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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443화 (42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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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지? 에르비아크? 아니면 트레아누레스? 그것도 아니면...’

    만약 예상대로 들어맞는다면 드래곤들은 단순히 이종족들의 발을 묶기 위해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높은 격의 드래곤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생산성이 없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니까.

    -규모를 파악해보자.

    그 후 일행은 몇날 며칠을 규모파악을 위해 힘썼다.

    드래곤들이 3~4명가량 무리지어 넓게 분포해 있었기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자리 잡고 있는 주위에는 감시마법이 보다 더 강화 되어 있어 자칫 한 발짝을 잘못 디디는 순간 그대로 발각이었다.

    풀숲을 기고, 또 기고.

    일행은 마침내 이곳에 그린드래곤을 주축으로 여러 색의 드래곤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걸 알아 낼 수 있었다.

    친히 제작한 지도를 펼친 레피아가 손가락으로 특정 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게이트와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쪽 주위에만 유난히 드래곤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어.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흠... 확실히...

    이강호와 레피아를 제외하고도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게이트가 아닌 다른 장소에 많은 인원이 배치되어 있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어떡할까? 잠입해 볼까?

    레피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참고로 지금도 우린 충분히 깊이 들어오다 못해 적진 한복판에 있는 상황이야. 만약 저 내부에서 내가 걸린다면...

    -하지만 해야 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레피아.

    -하, 역시 그렇지?

    처음부터 일행의 목표는 놈들의 목적.

    지금 멈추는 건 말이 안 된다.

    ‘후...’

    레피아는 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감정을 다잡았다.

    지금까지는 동료와 쭉 함께 해올 수 있었지만, 이강호의 말에 따르자면 이곳을 경계로 위상변화 감지마법이 깔려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그리고 이 마법은 굉장히 고도의 마법으로서 생명체의 움직임 뿐 아니라 바람, 습도, 그리고 무생물의 움직임까지 파악이 가능한 마법이었다.

    즉, 자신의 그림자는 어찌어찌 운 좋게 통과가 가능해도 동료들은 진입 즉시 발각당할 위험성이 높았다.

    지금부터는 혼자 해야 되는 것이다. 홀로 모든 리스크를 껴안은 채.

    -그럼 갔다 올...

    -아니 너 혼자 보낼 생각은 없어. 레피아.

    그러나 레피아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이강호가 어깨를 붙잡아 그녀를 말렸다.

    레피아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자 순간적으로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야?

    -우리 모두 같이 간다.

    -어떻게? 걸릴 텐데.

    -세현이가 있으니까 틈을 찾는 게 가능할 거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내가 혼자 하는 게 훨씬 효율적...

    -확실히 너 혼자 하는 게 효율적이긴 하겠지. 하지만 만약 걸리면 넌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레피아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강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한 것인지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날... 생각해 주고 있는 건가.’

    만약 혼자 진입하여 발각 당할 시에는 능력이 없어 죽음을 결코 면치 못하지만, 그들이 있다면 생존 확률 자체가 달라지 게 된다.

    이강호는 힘이 있는 지금 과거를 똑같이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고마워.

    -고맙긴. 세현아, 지금부터는 네가 앞장 서 줘.

    -오케이.

    선봉이 레피아에서 유세현으로 바뀌는 것으로 탐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 * *

    “엘프? 진짜 엘프인가?”

    “가능성은 충분하네. 이전 강호 청년이 저 섬에 올라갈 수 있는 방도가 있다고 말했던 바가 있었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엘프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시작된 혼란,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 끝이 아니었다.

    “서, 서쪽 섬에도 새로운 종족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뭐?”

    보고를 받은 리더들이 우르르 끝자락으로 몰려가 상황을 살폈다.

    쿠구구궁!

    서쪽 섬에는 새까만 어둠이 몰아치고 있었다.

    섬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던 리 로버리 종족이 픽픽 죽어나가고 있는 것이 확대 만원경을 통해 망막에 맺힌다.

    종족을 싹 밀어버리고 있는 이들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괴물 같은 외관을 지닌 자들이었다.

    “마, 마족...”

    “히익!”

    거기에 더해 그 바로 위, 상공에 떠 있는 섬에 모습을 드러낸 델바람까지.

    “저, 전부 최상위 포식자들이잖아?!”

    사람들은 경악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몬스터들과 드래곤만으로도 충분히 미칠 거 같은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 위! 머리 위를 잘 살펴!

