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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432화 (41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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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이이잉-

    맹렬한 추위가 살갗을 파고드는 설산지대.

    새하얀 눈 위에는 수많은 인원들이 폭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강호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지도 어느 덧 1개월 하고 보름, 이제 그들은 목적지를 거의 목전에 둔 상태였다.

    산맥하나만 넘게 된다면 아르카드 제국군이 머물고 있는 장소로 추측되는 곳에 도달하게 되는 것.

    “정지.”

    그러나 이강호는 그 산맥을 바로 넘지 않고 사람들을 멈춰 세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흐음...”

    이강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유세현이 한 말 때문이었다.

    “강호야, 이 앞에 마족들이 죽 치고 있다.”

    언더월드에서 빠져나온 이후, 유세현은 마족의 동향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의 탐지능력은 스킬이 자동적으로 적을 찾아내는 것이 아닌, 마력의 흐름을 일일이 직접 확인하여 찾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형이 나아갈 전방과 뒤쫓아올 후방, 예상되는 곳을 살필 수밖에 없었고 그 당시에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포기한줄 알았는데 설마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이 자식들 제국군이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어.”

    “우리가 산맥으로 들어가면 좋거니 하고 공격해오겠군요 선배.”

    “분명 그러겠지.”

    100%는 아니었지만 거의 99%로 확률이 무척 높았다.

    상당한 시일이 흐른 지금이라면 지원군과 합류했을 테니까.

    “이놈들, 노골적으로 우리만 노리고 있어. 제국군은 안중에도 없는 거 같아.”

    “그렇겠지. 상승 무공을 지니고 있는 건 무림인들이니.”

    “어떡할 거예요 선배? 우회해봤자, 놈들도 우리의 움직임에 맞춰서 똑같이 이동하면 좀처럼 뚫기 힘들 텐데. 아르카드 제국군이 뒤에서 도와준다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도움을 바라는 건 사치야. 군 통솔권을 아직도 이벨린이 잡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나와 많은 교류를 나눈 그녀를 황제가 마냥 그냥 두진 않았겠지. 지금은 다른 사람이 통솔권을 잡고 있다고 봐야 돼.”

    “흠, 그럼...”

    “방도는 하나 밖에 없겠군.”

    눈을 빛낸 이강호가 계속 말했다.

    “잠입한다. 레피아, 그동안은 이곳을 부탁하지.”

    “시간만 끌면서 피하고 있으면 되는 거지?”

    “응, 할 수 있겠나?”

    “흠...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고 해내야지. 그래도 이곳은 언더월드보다 훨씬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할만은 할 거야.”

    “그럼, 믿고 다녀오도록 하겠다. 아, 그리고 김주희와 아퀼라는 여기에 남아.”

    “예? 넷이서만 갔다 오려고요? 저는요?”

    이강호의 말에 김주희가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이강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의 사태는 대비해야지. 지금 이들만으로는 상황이 닥쳤을 때 대처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우리 중에서 나를 제외하고 병력을 제대로 통솔해본 사람은 너와 아퀼라 뿐이야. 유세현도 너보다는 병력 운용을 잘 못 할 거다.”

    “아...”

    “루시펠이야 천사들을 많이 이끌어봤겠지만 천사인데다가 막 도착한 그녀를 사람들이 쉽사리 믿고 따라주진 않겠지. 그러니 아무리 봐도 이 일에 적격인 건 너랑 아퀼라야.”

    “...확실히 그렇겠군요. 힝... 알겠어요.”

    수긍하긴 했지만 김주희의 얼굴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본디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이에 유세현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마디 했다.

    “김주희, 믿는다.”

    그러자 김주희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헤헤, 저만 믿으세요 선배! 제가 잘 이끌고 있겠습니닷!”

    “그래,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피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완전히 빠졌네 빠졌어.”

    “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윽고 이강호를 포함해 네 명이 자취를 감추기 무섭게, 사람들은 진형을 갖추고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 * *

    “젠장...”

    보랏빛 머리카락과 굽어진 4개의 뿔이 유난히 돋보이는 남성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대악마 벨제뷔트.

    그는 그 사건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때의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가라앉히긴 했지만, 이따금 떠올라 계속해서 그의 심경을 뒤틀리게 만들고 있었다.

