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421화 (40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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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들어찬, 거대 유리병이 나열되어 있는 공간.

    그곳은 그 흔한 경고등초자 켜지지 않아 깊은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기계장치가 가동되고 있는 소리뿐이라 난잡한 다른 곳과는 다르게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 고요함과 새카만 어둠은 이 장소가 지금까지 타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무척 특별한 곳이라는 걸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벅. 저벅.

    그러한 공간 내부에 미미한 발소리가 울렸다.

    기계장치의 겉면에서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 소리의 주인을 쓱 스치자 자색의 눈동자가 일순간 번뜩였다.

    그렇다.

    이 내부에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벨제뷔트였다.

    크람베르가 연합군과 쓰잘데 없는 전투를 치르고 있는 동안, 그는 데프하우어에게서 받아놓은 스크롤을 이용해 모습과 냄새를 감추고 통로를 통과하여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벨제뷔트는 쉴 새 없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공간을 훑었다.

    다른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것이기에 벨제뷔트의 마음은 지금 그리 썩 여유롭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조급하다.

    ‘어디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그런 그의 발걸음이 멈춘 장소는 40m는 될 듯한 거대한 철문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여긴가!’

    벨제뷔트는 잔뜩 반색하여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경보가 발령 되서 일까? 아니면 그가 특정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일까?

    문 옆에는 딱 봐도 제어장치로 보이는 기계가 있었지만 벨제뷔트가 뭔 짓을 해도 작동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벨제뷔트가 고온의 화염을 문을 향해 날렸다.

    치지지직-

    영문 모를 재질로 된 금속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렸다.

    그가 몸을 굽혀 구멍을 통과한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웅!

    지금까지 뭔 짓을 해도 반응이 없던 기계장치가 격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며 빛을 토해냈다.

    쿠구구궁!

    동시에 엄청난 땅울림이 발생하여 일대 전역을 뒤흔들었다.

    [1급 보안이 강제적으로 해제되었습니다.]

    [침입자 말살모드로 시퀀스를 이행합니다.]

    삑- 삐비빅-

    쿠구구구구구구구!천장에 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 선을 경계로 천장이 움직이며 개방되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돌무더기와 부수기재들이 우수수 낙하한다.

    이에 연구소 내, 외부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시선이 이곳에 쏠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벨제뷔트님이 해내신건가?”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의문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잉-

    일제히 소사된 수백 개의 빛이 길게 늘어져 하늘을 수놓았다.

    언뜻 보기에는 마냥 아름다워 보이는 빛이었지만, 내부로 진입한 이들은 이게 뭔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미, 미친!”

    이윽고 천장에 당도한 빛이 방향을 꺾어 일제히 낙하했다.

    쿠구구구궁!

    “크악!”

    “캬갸갹!”

    맞붙고 있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적의 공격을 피하기도 벅찬데 레이저까지 날아오다니!

    허나,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쿠오오오!

    레이저가 무자비하게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대기가 진동하며 먼지처럼 일어난 검은 입자가 순식간에 연구소 전체를 감쌌다.

    “저, 저건 또 뭐야?”

    마치 입자 자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악마와도 같아 보이는 형상에 모두가 당혹해하였으나, 이내 입자는 나타난 것 마냥 훅 하고 사라졌다.

    “괘, 괜찮은 건가?”

    “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모든 이들이 저마다 중얼거리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외부나 내부 애매한 곳에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 뿐, 핵심에 당도해 있던 벨제뷔트에게는 아니었다.

    ‘저건 또 뭐냐...’

    그의 앞에는 입자가 한데 뭉쳐 만들어진, 모습을 계속해서 바꾸는 괴물이 서 있었다.

    ‘문지기인가...’

    벨제뷔트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신물 파편이 잠들어있는 유적의 최후의 문지기, 딱 봐도 얼마나 셀지 감이 오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간만 봐볼까.’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벨제뷔트가 선수를 쳤다.

    그러나 역시는 역시였다.

    그가 만든 불길은 문지기가 손을 한번 휘젓자 그대로 힘을 잃고 사라졌다.