    그들은 행여나 섬과 함께 또 다른 종족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늘을 미친 듯이 살폈지만 다행히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이벨린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마족이야 지금까지 줄곧 우리를 추격해 왔으니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스승님?”

    “글쎄다. 나도 도통 짐작 가는 게 없구나. 어쩌면 그저 우연이 겹친 것일 수도...”

    아린은 그리 답하긴 했으나 그저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상위종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거의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후... 저들이 이곳으로 바로 넘어오지 못하는 게 정말 천운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 탑의 시스템에 고마움을 느끼게 될 때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나.”

    아린의 시선이 최후의 섬으로 향했다.

    섬은 마치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듯 한없이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 * *

    “젠장! 꼬여도 이렇게 꼬이다니!”

    거친 목소리가 벨제뷔트의 입에서 연신 터져 나왔다.

    벨제뷔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엘프에 델바람에 크라베스 놈까지... 후우...”

    만약 천족까지 이곳에 나타나게 되면 제6 유적에서 주역을 차지했던 이들이 다시 전부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파편에 무공까지 홀로 모든 걸 독차지하고 싶은 벨제뷔트에게 이보다 거지같은 상황은 없었다.

    “거기에 뭐? 드래곤? 드래고오오온?”

    이 어찌 분통이 터져 나오지 않을 쏘냐!

    벨제뷔트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박박 긁은 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아가레스를 쏘아봤다.

    “그래, 아가레스. 부하 놈이 뭐라고 보고해왔다고?”

    “루시펠과 흰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조사를 위해 섬에 침투했다고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배신한 아가레스를 처리하고 싶은 게 그의 마음이었지만, 아가레스가 예상했던 대로 벨제뷔트는 쓸모에 의해 아가레스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아가레스는 본디 벨제뷔트를 이용하여 성장하고, 마지막에는 숨겨둔 마왕군을 사용해 뒤통수까지 칠 생각이었다.

    다른 이종족들이 없었더라면, 아니 상위종족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었지만, 지금은 벨제뷔트처럼 그의 계획 또한 완전히 꼬인 상황이었다.

    기회를 만들어 잡지 못한다면, 자칫 이 탑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 수가 있으리라.

    “드래곤이 있는 섬에 침투라... 뚫기 위한 방도를 찾으려는 것일 가능성이 크겠군.”

    “제 부하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벨제뷔트님?”

    “흐음...”

    벨제뷔트가 머리를 다시 박박 긁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 최고의 시나리오는 섬을 건너 일단 루시펠과 흰 머리의 여자를 잡는 것이었지만, 다른 세력이 그저 넋 놓고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섬을 건너게 되면 드래곤들의 이목이 집중 될 것이기에, 자칫 병력손실만 보고 인간 측에 도움만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놈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것일 테고. 그러니...’

    “일단은 대기한다.”

    “일단은... 말씀입니까?”

    “그래, 놈들이 복귀 할 때까지. 뭔가 알아낼 게 분명하니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나에게 알려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힘껏 복창한 아가레스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벨제뷔트는 곧장 충복 데프하우어를 불러 세웠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게 있었느냐?”

    “아직까진 없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계속 잘 감시해라. 한 번 거짓말을 내뱉은 입에서는 두 번째 거짓말도 쉽게 나오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물을게 있는데. 저 섬에 있는 드래곤을 지휘하고 있는 존재... 직접 보면 바로 알 수 있나?”

    이게 본론이었다.

    데프하우어가 곧장 답했다.

    “예, 가능합니다.”

    * * *

    ‘이건...’

    나아가고 있던 유세현의 발걸음이 갑작스레 멈춰 섰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사원이 있었는데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를 한 수많은 드래곤이 곳곳을 뒤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것 때문에 경계가 삼엄 했을 거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지사.

    유세현이 슬쩍 쳐다보자 이강호가 고개를 저어 모르겠다는 표현을 했다.

    그조차도 이 사원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내가 이곳을 지나쳤을 때는 이런 사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목적을 다하면 없어지는 종류겠군.’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뭘 찾고 있는 거지? 대체 뭘...’

    아무쪼록 드래곤들이 이곳저곳 쏘다니고 있었기에 이 이상으로 접근하는 건 불가능...

    -아니 가능해. 여긴 감시마법이 없는 것 같다며?

    레피아가 이견을 내뱉었다.

    그간 감시가 삼엄해서 일까? 아니면 많은 드래곤이 쏘다니고 있어서 일까?

    유세현이 보기에 이 사원 내부만큼은 다른 곳과 다르게 마력의 흐름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내가 갔다 올게.

    -......

