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451화 (43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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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트가 위치해 있는 동쪽 숲.

    “허억! 허억! 허억!”

    “빨리! 더 빨리 이동해라!!”

    현재 그곳은 서쪽 못지않은 난장판이었다.

    “쳐라! 인간들을 잡아라!”

    “크으! 이런 빌어먹을! 뭐 이렇게...!!”

    사방에서 나타나 계속해서 몰아치는 적.

    하늘을 웅장하게 수놓은 수많은 스킬들.

    “이벨린님!!”

    “계속 달리세요! 게이트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적들은 하나 같이 판도라인들이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종족들로서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강자들이었다.

    과거였다면 그저 절망하여 절규하는 게 전부였을 정도의.

    그러나.

    “하아아압! 거기서 비켜라아아!!”

    쿵!

    전신이 붉게 물든 이태광의 우람한 바스타드소드가 적을 향해 쏟아지자 검격을 받은 엘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파르르 떨리기까지 하는 손.

    ‘뭐... 뭐냐? 어떻게 나보다도 힘이 더 강할 수가?!’

    그렇다.

    탑을 올라오며 성장한 덕택에 고유특성을 발현한 이태광은 현재 눈앞에 있는 엘프의 힘을 웃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이들 또한 밀리긴 할지언정 어느 정도는 대응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피, 피했어? 내가 저 일격을?”

    “마, 말도 안돼. 내가 이정도로 강해졌었다고?”

    운 좋게 공격을 회피한 한 남자가 자신도 깜짝 놀랐는지 중얼거렸다.

    “흥! 스탯만 똑같다면 나 무영문주! 은각! 저 따위 놈들에게 지지 않는다!”

    아니 되려 줄곧 실력에선 밀리지 않았지만 스탯 때문에 패배를 거듭해왔던 무림인들 중 일부 초고수는 되레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문주님! 지금은 뚫고 나아가는 데만 집중해주세요! 아무리 우리가 이전보다 강해졌다지만 평균적으론 상대 쪽이 더 강합니다!”

    “알고 있다!”

    채재쟁!

    “크악!”

    인간 진형은 피 튀기는 전투를 치르며 스토르 벤과 함께 게이트로 전진했다.

    마족, 엘프, 델바람, 블러드소울 등등 서로 다른 4개의 종족들이 그들을 가로막았지만 이곳 동쪽으로 보내진 이들은 대개 1군이 아닌 2군.

    게다가 우습게도 4개의 종족 또한 서로 조우할시 치고받고 싸웠기에 뚫는 게 그렇게까지 지옥은 아니었다.

    루시펠과 루시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무척이나 크게 작용했다.

    둘은 힘이 일부 봉인당한 상태임에도 무자비하게 적을 찍어 눌렀다.

    그렇게 힘들게 도달한 게이트.

    “모두 돌입하라!”

    “뛰어들어!”

    드디어 살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허겁지겁 게이트를 향해 몸을 던졌다.

    바로 뛰어들지 않은 이들은 오직 단 둘뿐이었다.

    “......”

    그들은 아련한 눈빛으로 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에 뒤섞여 날아온 끈적한 피 내음이 둘의 코를 찌른다.

    “루시아씨... 세현씨는... 그들은 전부 무사히 돌아오겠죠?”

    “... 그러길... 빌어야겠죠.”

    표출하고 있진 않았지만 둘은 지금 무척이나 분한 마음이었다.

    2군이 출현한 이곳도 이 정도의 상황인데, 1군이 몰려갔을 그곳은 상황이 어떠할까?

    ‘힘만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었더라면...’

    함께 갈 수 있었을 터인데.

    그때였다.

    “언니들! 가요!!”

    헐레벌떡 뛰어온 유혜인이 둘 사이로 파고들며 둘의 어깨를 동시에 낚아챘다.

    두 사람이 순간 당황스러워하자 유혜인이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오빠가 얼마나 질긴지 잘 아시잖아요? 분명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이에 루시아와 루시펠의 눈빛이 일순간 교차했다.

    확실히... 그는, 그들은 분명 무척 질긴 사람들이었다.

    ‘그 오빠의 동생이구나...’

