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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365화 (365/612)
  • 카시우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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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소리의 주인은 탑처럼 높이 솟아있는 물체 위에 거만하게 앉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랏빛 피부색이 유난히 돋보이는, 청년의 형태를 띠고 있는 생명체였는데 머리위로 돋아 있는 4개의 굽어진 뿔은 그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했다.

    유세현은 놈의 첫마디에서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마족.

    그 중에서도 루시뷀트를 배신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룬 마족의 2인자.

    “벨제뷔트. 오랜간만이군요.”

    루시펠이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자 벨제뷔트가 몸을 튕겨 일행의 앞으로 내려왔다. 벨제뷔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래 정말 오래간만이군. 독립하고는 처음 마주하는 거니.”

    “그렇죠.”

    “그때는 서로 보면 달려들기 바빴는데 말이지.”

    벨제뷔트의 시선이 차분히 일행을 훑었다.

    일행은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주변에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무방비 상태로 모습을 드러낼 리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수단이 있을 터.

    괜히 무작정 공격하면 전력만 파악당할 뿐이다.

    이내 흥미로운 표정이 된 벨제뷔트가 물었다.

    “루시펠, 이놈들 너의 수하인가?”

    “......”

    루시펠의 눈동자가 일행에게 향했다. 그녀는 현재 계약에 의해 일행의 정보를 발설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흥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유세현은 그녀의 부하임을 자처했다.

    “그렇다. 우리는 루시펠님의 직속호위병이다.”

    “호오...그렇단 말이지. 상당히 쓸 만하군. 머리의 링과 날개는 그렇다 쳐도 신성력까지 완벽하게 감출 수 있다니. 최상급 천사급도 신성력을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하던 거 같던데.”

    “......”

    “뭐, 아무튼 나를 왜 찾았지?”

    애초 별로 흥미는 크게 없었는지 답하지 않자 벨제뷔트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과연 루시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유세현은 답답함을 느꼈다.

    ‘동맹을 맺으려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루시펠은 추후 99.99%의 확률로 벨제뷔트에게 속하게 된다.

    달의 빛은 정말 먼 훗날에나 되찾을 수 있으리라.

    ‘쯧.’

    허나, 지금의 일행에게 루시펠의 행동을 막을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과연 루시펠은 목적을 털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숨길 것인가.

    이제는 모든 게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과 동맹을 맺고 싶어서요.”

    제일 듣기 싫은 답변에 유세현의 눈썹이 일순간 움찔거렸다.

    “후후, 동맹? 진심인가?”

    반면 벨제뷔트의 입꼬리는 기괴하게 찢어져 귀에 걸려있었다.

    모른 척 말하고는 있지만 최근의 사건으로 대충이나마 사태를 파악하게 된 게 분명했다.

    루시펠이 “예”라고 답하자 벨제뷔트는 즐거운 듯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천하의 루시펠과 동맹이라니! 좋군! 아주 좋아!”

    “......”

    “자!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할까? 왜 나와 동맹을 맺고 싶어 하는 거냐.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주위에 적은 없으니 안심하고 천천히 말해봐라.”

    “...힘이 필요해요.”

    “힘? 루시펠, 너의 힘은 판도라에서도 거의 최상위권일 텐데?”

    “...오르엠.”

    “응?”

    “오르엠을 죽일 힘이 필요해요. 저는 신성력을 버리고 싶어요.”

    루시펠의 눈이 일순간 반짝였다.

    이에 벨제뷔트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크크크, 그래...그래서 루시뷀트에게 가지 않고 나를 찾은 거로군. 전부 이해했다.”

    벨제뷔트가 손을 쓰윽 휘저었다.

    일행의 바로 앞으로 나타나는 원형의 통로.

    언뜻 보기에는 끝없는 무저갱처럼 보였는데, 벨제뷔트는 그걸 보며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밑으로 떨어져라. 그럼 내 본체가 있는 장소에 당도할 수 있다.”

    “......”

    “걱정마라 난 찰나의 이득 때문에 너 같은 인재가 걸어온 동맹을 걷어찰 만큼 바보는 아니니.”

    루시펠이 말없이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진실의 비도였다.

    “크크크, 그런 아이템을 지니고 있다니.”