    “유세현...”

    그의 이름을 읊조리는 건 이젠 입버릇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냐...”

    벨제뷔트는 유세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좀처럼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가 무능해서가 아닌, 그만큼 판도라가 너무 넓은 탓이었다.

    ‘이대로라면 수년이 지나도 못 찾는다.’

    그리고 그때쯤이라면 놈이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강해지기 전에 끝장을 내야 되는데.

    ‘후우, 진정하자. 진정해. 이런 건 내게 안 어울린다.’

    심호흡을 한 벨제뷔트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그는 일단 인간세력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건 이거뿐이었다.

    연쇄 고리마냥 이어져 놈에게 다다를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나.

    ‘큭! 젠장...’

    이 판도라에선 단서가 없다면 인간을 찾는 것마저도 큰 고충이었다.

    델바람의 카그네프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뒤를 추적해봤지만, 카그네프도 마땅히 뭔가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으, 젠장! 젠장! 젠자아아아아앙!’

    이윽고 폭발해버린 벨제뷔트의 갈 곳 잃은 분노가 또다시 주위를 무자비하게 난자했다.

    한 방 한 방이 너무도 강력해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주위 지형지물과 환경이 바뀌었다.

    “진정하십시오. 벨제뷔트님.”

    그는 데프하우어가 말리고 나서야 화를 삭힐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벨제뷔트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래, 이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는 머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방도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때였다.

    “벨제뷔트님. 드라플라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드라플라?”

    드라플라는 중급 마족으로 한때는 벨제뷔트가 알 정도로 이름을 떨쳤으나, 판도라로 들어와서는 능력이 쇠퇴하여 도태된 악마였다.

    물론, 그럼에도 강하긴 하지만 벨제뷔트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것.

    “걔가 왜?”

    때문에 본래라면 벨제뷔트와 직접 마주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벨제뷔트는 드라플라를 자신의 막사 내부로 들였다.

    “뭐냐 드라플라. 나를 직접 보길 원했다는데.”

    “아 예, 벨제뷔트님. 인간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하여 뵙기를 청했습니다.”

    “뭐라?”

    벨제뷔트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 인간이란 단어는 예민한 것이었다.

    “뭐냐, 당장 말해봐라! 만약 중요 정보를 알고 있는 거라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상관이 있음에도 보고하지 않고 직접 마주하길 원했다는 점에서 드라플라의 마음을 읽은 벨제뷔트가 곧장 그가 바라던 것을 거론하자, 드라플라는 아는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벨제뷔트님, 아가레스를 기억하십니까?”

    “아가레스? 그 거대화 특성을 지닌 악마를 말하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벨제뷔트가 단번에 아가레스의 특성에 대해 맞췄다. 그만큼 아가레스가 뛰어난 재목이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마왕이 직접 내린 임무를 수행하던 중 팔이 잘려나갔지. 그로 인해 추락하게 되어 나에게 붙었고.’

    “걔가 왜? 계속 말해봐라.”

    벨제뷔트가 명령하자, 드라플라가 곧장 입을 열었다.

    “아가레스는 우리 군세가 암흑지대에 머무르고 있던 때 인간을 조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 악마입니다.”

    “뭐?”

    “당시, 아이템 발굴에 힘쓰던 그렉크스와 그의 병력들이 전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인간의 외형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놈들이 확실합니다. 아가레스는 놈들의 힘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다른 이유를 들어 바깥으로 나가 인간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라플라가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가 과거 아가레스의 병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라플라는 보고를 위해 제6 유적 가이드와 바깥을 왕복하는 전령이었는데 그가 내부로 들어왔을 때 때마침 재수 없게 유적의 출구가 봉쇄됐다.

    당연히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었고, 그 이후에 그는 아가레스가 아닌 다른 마족의 아래에서 줄곧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겪은 수많은 위기.

    그는 현재 아가레스에 대한 충성심이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말을 들은 벨제뷔트가 눈을 번뜻 빛내며 말했다.

    “크크크, 그렇단 말이지... 드라플라. 아가레스와는 연락이 가능한 것이냐?”

    “예, 아직 전령으로서의 각인이 남아있기에 연락이 가능합니다.”

