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469화 (45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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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했다고?”

    “예.”

    수하에게 보고를 들은 키르쉬나는 본인의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것에 조소를 흘렸다.

    그럼 그렇지.

    ‘성공할 리가 없지.’

    마지막 순간, 묘하게 께름칙한 느낌이 들어 굳이 물어본 것인데 역시는 역시였다.

    이물질이 섞여 있는 망령으로 무공을 완성시키겠다니.

    ‘킥... 양무원 놈... 지금쯤 분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겠군.’

    잔뜩 열이 받아있을 그를 떠올린 키르쉬나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그저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던 카실리아가 그녀를 향해 물어왔다.

    “키르쉬나. 방금 전의 그 마력의 폭풍은...”

    키르쉬나는 그제야 감정을 너무 드러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키르쉬나가 답했다.

    “아, 그거 말인가? 설명하자면 꽤 길다만... 세레나님께 어디까지 얘기를 들었지?”

    “바삐 움직이느라 놈들이 인간이라는 것 정도까지 밖에...”

    “흠, 그렇단 말이지...”

    키르쉬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사전 세레나에게 아무런 귀띔도 듣지 못했기에 판단은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키르쉬나의 몫이었다.

    ‘카실리아는 본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드래곤...’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키르쉬나는 이내 카실리아에게 양무원와 함께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적당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보다 큰 의구심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곧 경계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카실리아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확실히 그 힘을 손에 넣는다면 보다 전력이 강화되겠군.”

    이에 의문이 피어오른 것은 되려 키르쉬나의 쪽이었다.

    ‘뭐지? 뭐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지?’

    키르쉬나는 그녀의 부정을 예상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인간은 벌레, 그것이 드래곤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반응은 대체?’

    “카실리아. 설마 너 인간을 만나본 적이 있는...”

    키르쉬나가 역으로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찌잉-

    ‘엇?’

    그녀의 머릿속으로 난데없이 신호가 들이닥쳤다.

    그것은 재해의 근원지 근처, 아주 깊은 곳에 설치해둔 단 하나의 감시 마법에서 보내져오는 신호였다.

    ‘뭐지? 어째서 그곳에서 신호가...’

    망령이나 재해에는 반응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키르쉬나는 도통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그들이 있는 길목을 무조건적으로 거쳐야 하건만...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당황도 잠시, 키르쉬나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들이 이 층의 대략적인 것을 대개 파악했다 한들 모든 것을 파악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곳과 연결된 숨겨진 길이 존재하는 건가?’

    게다가 그 장소는 재해의 서식지였다.

    모종의 기운 때문에 레드드래곤인 자신도 꺼려하며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 장소인 것이다.

    누가 되었던 몸 성히 통과할 수는 없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냥 관망할 수도 없겠군.’

    감시 마법에 걸린 이가 몬스터나 타종족이라면 상관이 없었지만, 만약 여타 드래곤이라면 자칫 계획을 들키게 되는 수가 있었다.

    만약을 위해 대책은 강구해두어야 된다.

    키르쉬나는 곧바로 세 마리의 레드드래곤들을 불러 감시를 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만약 모종의 움직임이 포착될 시엔 곧바로 신호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너희들만 믿는다.”

    슈슉-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키르쉬나는 잠시 그들이 떠나간 장소를 응시하다 카실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카실리아 이번엔 내가 묻고 싶은 게 있다만...”

    조금 전이 카실리아의 차례였다면 이번엔 키르쉬나가 의구심을 해소할 차례였다.

    * * *

    “...뭐... 라고?”

    키르쉬나의 미간이 씰룩였다. 그만큼 카실리아에게 들은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마족, 엘프, 델바람이 다 같이 이 탑에 올라왔다니!

    데프하우어를 짊어지고 온 만큼, 마족까진 예상이 되었으나 이건 그 이상, 상상을 훨씬 초월한 일이었다.

    ‘게다가 뭐? 인간이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고?’

    몇 번을 생각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말.

    그때였다.

    드르륵-

    거대한 문이 개방되며 내부로부터 세레나가 걸어 나왔다.

    이에 카실리아와 키르쉬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레나를 향해 뛰어갔다.