    “맹세해보세요. 진실인지 거짓인지.”

    “...난,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이곳은 분명 내가 있는 공간과 연결되어있고 난 너를 해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계약을 하고 말했음에도 진실의 비도는 울리지 않았다.

    완벽한 진실.

    당연한일이었다.

    놈은 루시펠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 생각을 갖고 있을 테니까.

    유세현은 지금이라도 공격할까 생각했다.

    그러면 적어도 이 담화는 깨트릴 수 있었다.

    ‘...역시 일단은 막고 보는게...’

    그의 손이 검으로 살며시 이동하려던 찰나였다.

    “6개월 뒤.”

    “응?”

    “6개월 뒤에 찾아 가도록 하겠어요.”

    루시펠의 말에 영문을 모르는 벨제뷔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6개월? 애매한 시간이군. 왜지?”

    “당신을 찾는 동안 다른 일이 생겨서요.”

    비도가 울리지 않았다.

    벨제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중요한 일인가 보군. 그런데 그때도 나를 찾아 무작정 이 암흑세계를 떠돌 생각이냐? 내가 어디 있을 줄 알고”

    “훗, 그때가 되면 이젠 당신이 되려 저를 찾아 올 거라 생각합니다만.”

    “...영악하군. 받아라.”

    벨제뷔트가 자그마한 메달은 루시펠을 향해 던졌다.

    “암흑지대에서만 사용가능한 물품이다. 정보창에 보이는 대로 사용자의 위치를 나에게 전송하는 물품이지. 사용하면 정중히 마중 나가도록 하겠다.”

    “...알겠어요.”

    “크크, 꼭 오길 바란다.”

    스스슥-

    이윽고 벨제뷔트는 무저갱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은 놈이 사라지기 무섭게 루시펠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물었다.

    “왜, 따라가지 않았지? 6개월이란 시간이 짧다곤 해도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닐 텐데?”

    “...그냥요.”

    기껏 한 계약이 아까운 것일까?

    정말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아무쪼록 일행에게는 기회가 생겼기에 좋은 일.

    일행은 간간히 쳐다보는 루시펠의 시선을 무시하며 걷고 또 걸었다.

    * * *

    문라이트로 가는 길이 덜컥 막혔다. 연결해주고 있는 통로를 점령하고 있는 한 세력 덕분이었다.

    활을 등에 메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무수히 많은 하이엘프.

    마력을 완벽하게 컨트롤 하지 못하는 몇 엘프들의 마력량을 읽은 유세현은 놈들이 지금까지 상대해온 엘프들과는 비견 되지 않을 정도의 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이윈드의 주 전력.

    카시우스 델 아르베이트가 이끄는 본대와 그 휘하 팀들.

    진형을 대략적으로 확인한 이강호와 루시펠이 동시에 말했다.

    “이건 못 뚫어.”

    “뚫기 힘들겠네요.”

    일행도 공함하는 바였다.

    곧바로 이어진 대책강구.

    “시간이 걸려도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선배.”

    “저도 그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강호씨.”

    김주희, 루시아를 시작으로 의견은 빠르게 하나로 수렴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방도가 생각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일행은 어둠침침한 숲길을 끝없이 나아갔다.

    이 암흑지대는 음영이 없어, 그 괴리감 때문에 눈이 굉장히 피로해지는 세계다.

    게다가 그것들을 엄폐물로 사용하면 몸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기에 일행은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슈슉-

    지역에서 이탈하자 무엇인가가 빠르게 접근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프 수색병들이었다.

    일행은 재빨리 몸을 숨겼고, 엘프 수색병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그냥 지나쳤다.

    아니, 지나쳤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쉬이익-

    노을이 지듯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

    일행은 이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범위스킬.

    그중에서도 아린 하이워커가 주로 사용하던 5서클 화염계 마법.

    [파이어 블래스트]

    후우웅!

    불덩이들이 지상을 향해 빗발쳤다

    콰과과광!

    산산조각이 나는 일대.

    적중당한 이는 없었다. 아니 이건 애초에 일행을 노리고 쏜 것이 아니었다.

    빠르게 마력을 읽은 유세현의 고개가 500m도 훨씬 넘게 떨어져있는 시전자를 향해 정확히 돌아갔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일반 엘프.