    “큭큭, 그래? 당장 연락해서 위치를 알아내라.”

    “예, 알겠습니다.”

    드라플라가 공손히 답하자, 벨제뷔트가 더없이 만족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데프하우어.”

    “예.”

    “드라플라에게 최상급 장비 5개를 지급하라. 그리고 직급을 지금보다 2단계 올려라.”

    “예, 알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벨제뷔트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드라플라가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그러나 지금 벨제뷔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오직 아가레스 뿐이었다.

    “그래...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거지...”

    드디어 단서를 잡은 그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인다.

    “크크, 크크크, 크하하하하하!”

    벨제뷔트는 이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기다려라 인간들아... 내가 간다.”

    * * *

    “하아...”

    금발이 유난이 돋보이는 미녀의 입에서 하늘이 꺼져라 한숨이 새어나왔다.

    설산지대에 자리 잡고 정착한지도 어느새 1년.

    흩날리는 눈발을 제외한 고요함이 이곳이 얼마나 평화로운지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정작 그 평화를 누리고 있는 이벨린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소속되어 있는 아르카드 제국은 과거에 범했던 우를 또다시 범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안주였다.

    성장을 포기하고 현 상태만을 유지하는...

    ‘후우, 어떻게든 설득해야 해.’

    재차 다짐한 이벨린은 황제를 뵙기를 청했다. 그녀는 엄청난 공적을 세운 인물인데다가 과거 총지휘자였기도 했기에 자격은 충분했지만, 새로 즉위 한 황제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지금까지 애써 빠르게 성장해온 것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벨린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허나...

    ‘하아...’

    답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를 갈아치운다면 해결되는 일이었으나, 황가를 향한 충성심이 대립하여 그녀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시간이 지난 이제는 황제도 쉽게 갈아치울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벨린 발디안.”

    그런데 그때 그녀의 귓가에 그리 듣고 싶었던,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이벨린은 순간적으로 환청을 들은 것인가 생각했다.

    “이벨린 발디안.”

    그러나 목소리는 또 들려왔다.

    이벨린의 고개가 그제야 들려오는 방향으로 꺾었다.

    “아, 아... 이강호...”

    “일단은 자리를 옮기지.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이강호가 손짓하기 무섭게 감격어린 얼굴이 되어있던 이벨린이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 * *

    “흐음... 상황은 레피아에게 들은 대로군.”

    대충이나마 근황을 전해들은 이강호가 턱을 짚었다.

    레피아에게 들은 대로라고 말하긴 했으나, 사실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아린이 일군 마법사들의 통솔권이 완전히 황제 측으로 넘어가 있었고, 황제의 명에 반대하는 세력은 숙청되지는 않았으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부패귀족도 다시 나타난 상황.

    그나마 영향력이 있는 자는 대마법사 아린 정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그리 크진 못했다.

    판도라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아린은 스스로가 노력하여 7서클 마스터가 된 이래로 책을 저술하여 대가없이 마법사에게 전수해 주었는데, 본래 10년도 넘게 배워야 될 것을 스킬북을 흡수하는 것으로 바로 자기거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마법사들은 전부 7서클 마법 한두 가지 정도를 지니고 있었다.

    아린처럼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사람 수가 많았기에 아린이 마음을 먹는다 해도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스탯의 차이로 대적이 가능하다해도 무사히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고심하던 이강호가 말했다.

    “이벨린, 뭔가 수를 생각해 둔 게 있나?”

    “어...”

    “네가 황궁에 얼마나 큰 충성심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겠다만 이대로라면 애써 얻어낸 이점이 사라지게 된다. 빨리 사태를 해결해야 돼. 안 그러면 내식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강호가 말하는 ‘내식’이란 게 뭘 의미하는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벨린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썬 딱히 방법이 없어요. 뭔가 거대한 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아마 꿈적도 안할 거예요.”

    “적?”

    “예, 지금 이곳은 그 정도로 나태해지고 부패했어요.”

    이벨린이 순순히 시인했다. 그만큼 그녀는 지금 상황을 답이 없다 보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은 당장 황제를 만나보겠다.”

    “지, 지금 당장요?”

    “쇠뿔도 단번에 빼야 되는 법이지.”

    이강호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카드 제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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