    “그래요. 가요.”

    루시아와 루시펠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 * *

    “역시 엘라뉘스, 수를 남겨두고 있었군.”

    게이트를 확인한 이강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덕분에 돌아갈 수고를 할 필요는 없겠어.”

    “그렇지.”

    게이트의 등장은 소수인 그들에게 있어선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놈들도 조급해질 테지.”

    “제대로 싸우게 되려나?”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만약 발견했다면 엘라뉘스 쪽은 버리고 이곳으로 왔을 터였다.

    “가능성은 높군.”

    제넥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이강호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쿠구구궁!

    쾅!

    콰과쾅!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성대한 성화가 솟아올랐다.

    “이렇게 된 거 싸우다가 공멸이나 해버렸으면 좋겠다. 후...”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 레피아.”

    “응? 정말로? 방금 건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그래, 가능하다.”

    “이강호, 너 답지 않게 너무 희망적으로 보는 거 아니야? 싸우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지들 목숨 아까워서 결국엔 사리지 않을까?”

    “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병력을 소비하면서까지 이곳으로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놈들은 조급하다.’

    그건 그가 과거 직접 경험해봤기에, 뼈저리게 느껴봤기에 할 수 있는 확신이었다.

    모든 신물 파편이 개방 되었을 때, 파편 조각을 지니고 있지 못한 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미지라는 이름의 공포.

    ‘그러니 아이템이라도 뺏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일 거다. 그건 그냥 아이템이 아니라 무려 이 절멸의 탑에서 그린드래곤 로드가 친히 시간을 소비하는 공까지 들여가며 얻은 아이템이니까.’

    물론 이강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공멸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빈사, 아니 체력이 고갈되는 정도까지만 가더라도...

    ‘진리의 반지... 도주로가 확보된 이상 이곳에서 어떻게든 얻는다.’

    일행이 얼마까지만 해도 엘라뉘스와 벨제뷔트, 크라베스가 맞붙었던 전장을 은밀하게 지나친 찰나였다.

    “후...”

    무려 4km나 떨어진 장소.

    50m나 되는 거대수의 꼭대기.

    그 위에 앉아 있던 남자의 입에서 긴 날숨이 뿜어져 나왔다.

    남자는 곧 옆에 있던 여성을 향해 말했다.

    “로리엔. 방금 봤느냐?”

    “예, 똑똑히 봤어요.”

    “그래... 역시 놈들은 뒤로 빼지 않았군.”

    “...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연히 뒤쫓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리 말하는 엘프들의 수장, 카시우스 델 아르베이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 앉아있었다.

    그가 거대수를 내려가며 마지막으로 자그맣게 읊조렸다.

    “놈들이 나서는 때를.”

    * * *

    게이트로 향하는 길.

    파앙!

    충격파가 퍼져 흙먼지가 휘몰아치고 있는 그 속에서는 두 존재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풀잎 같은 짙은 녹색의 머리칼을 지닌 인물과 칠흑같이 어둡기 그지없는 흑색의 머리칼을 지닌 인물이.

    “데프하우어, 위대하기 그지없었던 차기 블랙 드래곤 로드여. 만약 당신이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다면 이쯤하고 그만 비키십시오.”

    “미안하지만 에르비아크, 다시 말하지만 난 더 이상 드래곤이 아니다. 난 벨제뷔트님의 수하... 난 지금 네가 말하는 자존심이...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난 여기서 너를 죽이고 벨제뷔트님께 향한다.”

    “......”

    침묵한 에르비아크의 이마에 핏대가 뿔룩 솟았다.

    처음에는 분명 그가 발목을 붙잡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되레 붙잡힌 입장이 되었다.

    ‘후... 데프하우어...’

    게다가 상대는 차기 로드로 꼽혔었던 블랙드래곤 데프하우어.

    그는 포악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지닌 블랙드래곤 중에서도 차기로 로드로 꼽혔던 만큼이나 진짜 중에 진짜였다.

    과거 그의 아래 있을 때 익히 느껴본 바가 있었지만, 적이 된 지금은 상대하면 할 수 록 차이가 더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젠장... 어떻게 해야 되지? 지금 이 상태로는 도우러 가긴커녕 되레 당할지도 모른다.’