    ‘저 엘프는...’

    유세현은 그 엘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로리엔 디엘 라비에네크.’

    로리엔이 모습이 드러난 일행을 보며 기쁜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이윽고 로리엔이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세현은 모종의 꺼림직 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도망칠 거면 왜 공격한거지? 단순한 도발?’

    당장 쫓아가서 죽여야 될 듯한 느낌.

    허나.

    “신경 쓰지 말고 벗어나자. 충분히 가능해.”

    “...알았어.”

    타다닥-

    일행을 생각하는 유세현은 감각을 뒤로하고 지역을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 * *

    “흐흐흐. 드디어 찾았다.”

    환희의 찬 로리엔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놓친 뒤 놈들을 찾아 얼마나 일대를 헤맸는가.

    부하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오직 그녀만이 근처에 다가가자 숨어있다는 것을 어렴풋 눈치 챌 수 있던 것이다.

    [집착]

    그녀의 고유특성인 집착은 일행에게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에 조원들이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공격하신 겁니까? 그냥 모른 척 한 뒤 본대에 보고했으면 보다 쉽게 쫓을 수 있었을 텐데...”

    참고로 말하자면 그들은 3군 소속으로 한 명 한 명이 퀴르가스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강자들이었다.

    카시우스가 로리엔에게 더 높은 직급을 주었기에 그녀를 존대 해주고 있는 것이다.

    로리엔 툭 말했다.

    “그래야지만 마킹을 할 수 있으니까.”

    “......”

    “아무쪼록 이일을 한시라도 빨리 카시우스님께 알려야 된다. 속도를 더 높이겠다.”

    “예!”

    타다닥-

    숲속을 가로 지르고 있는 로리엔의 속도가 더더욱 가속했다.

    본대로 돌아온 로리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시우스의 거처로 향했다.

    그때 카시우스는 한참 하이윈드의 핵심 간부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이 세계에 신물조각이 있을 걸 확신하고 조사에 착수했죠. 망령이 관계 된 것까지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전혀 진척이 없군요.”

    “그도 그럴 것이 망령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말도 하지 않고 잡아도 주는 것도 없죠. 제가 볼 때 망령들 자체에게서 뭘 알아내기보다는 이 어둠의 세계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유적을 찾아 단서를 발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크으...제 10-3부대가 놈들에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거기서 얻었을 아이템으로 좀 더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카시우스를 제외하고 일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엘프가 말했다.

    “우리의 불찰입니다. 상급부대를 보냈어야 했는데 오랜만에 발견한 던전에 정신이 팔린 바람에...”

    “...험험!”

    “...아무튼 이 건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고. 카시우스. 그 미천한 엘프계집은 얼마나 기다려야지 찾아낼 수 있답니까? 아니 이 세계에 있는 게 확실한거긴 합니까?”

    한 하이엘프의 질문에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카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능력은 제가 친히 확인했습니다. 놈들을 분명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그녀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건 수색 범위 내에 놈들이 없기 때문이죠.”

    “쯧.”

    “뭐, 어차피 이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했었지 않습니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케델로프.”

    카시우스의 말에 케델로프라는 엘프는 입맛을 쩝 다셨다.

    사실 알고 있었으나, 케델로프 3군의 총지휘자.

    일부일지언정 병력을 뺐긴 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때였다.

    로리엔이 거침없이 입구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쏠리는 이목.

    잔뜩 불편해진 얼굴이 된 한 하이엘프가 뭐라 말하기도 전 로리엔이 말했다.

    “찾아냈습니다.”

    카시우스의 눈이 번뜩 빛났다.

    “놈들을 말이냐?”

    “예.”

    여타 하이엘프들의 표정도 돌변했다.

    “호오...정말인가? 딴 놈이 아니라 어둠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놈들이 분명하겠지?”

    “예.”

    카시우스가 물었다.

    “몇 명이지?”

    “이번엔 완벽하게 파악하진 못했지만 소수인건 확실합니다. 그새 인원이 추가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5명 그대로일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카시우스가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에 엘프들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카시우스가 말투를 바꿔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하달했다.

    “사냥에 나서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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