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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헤져나가던 벨제뷔트의 발걸음이 대뜸 뚝 멈췄다.
온갖 악재가 겹쳐 그가 이끄는 마군은 현재 무척 좋지 않은 상황, 한시가 급한 상황이건만...
‘뭐지? 설마 적을 감지하기라도 한건가?’
명백한 이상해동에 아가레스는 잽싸게 주위를 살폈으나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벨제뷔트님 갑자기 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스리슬쩍 아가레스가 물었으나 벨제뷔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벨제뷔트의 귓가엔 아가레스의 목소리가 닿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뭐...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데프하우어와 연결되어있는 고리의 상태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화했다.
연결이 된 것도 아닌, 그렇다고 안 된 것도 아닌 벨제뷔트가 생천 처음 겪어보는 형태로.
‘대, 대체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될 수 있는 거냐!! 어떻게!!’
지끈- 지끈-
지속해서 쌓인 스트레스에 의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벨제뷔트는 일단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충격 때문에 잠시 정신을 놔버렸지만 현재 최우선시 해야 될 것은 이탈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차후 천천히 알아보면 될 일... 이제 출구까지는 머지않았다.
그가 그렇게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슈슈슈슈!
갑작스레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마법진이 상공을 수놓았다.
어마어마하게 집대된 마력, 그것은 웬만한 것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크샤와 파라간조차도 새파랗게 질릴 수준의 마법이었다.
“이... 이건!”
“젠장! 드래곤이다!”
후우우웅!
쿠과과과광!
수많은 돌덩이와 얼음의 비가 벨제뷔트의 군세를 향해 떨어졌다.
지이잉-
동시에 광학미채가 사라지며 상공을 날고 있던 드래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좌측에는 그린, 우측에는 블루.
벨제뷔트를 포함한 휘하 병력들은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라뉘스와 아르펜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이놈들이...”
“이곳에 올라와서 상당히 수난을 겪은 모양이군 벨제뷔트. 꼴이 말이 아닌데?”
아르펜이 조소를 흘렸다.
벨제뷔트는 수치스러워 이가 으득 갈렸지만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젠장... 두 놈이 같이 나타나다니...’
로드 두 마리가 함께 움직였다는 것은 벼려도 단단히 벼렸다는 뜻이 되기에.
‘이참에 우리를 치워버리겠다는 셈인가?’
그들이 마음먹고 공격하면 현재 상태가 좋지 않은 벨제뷔트의 군세는 상당한 수준의 타격을 입을 터였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여기서 병력을 더 잃었다가는 정말 끝장이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벨제뷔트는 애써 담담한 자세를 유지했다.
기습을 했음에도 이어서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협상에 있어서 약한 모습은 곧 죽음.
“아르펜...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거냐? 결코 곱게 끝나지는 못할 거다.”
“어이쿠 무서워라! 역시나 대악마님! 너무 무서워서 오금이 지리겠는 걸?”
“......”
그러나 돌아오는 건 경박한 비웃음이었다.
상대의 전력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
벨제뷔트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자, 아르펜이 장난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크크,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야 해본 소리. 그러니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대악마님~”
벨제뷔트는 그것을 보며 더 이상의 기싸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설픈 연기는 아르펜에겐 통하지 않는다.
“...목적이 있으니 이러는 거겠지? 원하는 걸 말해라 아르펜.”
“후후, 역시 대악마님! 눈치가 정말 빠르시단 말이지~”
“후우...”
경박한 말투에 옆에 있던 엘라뉘스가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반면, 아르펜은 그러거니 말거니 잔뜩 환색했다.
아르펜이 말했다.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듣고 싶다.”
“......”
그것은 무척 짧지만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이에 엘라뉘스의 눈이 일순간 아르펜을 스쳤다.
‘눈치 챘었던 건가...’
벨제뷔트는 잠시 고민했다.
거짓말로 속여 넘길 수 있다면 참 좋을 테지만 놈들은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도 큰 정보이지만...
‘젠장...’
지금의 벨제뷔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르펜. 질문에 답한다면 그냥 돌아갈 테냐?”
“물론이지. 그렇지 않으면 협상이 성립되지 않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흠... 지금까지 블루 드래곤을 이끌었던 역대 로드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어때 이러면 됐나?”
역대 로드의 명예.
벨제뷔트는 드래곤들에게 있어서 역대 로드의 명예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었다.
역대 로드의 명예를 저버리는 것은 지금까지 이끌어온 그들의 행보를 우습게 생각하고 욕보이는 행위.
만약 이것을 어기게 된다면 아르펜은 블루드래곤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됨과 동시에 로드직에서 필히 박탈당하게 되리라.
“...명예라... 좋아. 믿겠다. 엘라뉘스 너도 맹세해라.”
“...역대 로드의 명예를 걸고 약조하겠다.”
“후... 좋아... 거래 성립이다.”
* * *
상당히 긴 이야기였기에 아무리 압축해서 말을 한다 한들 설명하는 데는 꽤나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야기가 마무리 되자 아르펜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한 관객 마냥 박수를 짝짝 쳐댔다.
“와아~ 정말 대단한 이야기였어~”
“너가 원하는 건 전부 말해줬다. 자 이제 돌아가라.”
“아, 물론이지.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만...”
“뭐냐.”
“그 인간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성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짚이는 게 전혀 없나?”
“......”
벨제뷔트도 제일 의문이었던 부분.