    -의지만 하는 건 내 성미에는 맞지 않아서 말이야. 무리는 안 할 테니 걱정 마. 게다가 지금은 밤이잖아?

    -알았다. 그럼 믿는다.

    이강호가 허락하자 레피아가 그대로 일행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이 손을 움직여 말했다.

    -레피아씨가 잘 해줘야 될 텐데.

    -걱정 마. 그녀는 자신감만큼이나 실력이 올라가니까.

    괜히 과거의 동료가 아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준비는 해야겠지.’

    어둠을 밝히고 있는 드래곤의 마법을 응시한 이강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 * *

    레피아는 사원을 뒤지고 있는 드래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드래곤이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말단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지휘자를 찾아 전모를 밝혀낸다!

    어둠에 숨어들어 쏜살같이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는 드래곤조차도 발견해내지 못했기에 레피아는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녀가 이 넓디 넓은 사원을 뒤지기 시작한지 2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님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

    불만 섞인 한 드래곤의 희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포착되었다.

    ‘님이라고? 설마?’

    그녀는 서서히 다가갔다.

    “다른 이들은 벌써 탑을 많이 올라갔을...”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귓가에 꽂힌다.

    “참아라 에르비아크. 이건 분명 우리에게 큰 이득이 될 테니.”

    이윽고 레피아의 귀에 대화가 또렷이 들려왔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는 두 명의 드래곤이었다.

    빛이 역광으로 쏘아지고 있어 색의 구별은 불가능했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각각 남성체와 여성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둘은 계속 이동하며 대화를 하고 있는 터라 레피아는 거리를 둔 채 천천히 뒤따랐다.

    “하아... 하지만 이렇게 되면 위에 있는 아이템은 녀석들의 독차지가 아닙니까.”

    “꼭 위에 좋은 게 있는 법은 아니지. 너도 많이 겪어서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긴 그렇지만 여긴 제가 홀로 도맡아 해도 충분했을 곳인데... 굳이 로드이신 엘라뉘스님께서 이곳에 남으신 게 너무 아까워서...”

    로드.

    그 말에 레피아의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로드하면 떠오르는 게 한 가지밖에 없는 탓이었다.

    ‘이런... 로드라니. 내가 알고 있는 그 로드가 맞겠지?’

    아무쪼록 이 와중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엘라뉘스라 불린 여성체 드래곤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남은 건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보거라 엘프에 델바람, 마족까지 한 번에 나타나지 않았더냐.”

    “제가 대응할 수 있습니다만...”

    “호호호, 너의 그런 호기로운 점은 언제나 보기 좋구나 에르비아크. 하지만 말이다...”

    엘라뉘스가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지금 막 도달한 부대는 네가 지금껏 경험해본 부대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정예 중에 정예라는 말씀이십니까?”

    “적어도 엘프와 마족은 그렇다. 카시우스와 아크샤를 목격했다는 보고가 방금 들어왔으니...”

    “...카시우스와 아크샤...”

    “델바람 쪽은 잘 모르겠으나 만약 엘프를 따라서 들어온 것이라면 카그네프가 이끌고 있을 확률이 크다.”

    “......”

    엘라뉘스의 말에 심각함을 깨우친 것인지 에르비아크의 말이 일순간 멎었다.

    레피아는 빨리 다음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노리고 있는 아이템이 대체 뭔데?’

    이름을 포함하여 놈들의 급이 얼마나 높은 지는 알아냈으니, 레피아는 그것만 들으면 이젠 빠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벌레가 있는 것 같군요.”

    “그렇구나.”

    둘의 고개가 동시에 홱 꺾였다.

    “?!”

    레피아가 신속하게 뒤로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중력마법에 적중당해 찌부 되었을 일이었다.

    유적을 이루고 있는 바위틈으로 다급하게 그림자를 감춘 레피아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도, 도망쳐야 되나?! 아니 무리야! 너무 깊이 들어왔어! 동료들에게 다다르기 전에 무조건 당할 거야!’

    판단을 내린 레피아는 그대로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적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본 게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저벅- 저벅-

    이윽고 엘라뉘스와 에르비아크가 레피아의 그림자가 있던 자리로 다가왔다.

    “착각... 이었을 리는 당연히 없겠지?”

    “예, 분명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일 겁니다.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겠죠.”

    에르비아크의 눈이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 범위에는 레피아가 만든 그림자도 있었기에 레피아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억지로라도 그림자를 움직이려 할 때였다.

    콰아앙!

    저편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그린드래곤 로드 엘라뉘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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