    비록 많은 마력을 소비하여 만든 상위스킬이 아닐지라도 사용자가 벨제뷔트라는 점에서 꽤나 강한 화력을 머금고 있었는데 그걸 단박에 쳐낸 것이다.

    ‘흐음... 난감하군.’

    물론 벨제뷔트는 제대로 싸우기만 한다면 절대 질 거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곳을 향하고 있는 다른 놈들이 있다는 것.

    이곳에 도착하는 자들은 엄선되고 엄선된 강자들뿐일 것이기에, 지금 전력을 발휘하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었다.

    ‘칫... 이렇게 되면...’

    그가 스크롤을 찢자, 또다시 그의 몸이 배경에 녹아 들어갔다.

    문기지는 특정영역이상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3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숨어서 지켜보고 있자 저편에서 크라베스가 등장했다.

    * * *

    “후우, 선배님.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걸까요?”

    “글쎄...”

    이강호는 김주희의 말에 그리 답하며 뻥 뚫린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는 그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게 뜻밖에 발생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조물이 통로를 관통하며 개방되어, 도약할 시 자신들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대략적으로 나마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가보자. 생각보다 멀지 않다.”

    이강호가 손목을 풀었다.

    현재 그의 마력은 필사적으로 회복에만 전념한 바 30% 정도까지 회복되어 있었다.

    “세현 선배도 그곳에 있겠죠?”

    “응. 분명 틀림없이 그럴 거다.”

    이강호는 확신했다.

    유세현의 성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도착할 쯤엔 적들이 전부 빈사상태에 빠져있으면 좋겠네요.”

    “너무 꿈이 큰 거 아니냐?”

    “꿈은 큰 게 좋잖아요.”

    김주희가 피식 웃었다.

    긴장을 푸는, 그녀 나름의 방법이었는데 이강호가 뜬금없이 반문했다.

    “넌 그런데 꿈 작잖아.”

    “예?”

    “아니, 고작 소망이 유세현의 애인이 되는 거니...”

    “아아!! 그만! 그만! 그런 거는 말로 꺼내는 거 아니에욧!”

    “큭, 알았다.”

    농담 같은 대화를 끝마치기 무섭게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 진중하게 바뀌었다.

    쿠구구궁!

    전투의 여파로 인해 구조물은 여전히 계속해서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 * *

    “역시 누가 먼저 와서 건드렸군...”

    수호자를 본 크라베스의 한 마디였다. 크라베스가 옆에 있는 루시아를 향해 연이어 말했다.

    “너와 이브 둘이서 상대해라. 난 정수를 쟁취하러 갈 터이니...”

    “......”

    이브가 바로 나서는 반면, 루시아는 앞으로 곧장 나서지 않고 망설였다.

    탐탁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본디 크라베스와 끝까지 함께할 생각 따윈 없었다.

    계약을 했다지만, 놈이 정수를 취한 뒤에도 그 계약이 계속 유지가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당히 하며,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 유세현과 조우하려 했는데 크라베스가 유세현의 움직임을 조종하여 이를 원천 봉쇄했다.

    지금에 이러서는 크라베스와의 연락도 끊겨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

    “뭐하는 거지? 따르지 않으면 계약 불이행이다.”

    망령들이 그녀 주위를 스멀스멀 맴돌았다.

    이에 루시아는 일단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래야지. 그럼 가라.”

    “......”

    파앗-

    이브와 루시아가 문지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캬아아아아!

    문지기는 거친 포효와 함께 이에 대응했다.

    슈슈슉-

    연기를 화살로 바꾸어 날리고,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물리적 타격을 가한다.

    화살은 문제가 딱히 되지 않았으나, 스텟이 얼마나 높은지 한대 후려 맞은 루시아와 이브의 몸이 그대로 붕 떠 크라베스의 옆을 나뒹굴었다.

    둘 다 방어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벨제뷔트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엄청난 스텟이군.’

    이 정도라면 오르엠, 아니 판도라에 존재하는 그 어떤 대리자도 놈에게 스탯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니군.’

    누군가가 시선을 끌고, 통과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임이 분명하다.

    이어서 크라베스가 망령들을 내뿜어 공격해봤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흐음... 어떻게든 틈만 만들어라.”

    마찬가지로 핵심을 깨달은 크라베스가 요구를 변경했다.