    드래곤끼리의 싸움방식은 흔히 두 가지였는데 한 가지는 대 마법전.

    또 한 가지는 본체화 이후의 마법 육탄전이었다.

    그리고 만들어놓은 술식을 다 사용한 에르비아크는 이 두개 다 데프하우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도 차기 로드로 꼽힐 만큼 성장해 급은 분명 같아졌는데.

    “큭!”

    에르비아크가 손을 들자 데프하우어도 손을 들었다.

    양측 주위로 나타나는 무수히 많은 마법진.

    에르비아크가 먼저 공격을 감행했지만 우습게도 빠른 쪽은 데프하우어 쪽이었다.

    쾅!

    쿠쿠쿠쿵!

    에르비아크의 주위를 사정없이 난자하는 마법!!

    이번엔 한 템포 늦었지만 데프하우어쪽에 생성된 마법이 발현되려던 찰나였다.

    후웅!

    데프하우어가 기다렸다는 듯 주위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트득!

    쿠구궁!

    주위에 있던 마법진이 일그러지며 부서진다.

    ‘이건?! 디스펠!’

    에르비아크의 눈은 동그랗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디스펠은 적의 마법을 강제 취소시키는 마법으로, 차라리 방어하는 게 쉽다 할 정도로 운용하기 힘든 고도의 마법이었다.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술식을 깨부수지 못하면 디스펠이 취소되어 되려 방어하는 것보다도 좋지 않은 결과가 도출되니까.

    ‘이 나를 상대로... 디스펠을...!!’

    에르비아크도 자존심이 높은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디스펠을 당한 것은 그 자존심에 금이 갈 정도의 일이었다.

    “크으! 데프하우어!!”

    결국 에르비아크는 마법을 있는 대로 난사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데프하우어가 툭 혀를 찼다.

    “아둔하구나 에르비아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딴 건 중요치 않다!”

    쿠구구궁!

    결국 폴리모프로 한 번 작아졌던 에르비아크의 몸이 재차 거대하게 변화했다.

    [이것도 한 번 받아봐라! 데프하우어!]

    콰과과!

    그의 입에서 강력한 독성액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데프하우어도 본체로 돌아간 상태였다.

    후웁!

    콰아아아!

    마찬가지의 독성액이 데프하우어의 입에서 뿜어진다.

    독성은 언뜻 보면 서로 부딪치며 상쇄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밀린다!’

    데프하우어의 브레스가 에르비아크의 브레스를 밀어내고 있었다.

    ‘젠장... 이 정도의 차이란 말인가!’

    데프하우어는 같은 기술을 사용해 짓누르는 것으로 그의 자존심을 산산 조각내다 못해 유린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욕보인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못 이긴다... 지금의 나로서는 데프하우어에게... 절대로...’

    데프하우어가 브레스를 발사하며 서서히 다가왔다.

    같은 애쉬드브레스 사용자는 같은 브레스에 거의 타격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족이 발산한 것일 때의 이야기였다.

    그린드래곤과 블랙드래곤은 같은 애쉬드브레스를 사용하는 드래곤이었지만 성분이 달랐다.

    즉 저 브레스를 정통으로 뒤집어쓰게 된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것이었다.

    탈출하려면 블링크를 사용해야 하지만...

    [못 도망간다. 에르비아크.]

    데프하우어가 차단하고 있었다.

    ‘당한다!’

    에르비아크가 완전히 밀리려 할 때였다.

    슈우우!

    상공 저편에서 거대한 날개를 지니고 있는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데프하우어의 본체 주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되는 마법진.

    퍼벙!

    물론 데프하우어는 그것마저 막아냈지만, 날아오는 드래곤을 확인하기 무섭게 표정이 굳었다.

    그 드래곤의 색은 녹색이 아니었다.

    [아... 아...]

    자신과 같은 흑색.

    [아... 아... 카실...]

    [에르비아크, 도와주러왔다.]

    짧은 말과 함께 블랙드래곤이 재차 영창한 수많은 마법이 데프하우어를 향해 쏟아졌다.

    진리의 반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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