    “세레나님! 아버님은!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걱정 말거라. 술법은 성공했단다.”

    “그 말은...”

    “그래. 데프하우어는 벨제뷔트의 마수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아아아...”

    너무도 기뻐서일까?

    카실리아의 몸이 지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어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카실리아는 그 상태로 몇 번이고 세레나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흑... 흑... 세레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세레나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지금 데프하우어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 그러니 만남은 최소 하루가 지난 뒤에 가지도록 하거라.”

    “하루면 되는 건가요?”

    “그래, 마수에서 벗어났으니 그 정도면 어느 정도까지는 회복이 될 게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 너도 고생이 많았는데 이젠 좀 쉬도록 해라. 키르쉬나, 카실리아를 쉴만한 장소로 안내해 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아 잠깐.”

    키르쉬나가 카실리아를 데리고 자리를 뜨기 직전 세레나가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력의 요동이 감지됐다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아, 그거 말입니까?”

    어차피 카실리아도 알고 있는 일, 키르쉬나는 숨기지 않고 대놓고 설명했다.

    전말을 들은 세레나는 차분히 턱을 짚었다.

    “흠... 실패했단 말이지...”

    “예.”

    “확실한 게냐?”

    “예?”

    “확실하냐고 물었다.”

    그렇게 묻는 세레나의 표정은 칼처럼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키르쉬나는 그것에서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합니다. 당최 망령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하단 것을 세레나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럼 저는 분부대로 카실리아를 안내해주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키르쉬나는 세레나를 스쳐지나가며 작은 메모장을 슬쩍 건넸다.

    침입자에 관련된 내용이 담겨져 있는 메모장이었다.

    “......”

    그것을 읽은 세레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또 실무 책임자, 아룰레시아를 불렀다.

    “아룰레시아. 지금부턴 마력을 사용해 빠르게 정리를 시작해라.”

    “예? 그럼 여타 드래곤들에게 발각될 확률이...”

    “내 생각대로라면 지금 그들이 우리에게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없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하거라.”

    “...그렇다면 분부대로...”

    아룰레시아는 세레나가 그녀답지 않게 뭔가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으나 수긍하고 물러났다.

    세레나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그 말마따나 세레나가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놈’은 지금까지 내가 부린 술수를 언제나 파해 해냈다.’

    고블린을 시작으로 트롤에 이르기까지.

    인간주제에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마치 진즉 한 번 상대해본 적 있는 사람인 마냥.

    만약 놈이 이곳에 올라왔다면... 이번에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이강호...’

    세레나가 싸늘하게 그의 이름을 지그시 곱씹었다.

    * * *

    ‘젠장! 젠장! 젠자아앙!!’

    제르오펜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르오펜씨 뭔가를 찾아내면 바로 보고해주세요.”

    “예, 물론이죠.”

    그에게 말을 걸어온 이는 같은 마족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렇다, 그는 아직도 인간 진형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전 습격이 있었을 때 틈을 타 벗어나려했지만, 아가레스가 보낸 전령이 지금 복귀하면 죽여 버리겠다 통보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연락이 끊겨버린 지금은 완전히 고립된 신세.

    아니 정확히 연락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연락할 틈이 없었다.

    ‘애초 연락이 된다고 뭐 어떻게 될 게 아닐 것처럼 보이긴 하다만...’

    최악의 상황이었다.

    벨제뷔트의 세력은 약화된 것이 뻔히 보였고, 먼저 이 탑에 들어왔을 뱀프리안이나 키메루스의 부대는 생사조차도 불명이었으니까.

    어디하나 붙잡을 데가 없는 것!

    ‘염병할...’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가.

    ‘줄을 잘못 섰어...’

    애초 아가레스를 따르지 않고, 마왕군에 남아있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제프오펜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

    ‘젠장,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고유특성, 의태가 얼마나 완벽하다 한들, 그리고 얼마나 사람들에게 잘 녹아들었다 한들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초조함은 그의 정신을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

    만약 아가레스가 교신을 보냈는데 다른 이들이 우연히라도 눈치를 챈다면?

    ‘이전 탑을 오르기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인간은 강해졌으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제르오펜은 그날로 끝장이었다.

