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69화 (369/612)
  • 지고의 동굴(1)

    -------------- 363/606 --------------

    다음 공격을 이어나가려던 카시우스와 엘프들의 동공이 확장된다.

    루시펠이 꺼낸 아이템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직감.

    본디 이 장벽너머의 세계에서는 텔레포트 같은 이동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공간이 꼬여있어 좌표가 교란되는 탓이다.

    문제는 그런 제약을 보완하듯 각 지역에 따라 특수한 아이템들이 존재한다는 것.

    문라이트를 오랫동안 거닌 카시우스도 몇 개 갖고 있었기에 그는 확신이 가능했다.

    저걸 사용하게 둬선 안 된다. 저건 도주용 아이템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도 이 형세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자신의 속도라면.

    스르륵-

    그의 팔이 굽혀진다.

    영락없는 찌르기 자세.

    찰나의 순간에 자세를 바꾼 카시우스가 힘차게 팔을 뻗으며 일검을 내질렀다.

    ‘풍격.’

    쉬이이이-

    바람이 그 자리에 남는다.

    그 일격은 과연 바람이라는 수식어를 붙게 만들 정도의 빠르기였다.

    “하아압!”

    다른 엘프들도 사방에서 특유의 기술을 펼치며 쇄도한다.

    루시펠도 몸의 보호를 최우선시해야 될 정도의 강력한 합공.

    시간을 벌었다고 판단한 카시우스가 외쳤다.

    “제 3팀은 제압한 인간의 사지를 자른 뒤 즉시 이곳에서 이탈해라!”

    행여 모를 탈출을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후웅!

    양피지를 펼친 루시펠이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힘차게 휘저었다.

    찌익-

    두 갈래로 완전히 찢어져 떨어져 나가는 양피지.

    그걸 확인한 카시우스의 눈가가 일순간 꿈틀거렸다.

    ‘이럴 수가.’

    양피지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시간이 더 들었을 터였다. 그렇게 되었다면 루시펠은 자신의 예상처럼 필히 방어를 택했어야 했다.

    하지만 찰나 순간일지언정 카시우스는 똑똑히 보았다.

    이미 4/5가 넘도록 찢겨져있던 양피지를.

    ‘미리 찢어놓다니.’

    파앗-

    퍼져 나온 환한 빛이 루시펠 뿐만 아니라, 유세현, 이강호 붙잡혀있던 모든 일행의 몸을 감싼다.

    지켜보고 있던 로리엔의 절규가 일대를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안돼!”

    그리고 그 순간 루시펠이 카시우스를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많을 걸 알 수 있었네요.”

    쉬이익-

    목소리가 그쳤을 때, 일행은 더 이상 그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카시우스는 씁쓰름한 입맛을 다셨다.

    ‘이걸 놓치다니...’

    게다가 팀원도 한 명 사망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일개 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던 최상의 대리자였던 것을 감안 했을 때 실로 막대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냉정한 그라지만 짜증이 몰아치고 기분이 상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허나, 그것과 별개로 카시우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라지기 전에 루시펠이 내뱉었던 말,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로리엔, 추적할 수 있겠나?”

    “......”

    침묵.

    카시우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진지가 위치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 * *

    “허억...허억...”

    “괜찮으세요?”

    고통스러워하는 유세현의 곁으로 루시펠이 다가왔다. 유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축 해주려는 루시펠의 손길을 만류했다.

    “괘, 괜찮습니다.”

    그 행동에 루시펠이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손길을 거부해서가 아닌, 유세현의 바뀐 말투 때문이었다.

    유세현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는다.

    동굴에 들어온 것인지 사방이 암석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곧 동료들이 이 공터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후우...다 같이 이동한 게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안타깝지만 그들은 다른 곳에 떨어진 모양이에요.”

    “다른...장소로 말입니까?”

    “예, 세현씨와 저는 붙어있었지만, 그들과는 거리가 꽤 차이가 있었잖아요? 그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라 생각되긴 되는데...이것도 확실치는 않아서...”

    “...그렇군요.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

    “혹시 어딘지 모르시는 겁니까?”

    의문을 느낀 유세현이 묻자 루시펠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쉽게도. 그 양피지...무작위 장소로 이동시켜주는 아이템이었거든요.”

    “흐음...”

    “아, 지역을 이탈하진 못해요.”

    덧붙인 루시펠의 말에 유세현이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곳은 암흑지대의 어딘가에 있는 동굴이라는 뜻이었다.

    뭔가 위화감이 든다.

    유세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음영이 확실히 보인다.’

    때문에 모습이 보이고 재질을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암흑지대라는 걸 고려했을 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일.

    이곳은 암흑지내 내에서도 특수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곧바로 눈을 감고 마력탐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것으로 동료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베스트.

    허나.

    치직-

    알 수 없는 노이즈가 낀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마치 무엇인가가 눈앞을 가리고 있는 듯한 느낌.

    노이즈는 유세현이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점점 방해를 해왔다.

    유세현은 확신했다.

    이곳은 예사 장소가 아니라고.