벨제뷔트는 고개를 저었다.
“없다. 놈들은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난 처음 놈들은 봤을 때 날개를 감춘 루시퍼... 아니 루시펠의 수하인 줄 알았다.”
“그래...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
“자, 그럼 이제 이야기는 진짜 끝이다. 우린 갈 길을 가도록 하겠다.”
“아 그래. 잘 가도록.”
아르펜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벨제뷔트는 그 행동에서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차피 그가 할 수 없는 건 없을 것이므로 진군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가 채 3보도 움직이지도 않았을 때였다.
“아, 근데 벨제뷔트.”
“말 걸지 마라. 거래는 성립 됐고 더 이상 대답해줄 이유는 없...”
“우리 거래 조건이 정확히 뭐였더라?”
“뭐?”
뜬금없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벨제뷔트의 고개가 일순간 갸웃 꺾였다.
전대 로드의 명예까지 건 마당에 지금 와서 대체 무슨 망발을 하는 것...
그 순간, 거기까지 생각한 벨제뷔트의 뇌리에 천둥이 몰아쳤다.
‘설...마?’
아르펜의 비웃음이 이어졌다.
“흐흐흐흐...”
“네, 네놈...”
“정신머리가 어지간히 없었나 보구나 벨제뷔트! 네 장기인 말장난에 스스로가 넘어가는 꼴이라니! 하하하하!”
“크... 아, 아크샤! 파라간! 전군! 놈들을 배제...”
“그럼 엘라뉘스와 나는 돌아가도록 하지. 적당히 쓸어버려라. 제렉스.”
“예.”
슈슉-
아르펜과 엘라뉘스가 허공에서 자취를 감추기 무섭게 폭격이 떨어졌다.
* * *
운기조식을 펼치던 양무원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자극하는 의문에 눈을 번쩍 떴다.
‘왜지? 갑자기 왜 이렇게 빨리 일을 진행하는 거지?’
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는 세레나에게서 다음날 술법을 실시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고도의 집중이 필요할 뿐 체력 자체는 그다지 들지 않는 일이었기에 양무원은 상관없다 답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의문이 샘솟았다.
지금까지 굼벵이처럼 일을 진행하고 있던 게 누군데...
‘그러니 분명 뭔가가 있다.’
하지만 그 뭔가가 무엇일지 양무원은 당최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세레나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주의자였으니까.
기껏 의심해볼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해봐야 외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정도뿐.
‘만약 불가피한 일이 생겨 서두르고 있는 거라면 나에겐 잘 된 일이다.’
조급함은 틈을 유발하니까.
‘내일이라...’
양무원은 각오를 다지며 떴던 눈을 다시 지그시 감았다.
* * *
“왜 날... 아니 우리를 살려 준거지?”
스토크의 물음에 루시아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동맹이니까요.”
“......”
스토크의 입이 악 다물렸다.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감정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뒤엉켜 교차하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 말없이 루시아의 옆을 걷던 그가 다시 입을 연 때는 갈림길을 지난 후였다.
“길을 알고 가는 건가?”
“확실하진 않아요.”
“그런가...”
스토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딱히 딴지를 걸진 않았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결정에 의문을 두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도 수집하지 못한 특수 공간.
정신을 놓는 순간 언제 또 기묘한 힘에 잠식되어 광인이 되어버릴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금은 루시아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 나갔을까.
“젠장, 갑자기 머리가...”
사람들이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둠 저편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괴음.
[캬아아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그 울부짖음은 시간을 더해갈수록 조심씩 커져갔다.
“두통이 있는 사람들은 뒤로 빠지세요.”
사람들은 곧장 전투에 대비했다.
꿀꺽-
마른침이 목뒤로 넘어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자세를 취한 대리자들은 그 작은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스스스스-
꺾인 길목으로 어둠이 서서히 드리운다.
루시아는 다가온 놈에게서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언제든지 공격 명령을 내릴 준비를 했다.
그렇게 1초.
놈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루시아가 힘차게 팔을 내렸다.
“하아압!”
“죽어라아아아!”
수많은 대리자들이 각기 필살 기술을 발현했다.
크기로 보건대 적은 재해.
무슨 재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처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야지만 일말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 위대한 기운... 넌 길을 걷고 있는 자로군.]
족히 50m가 넘는 거대한 그림자가 입을 열어 루시아를 향해 읊조렸다.
말이 읊조린 것이지 크기가 크기인 만큼 대리자들에게는 쩌렁쩌렁 울리는 수준이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적의 없는 말투,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대리자들은 당혹에 빠졌다.
보통 재해는 조우할 시 대화는 커녕 공격해오기 바빴다.
“어, 어떡해? 공격해?”
[위대한 길을 걷고 있는 자여. 여긴 어쩐 일인가.]
“제기랄! 일단 경로 바꿔!!”
콰광!
쿠구구구구!
힘과 지형지물이 충돌하며 발생된 파공성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분명 신경이 쓰일 법도 한 위력.
그러나 그림자는 마치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루시아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림자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위대한 길을 걷는 자여. 여긴 어쩐 일인가.]
“......”
루시아는 대답하기에 앞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진실을 말하는 건 안돼.’
그건 아무리 봐도 놈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내뱉은 말로 파악하건데 놈이 관심을 두고 있는 건 루시아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지니고 있는 힘, 특수특성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그나마 이것이 최선의 답,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무공 창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