    ‘차라리 교신을 끊어버려?’

    제르오펜은 그리 생각도 해봤지만 그렇게 될시 앞으로는 정말 인간으로 살아야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 차라리 이편이 괜찮나?’

    그냥 한번 해본 생각이었는데 제르오펜은 의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키지 않아야 된다는 명목하에 인간처럼 행동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통하는 동료도 생긴 상태였으니까.

    정체를 알고 있는 빌어먹을 왕만 처리한다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스르륵-

    그의 손이 슬그머니 손등으로 향했다.

    손등에 새겨져있는 각인을 지워버리면 끝.

    제르오펜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이려다가 고개를 황급히 털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아니야! 난 마족이다! 이깟 벌레들과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제르오펜은 애써 그리 생각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위기를 몇 번이고 넘겨온 그는 지금 분명 종족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 진짜 엿 같군.’

    머리칼을 쓸어 넘긴 제르오펜은 상념을 잊기 위해서라도 하달된 임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들에게 하달된 명령은 루시아의 흔적을 찾는 것.

    “이쪽은 흔적이 아예 없어요.”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흔적은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히 지워져있어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황을 살핀 이벨린이 골머리를 부여잡았다.

    ‘만약 이대로 루시아씨까지 실종된다면... 후...’

    최악 중의 최악.

    그녀를 믿고 보낸 건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일까.

    딱 그때였다.

    제르오펜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이벨린씨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만.”

    “아 예. 제르오펜씨.”

    이벨린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는 마족의 첩자니까.

    어차피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행동이겠지.

    그러나.

    “이거, 루시아씨의 물품 아닌가요?”

    “예?”

    “조금 깊은 곳에서 발견했는데...”

    제르오펜이 건넨 물품은 이벨린이 특별히 루시아에게 준 물품으로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이것을 굳이 떨어뜨려놨다는 뜻은...

    “제르오펜씨! 어디서 이걸!”

    “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르오펜이 앞장서고, 이벨린이 그 뒤를 따랐다.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매가 미묘하게 좁혀진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제르오펜이 흔적을 발견할 줄이야. 설마 계략인가?’

    이벨린은 그리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틈은 주지 않았어.’

    제르오펜과 함께하고 있는 이들 중에는 검은꽃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대리자들과 달리 그녀들은 제르오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한들 감시를 최우선시하는 그녀들이 놓쳤을 리가 없는 것.

    ‘그렇다면 그냥 정말 열심히 하는 거라는 뜻이 되는데... 흠...’

    돌이켜보니 제르오펜은 이 층에 올라온 이후 유독 열심히였다.

    뭐 자기 목숨이 달려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필요하다 생각되면 시키지 않은 일까지 알아서 생각해서 시행하곤 했다.

    ‘후... 아무쪼록 흔적을 찾아낸 건 정말 천운이야.’

    제르오펜은 어떤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깁니다.”

    “흐음...”

    이벨린은 곧장 전문 조사인력을 투입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조사부대의 리더, 알펜이 대표로 나와 말했다.

    “아마도 루시아씨는 이 바위 건너편으로 사라진 것 같아요. 지금은 막힌 것 같지만.”

    “그럼 추적은 불가능하단 이야긴가요?”

    “아뇨, 벽면을 타고 미묘하게 마력의 실이 연결되어 있어요. 분명 이 실의 반대편으로 이동됐겠죠.”

    “따라갈 순 있다는 거로군요.”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동굴 더 깊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어쩔 수 없군요.”

    “포기하실 생각인가요?”

    “아뇨, 모두가 애써 간신히 잡은 단서를 수포로 만들 순 없죠. 진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리더는 팀원을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벨린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진형을 갖췄다.

    이에 제르오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출발하기 전 이벨린이 제르오펜을 향해 말했다.

    “제르오펜씨 잘 하셨습니다. 당신 덕에 추적이 가능해졌습니다.”

    “뭘요. 팀원으로서 해야 될 일을 한 것뿐인데요.”

    “......”

    그녀는 아주 잠시 동안 묵묵히 그를 응시하다 진군 명령을 내렸다.

    악몽을 꾸는 땅(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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