    “알겠습니다. 왕이시어.”

    그런데 이브가 재차 움직이려는 순간, 좌측에서 검은 구체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라베스는 공격을 감행해온 당사자를 보기 무섭게 인상을 구겼다.

    “크람베르...”

    크람베르는 렘벨크와 크루아크를 각각 좌측과 우측에 둔 채 거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크람베르가 나직이 한마디를 했다.

    “나의 추종자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복종해라.”

    “하...”

    진실을 알고 있는 크라베스로서는 헛웃음이 나올만한 그런 말이었다.

    치지직-

    시선을 교차하는 둘 사이에 스파크가 격렬하게 튄다.

    크라베스와 크람베르가 동시에 움직이며 명령을 하달했다.

    “길을 만들어라!”

    “놈보다 내가 먼저 정수를 차지한다.”

    콰아앙!

    크람베르와 크라베스의 주먹이 격돌했다.

    풍압이 서로의 머리칼을 뒤흔들었지만, 둘다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동급.

    완벽한 동급이었다.

    -그어어어!

    그때 갑자기 둘 옆에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 둘을 찌부러트릴 지세로 손뼉을 쳤다.

    “큭! 어딜!”

    렘벨크와 이브가 발차기를 하여 막아보려 했으나, 괴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쾅!

    결국 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잽싸게 움직여 범위를 벗어 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더 귀찮군.”

    크라베스는 그리 말하며 주위를 훑었다. 어느새 파리들이 꼬여있었다.

    엘프와 델바람 그리고 마족,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계속 대치를 하게 된다면?

    “크람베르. 우리끼리 통과하고 안에서 결착을 짓는 게 어떻겠나.”

    “가짜의 머리에서 나온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생각이구나.”

    “가짜는 너고...”

    크라베스가 으르릉 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크람베르와 크라베스가 동시에 손을 뻗어 망령을 내뿜었다.

    -캬아아아아!

    그리고 그사이 이브와 렘벨크, 크루아크가 달려들어 일순간 틈을 만들었다.

    ‘지금이다!’

    눈을 빛낸 둘은 동시에 문지기를 제치고 벨제뷔트가 만들어놓은 구멍을 통과해 내부로 진입했다.

    이에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아연실색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설마 둘이서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을 줄이야.

    “카시우스!”

    “알고 있다!”

    카시우스와 카그네프가 따라나서기 위해 잽싸게 앞으로 나섰지만 이미 문지기는 원래대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웅!

    쾅!

    때마침 도착한 고위마족 두 명이 기습공격을 감행해왔다.

    데프하우어를 제외한 벨제뷔트의 최측근, 아크샤와 파라간이었다. 그들은 데프하우어가 이끄는 부대가 아니라 벨제뷔트와 쭉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난장판이 되어 통로가 뚫리자 찾아온 것이다. 다른 이들도 더 있었지만 현재 그들은 이곳까지 다다르는 통로 쪽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 이상은 못 나아간다.”

    “뭐라고?”

    그 말에 카그네프와 카시우스는 더없이 심각한 표정이 됐다.

    놈들이 크람베르를 위해 자신들을 막아섰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런! 불찰이다. 벨제뷔트는 진즉 이곳에 당도해 있었던 건가?’

    ‘너무 뒤쪽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벨제뷔트는 내부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데프하우어도 포함해서 말이다.

    “후우...”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단, 그들은 그 짧은 틈을 타 한 명이 더 들어간 것까진 파악하지 못했다.

    바로 루시아!

    “크크크, 잘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입했군. 루시아!”

    유리해졌다고 생각한 크라베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반면, 루시아는 그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틈은 정말 한순간뿐이었기에 벨제뷔트와 루시아, 그리고 합류한 데프하우어가 타이밍을 잡은 건 거의 동시였다.

    그때 그녀는 벨제뷔트와 살짝 스쳤었는데 그녀의 특수한 마력과 접촉한 덕택에 술식에 오류가 생겨 광학미채가 풀리고 있었다.

    스스스스-

    모습이 드러나자 벨제뷔트가 인상을 구겼다.

    “짜증나는군.”

    유적의 마지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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