 존재 했었어.”
“......”
제렉스의 입이 꾹 닫혔다.
만약 아르펜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결정을 빼돌린 자가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결정을 누가 빼돌렸는지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레드는 조약위반을 한 건데.”
“일단은 모른 척 너머가.”
“예?”
“누가 진행한건지 정확히 모르잖아. 퀴르벨이 했다는 증거 있어? 괜히 지금 건드려봐야 좋을 거 없어.”
“......”
“그보다도 엘라뉘스는?”
아르펜이 엘라뉘스의 동향에 대해 묻자 제렉스가 기겁했다.
“서, 설마 알려주실 생각이십니까? 이 사실을?”
“응.”
“이런 미친! 아르펜님! 아무리 엘라뉘스님이 좋다지만 그분은 그린이라고요! 그으린! 예?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우리가 힘들 게 알아낸 정보를 구태여 왜 알려 줍니까?!”
“우리 아닌데? 내가 알아냈는데?”
“......”
제렉스는 그 황당한 답변에 잠시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이 됐다.
“그리고 미안한데 떠나기 전에 알려주겠다고 이미 약속을 해놨어. 말 안 하면 되려 이상하게 생각할걸?”
“......”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공유를 해둬야 신뢰가 생기지 임마! 너 엘라뉘스 성격 잘 알잖아?”
“...하지만...”
“야 그리고 안 알려주면 우리도 조약위반이야~ 우리가 위반해서야 되겠어?”
“...엘라뉘스님께만 알려주고 나머지한테는 숨기실 거잖아요. 그럼 마찬가지인데요?”
“하하. 이 자식...”
아르펜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렉스의 말처럼 할 거라는 뜻이었다.
제렉스는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뭐, 마음대로 하세요. 이러쿵저러쿵해도 아르펜님이 블루의 로드시니.”
“믿고 의지해줘서 고맙다~”
“어휴... 말이나 못하시면... 전 그럼 애들에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제렉스가 이윽고 떠있는 바위 사이로 도약해 사라졌다.
아르펜은 그런 그를 잠시 보다가 훗 하고 웃은 뒤 마찬가지로 자리를 박찼다.
벨제뷔트와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