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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379화 (37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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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자의 벽을 포함한 여러 가지 스킬들로 인해 화력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불길의 위력은 여전히 강했다.

    스스스-

    결계가 부서지는 것이 아닌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꿰뚫는 불꽃.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제사장들의 표정이 이내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강호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닿아라!’

    봉인을 산산조각 부서트려라!

    그때 렘벨크의 다급한 외침이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막아라!”

    그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모든 제사장들이 밀려올 역풍을 감수하고 힘을 발산했다.

    쉬이이이-

    놈들이 생성한 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불속으로 몸을 내던지자 창의 형상이 무너지며 빠르게 불꽃이 수그러든다.

    허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후웅!

    화염 속에서 이프리트의 화염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사장들은 이에도 대응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피를 토해내며 자리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컥...”

    “바, 반동이...”

    이강호는 눈을 빛냈다.

    창과 석상과의 거리는 이제 고작 10m남짓.

    이정도의 거리라면...

    ‘해냈...’

    그가 성공했다 생각한 순간 검은 그림자가 창을 홱 낚아챘다.

    치이이익-

    스틱스였다.

    잽싸게 화염창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그가 손을 휘휘 털며 이강호를 향해 말했다.

    “아슬아슬했군.”

    “......”

    이강호는 침음을 삼켰다.

    모든 마력과 정신력을 퍼 부운 회심의 일격.

    한 번 정도는 진원진기를 운용해 무리하게나마 공격을 가할 수야 있겠지만 수많은 전장을 헤쳐 온 경험이 말해준다.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후우...후우... 끝...인가.”

    공허함이 전신을 가득 메운다.

    승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것이건만, 이 끔찍한 길을 한 번 더 헤쳐 온 것이건만.

    “쿨럭...”

    별안간 이강호의 시야에 지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유세현이 비쳤다.

    그 몸으로는 움직일 수도, 싸울 수도 없을 터인데.

    ‘넌... 아직 포기하지 않았구나.’

    순간적으로 유세현과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허나, 겹쳐진 자신의 모습은 지금의 자신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할 때의, 실력이 부족하여 지는 싸움인지 이기는 싸움인지 계산하지 못할 때의 자신.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이었는데...

    “하...”

    거기까지 생각한 이강호의 입에서 허탈한 실소가 삐져나왔다.

    그는 자신이 정체 중이라는 걸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

    분명 회귀 전에는 익히지 못했었던 태양신공과 특수특성을 얻어 강해지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는 그저 기분 탓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불은 지필수록 강해진다.

    실리를 추구하며 동료들의 희생도 불가피하게 여기는 냉철함은 전투에 있어서 수많은 이점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대가로 타오르는 열정을, 발전을 멈추게 했다.

    “의식을 잘도 망쳐줬다. 덕분에 전부 꼴이 말이 아니군.”

    마무리를 위해 스틱스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이강호는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불을 다루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불이 된다.

    [특수특성 염화(炎火)의 시크릿 스킬을 깨우치셨습니다. 화염동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후웅-

    바람과 함께 스틱스의 일수가 허공을 갈랐다.

    “무슨?”

    스틱스는 이강호가 난데없이 사라지자 진심으로 당황해했다.

    그도 그럴게 마법진이 발현되지도, 마땅한 동작을 취하지도 않았는데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큭!”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스틱스.

    이강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60m나 떨어진 불의 잔재가 남아있는 석상의 바로 밑이었다.

    “어...어떻게!”

    이강호의 전신은 주홍빛의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아니, 형체가 일렁이는 것이 불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

    이것이 화염동화.

    자신이 만들어낸 불과 동화할 수 있는 감히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그만의 능력.

    창을 집어든 이강호가 석상을 향해 팔을 내질렀다.

    * * *

    트득-

    처음에는 작은 균열에 불과했다. 제1 봉인, 제2 봉인과는 다르게 석상자체의 방어력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다.

    허나.

    “크하아아압!”

    트드득-

    균열은 빠르게 석상을 잠식해나갔다.

    스틱스가 신체능력을 극대화 시켜 이강호의 앞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

    “안돼!”

    일대를 울리는 메아리와 함께 석상이 완전히 박살났다.

    화염동화의 사용을 위해 진원진기를 개방했던 이강호가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약속을...이행해라. 크라베스.”

    [그러지.]

    자그마한 답변과 함께, 부서진 석상에서 검은빛의 입자가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본 렘벨크와 다른 제사장들은 그 여느 때보다도 아연실색했다.

    봉인의 파괴.

    줄곧 숨어있던 크라베스가 뚫어놓은 벽을 통과해 모습을 드러낸다.

    놈은 일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커다란 광소를 내뿜었다.

    “크하하하하하! 봉인은 풀렸다!”

    입자는 빠르게 크라베스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방해하기 위함인지 스틱스가 날아들지만.

    “크하하하하! 어딜 감히!”

    크라베스가 손을 휘젓자 수많은 입자가 스틱스의 몸을 찍어 누른다.

    이강호는 쓰러진 그대로 놈을 지켜봤다.

    연기로 이루어져 확실하지 않던 형체가 확실히 모습을 잡아가고 있다.

    이윽고 크라베스가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크흐흐흐. 드디어... 드디어 되찾았다. 내 육체.”

    “큭! 어떻게...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순식간에 이동한 크라베스가 낙담하고 있는 렘벨크의 앞에 섰다. 렘벨크는 크라베스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했지만 크라베스가 그걸 허락지 않았다.