    이번에는 눈가에 신경을 집중했다.

    읽는 건 꽤나 힘들었지만 보는 건 한결 나았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종의 입자가 눈동자에 맺힌다.

    ‘혹시 이게 탐지를 방해하고 있는 근원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가능성은 높았다.

    “후우...”

    호흡을 고른 유세현은 몸 상태를 확인했다. 말이 아니었지만, 과거 악몽의 신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땐 심장을 스스로 뜯어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조금 휴식하면 싸울 수 있겠군.’

    억지로 움직이려한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유세현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아주 가까운 장소에는 동료들이 없다.

    지금은 조급해하지 않고 몸을 회복시키는 편이, 좀 더 빨리 동료들에게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이리라.

    유세현이 구석에 앉자, 루시펠이 그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 * *

    동굴은 개미굴 형식의 미로였다. 걷다보면 간간히 갈림길이 나온다.

    유세현은 긴장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본래부터 방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암흑지대와 다르기에 어느 때보다도 각별히 주의를 했다.

    이윽고 그들의 앞으로 다시 등장한 갈림길.

    이번에는 세 갈래였다.

    루시펠이 묻는다.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가실 생각인가요?”

    현재 그녀는 유세현에게 선택권을 양도한 상태였다. 유세현이 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녀가 바란 일이었다.

    지금까지 행동으로 보자면, 모종의 스킬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알아내고 싶은 것이겠지만...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유세현이 망설임 없이 세 번째 중 첫 번째인 좌측 길을 택했다.

    좌측만 벌써 세 번째였다.

    미로를 빠져나가는 가장 쉬운 방법.

    하나만 골라 나아가기.

    유세현은 그것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길에 들어서자 공터가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는 텅텅 빈 공터였다.

    함정도, 몬스터도 없었다.

    유세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뭐지 이곳은?’

    판도라의 내부의 특성상, 이종족들이 점령한 곳 이외에 몬스터가 서식하지 않는 장소 따윈 없었다. 아니, 점령한 지역조차도 식물형 몬스터 정도는 존재한다.

    그런데.

    ‘왜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

    누군가가 먼저 몬스터를 처리한거라면 최소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도 없다.

    그저 어둡고, 칙칙한 게 전부였다.

    이제는 루시펠도 완전 신경이 곤두 서 사주경계를 하고 있는 상황.

    또 왼쪽 길을 선택한 유세현이 길에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스슥-

    지금까지 없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세현과 루시펠은 서로 뭐라 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벽에 몸을 바짝 밀착했다.

    어떤 놈들이지?

    본능적으로 마력을 읽으려 하자 다시 노이즈가 낀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제는 거기에 더해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

    ‘쯧.’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포켓에 넣어놨던 검을 꺼냈다.

    거울 대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상당한 실력자들...’

    그는 최대한 조심히 검신을 내밀었다.

    각도를 돌리자 잘 벼려져 반짝이는 검신이 보인다.

    상대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칼을 매개체로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양측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

    “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단번에 뛰쳐나온 김주희가 한걸음에 쪼르르 달려왔다.

    “선배님!”

    그러더니 한없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유세현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옆구리? 아직 좋진 않은데...뭐 버틸만해.”

    “그럼 심장은? 무리해서 마력재생을 사용하셨었잖아요.”

    “아, 심장? 뭐 이것도 당분간 무리만 안하면...”

    “그래요? 후우...정말 다행이다.”

    김주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가식으로 보여 거북하기 그지없었던 행위.

    이제는 전혀 거북하지 않다. 되려 진심으로 생각해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깨나 좋다.

    “세현씨...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루시아가 그녀답게 수줍게 말했다.

    이어서 아퀼라, 이강호도 한마디씩 건넸다.

    그렇게 잠시나마 재회의 기쁨을 나눈 유세현.

    그는 이 동굴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이에 이강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내보였다.

    “흠...”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법칙이 깨졌다는 건 이곳은 뭔가 다르다는 거야. 보통장소는 아닌 것 같네. 내가 앞장서도록 할게.”

    이강호가 앞으로 나섰다.

    유세현은 이걸 이강호가 이곳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갈림길이 또 등장했다.

    이강호가 입구를 훑어보더니 약간의 망설임 끝에 길을 택한다.

    정말 고민하는 게 아닌, 루시펠이 의구심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렇게 세 차례를 나아가자 루시펠이 말했다.

    “강호씨는 이곳의 길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이것과 흡사한 던전을 클리어 한 적이 있을 뿐이다. 틀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막무가내로 나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났지 않나?”

    “하긴...그도 그렇군요.”

    그렇게 두 번을 더 나아간다.

    유세현은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의식을 집중했다.

    마력탐지가 아닌 관찰.

    기분 나쁜 입자가 이전 살폈을 때보다 많아진 느낌이었다.

    ‘아니, 확실히 많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유세현의 눈에 무엇인가가 포착되었다.

    미미하게나마 표정이 굳는다.

    내색하지 않고 주위를 한번 쓱 훑은 유세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강호의 목을 베어 넘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