    “누가 일어서라고 했지?”

    쿠웅-

    마치 암흑투기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주저앉는 렘벨크.

    크라베스는 그걸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바닥을 기는 꼴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렘벨크.”

    “크...크라베스.”

    “감히 내 뒤통수를 쳐?”

    빠악-

    거침없이 내지른 크라베스의 발차기가 안면을 가격한다.

    “넌, 지금 여기서 흡수해주겠다.”

    크라베스가 비틀거리는 놈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파앙!

    짓눌려있던 스틱스가 입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라베스는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혀를 내둘렀다.

    “흥! 그래도 꼴에 같은 직속 분체라는 건가.”

    “...네놈...”

    “덤벼라. 너 먼저 흡수해주마.”

    휘이잉-

    입자가 휘날리기 무섭게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빠악-

    “커헉.”

    스틱스는 허무할 정도로 크라베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려 루시펠을 뛰어넘는 스텟을 지니고 있는 존재임에도 말이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이강호는 이유를 단박에 눈치 챘다.

    ‘극상성...’

    사실 크라베스의 힘은 스틱스와 거의 비등비등하다. 그러니 본래라면 대등했을 것이다.

    문제는 크라베스가 스틱스의 약점에 달하는 힘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

    푹-

    전투는 크라베스가 스틱스의 심장을 꿰뚫는 것으로 빠르게 끝이 났다.

    “크흐흐흐. 잘 먹으마.”

    슈우우-

    “끄아아아악!”

    크라베스의 말과 동시에 스틱스의 몸이 연기화 되어 놈의 육신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스틱스는 바둥거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렘벨크가 치를 떨었다.

    “크윽... 저런 불량품 따위에게 스틱스가...”

    “뭐? 불량품? 스틱스가 흡수되는 걸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구나 렘벨크.”

    스틱스를 전부 흡수한 크라베스가 재차 렘벨크에게 향했다. 여유가 느껴지는 걸음걸이였다.

    더 이상 렘벨크에게 대응수단이 없다 판단한 것.

    하지만 그때.

    “크크크. 그래 크라베스. 넌 마치 자신을 뭔가 되는 것 마냥 생각하고 있지만 넌 사실 왕이 낳은 불량품에 불과하다.”

    “이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오늘 의식은 실패다. 정말 좋은 제물거리였는데 아쉽구나. 그럼 이만 물러나보도록 하마.”

    “...내가 보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나?”

    “크크, 스틱스도 흡수한 마당에 당연히 그러지 않겠지.”

    “알면서도...”

    그때, 제사장들이 일제히 크라베스를 향해 스킬을 퍼부었다.

    크라베스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들을 쳐냈다.

    “흥! 그 따위 거에 내가...”

    “당할 리가 없겠지. 허나 우리가 만약의 상황에 대해 대응책을 짜놓지 않았을 것 같나?”

    렘벨크가 양손을 쭉 뻗자 등 뒤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포탈이 나타났다.

    크라베스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이건...”

    “왕께 경배하라! 크라베스! 네놈도 왕께서 부활하시기만 하면 그 순간 끝이다!”

    휘이익-

    포탈은 움직이지 못하는 제사장들을 빠르게 빨아드렸다.

    크라베스가 몸을 날렸다.

    “내가 놓친 것 같으냐!”

    “물론이지!”

    렘벨크가 대뜸 이강호가 쓰러져있는 위치를 향해 입자를 쏘았다.

    각인을 눈치 챘기에 취한 행동.

    이강호가 크라베스와 한 계약은 동료를 포함한 자신의 안전보장이었기에 크라베스는 방향을 틀어 입자를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쉬이이-

    문이 닫힌다.

    이제 그곳에 남겨져 있는 생명체는 크라베스와 유세현 일행, 그리고 이종족들 밖에 없었다.

    * * *

    펄펄 끓는 뜨거운 머리를 식혀주는 시원함.

    눈을 뜬 유세현의 시선에 제일먼저 비친 것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었다.

    그는 밀려오는 지옥 같은 격통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김...주희.”

    “서, 선배님!”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 분명...”

    붙잡혔는데.

    그 마지막 말에 김주희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맺혔다.

    “강호 선배님께서 구해주셨어요.”

    “...강호가?”

    “예. 지금 저희는 던전 내부가 아닌 암흑지대에요.”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전부 무사해요. 루시펠까지.”

    “...그래?”

    “예. 그러니 일어나려 하지 마시고 지금은 좀 누워있으세요. 강호 선배 불러올게요.”

    김주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뒤 이강호가 유세현 곁으로 다가와 앉자 그가 말했다.

    “강호야... 고맙다.”

    이강호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이 감사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과연 자신에게 있을까?

    그래서 그는 화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

    “끄응... 미안한 말이긴 한데 좀 그렇다 야...”

    “좀 더 쉬어.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그때 어떻게 된 건지 전부 말해 줄 테니까.”

    “...그래도 괜찮아?”

    “응, 안전한 상태라 괜찮아.”

    이강호의 말에 사뭇 심각했던 유세현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이윽고 이강호가 경계를 위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유세현은 그의 말처럼 잠을 청하려 했다.

    허나.

    “큭...”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온다.

    다른 이들이 느끼기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용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유세현은 그날 억지로라도 잠이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루시펠의 결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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