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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346화 (346/612)
  • 두 여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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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희의 몸이 달려드는 적에 반응해 곧바로 움직였다.

    무려 200마리가 넘는 잡졸.

    한 마리 한 마리는 당연히 김주희의 상대가 될 수 없었으나, 한데 뭉친 적은 지금의 그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눈 먼 스킬에 언제 맞을지 모르는 것이다.

    만약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거미줄에 닿고, 날아오는 신경독을 뒤집어쓰게 된다면?

    그날로 끝.

    또한 몬스터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덤벼왔다.

    침입자와 같이 죽기만 하면 된다는 느낌인지라 김주희는 정말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크윽!”

    땅을 구르고, 몬스터들 사이를 이리저리 넘어 다니며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김주희.

    보이지 않던 보스가 등장한 순간은 그녀가 딱 180마리째 되는 적을 베어 넘겼을 때였다.

    “감히 우리들의 요람을 침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들을 이렇게나 많이 척살하다니...”

    보스의 수는 총 5마리였다.

    놈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각각 호위병으로 보이는 2마리의 특수한 개체들도 함께했다.

    “네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놈을! 공격해라!”

    명령을 받은 호위병이 거미줄을 타고 다가왔다.

    다리에 붙어있는 흉측한 갈퀴가 김주희의 얼굴을 노린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적과는 한 차례 차원이 다른 속도였기에 그녀로서는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쉬익-

    슥-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김주희의 목덜미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허나, 놈들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들었고, 그건 지친 김주희로서는 전부 받아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쿵!

    촤작!

    기어코 놈들의 칼귀가 연이은 전투로 너덜너덜 해진 갑주가 뚫고 김주희의 육신을 난자했다.

    “김주희!”

    운디네의 재빠른 반응이 없었더라면 아마 어떻게 됐을지.

    운디네가 이를 뿌득 갈았다.

    이렇게 될 것 같아 말린 것인데.

    운디네는 욕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미 들어온 거 이제와 길길이 날뛴다고 어떻게 될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건 김주희가 살아남는 것.

    ‘하지만 어떻게?’

    체력도 바닥, 마력도 바닥.

    진원진기를 끌어 모아 사용할 수 있다면 몰라도, 지금의 김주희의 체력과 정신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아니, 설사 어찌어찌 마력을 모아 일격을 날린다 하더라도 놈들은 보스, 그것도 무려 5마리다.

    공간 전부를 뒤덮는 스킬을 구사하지 않는 이상에야 놈들이 순순히 맞아줄 리가 없었다.

    “하아...하아...”

    또한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몸을 슬쩍 만져 본 김주희는 다친 상처부위가 서서히 마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이제는 시간이 없다.

    “죽어라!”

    보스 한마리가 후방에서 김주희를 노려왔다. 동시에 좌우, 그리고 전방에서도 적이 쇄도했다.

    김주희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회피해야 될지 전부 생각하고 움직인 건 아니다. 그랬다면 너무 늦었을 것이다.

    평소 하던 데로.

    수천 번, 수만 번을 반복하여 이제는 몸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 일련의 동작들을 재현한다.

    쉬이익-

    휘두른 다리가 전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자, 공격을 감행해온 보스와 호위병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걸 피하다니?”

    허나, 김주희의 행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이어지는 반격.

    눈을 번뜩 빛낸 김주희 손에서 이강호의 창법이 쏟아졌다.

    ‘아르카드 창술 제 2식 난무(亂舞)’

    촤자작-

    순식간에 잘려나가는 3마리의 잡졸.

    위험을 감지한 보스가 잽싸게 뒤로 내빼려고 했으나, 김주희의 창은 그것보다도 빨랐다.

    푹-

    정확히 엉덩이에 창을 찔러 넣은 김주희가 재빨리 냉기를 불어넣자, 보스는 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크아아아악!”

    지금까지 싸워온 바에 따르자면 거미의 약점은 장기들이 몰려있는 배, 즉 엉덩이부위였는데 놈의 약점도 똑같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푹-

    김주희가 이어서 잽싸게 목을 쳐내자 비틀거리던 놈은 결국 완전히 행동을 정지했다.

    이로서 한 마리는 끝.

    “......”

    남은 4마리의 보스들의 눈빛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잡졸들이 죽은 것은 그렇다 쳐도, 같은 보스가 당했다는 것에서 더 이상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상태였다.

    마력 잔여량을 확인한 김주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디네야...지금까지 수고했어.”

    이제 그녀는 운디네를 유지할 마력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운디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정령은 대개 육체를 직접 움직여 싸우지 않는다.

    할 수는 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약자가 주는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써 적을 처리하면 되는데 뭣 하러 귀찮게 움직인단 말인가.

    그러면 만약 계약자가 유지할 힘만 간신히 남은 상태라면 무조건 몸을 움직이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몸을 움직여 도움을 주는 정령도 있긴 하지만 웬만해선 마력을 사용하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다.

    정령에게 계약자는 그 이상도 이하의 존재도 아니니까.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성향이 맞는 또 다른 이와 계약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도 김주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왔었다. 그래서 마력으로만 싸울 줄 알지, 육체를 이용해 싸울 줄은 몰랐다.

    때문에 직접 전투를 치룬 건 이번이 처음.

    평범한 계약자였다면 절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친구라 생각되기에 이렇게까지 한 것이다.

    그렇기에 운디네는 후회가 됐다.

    이런 일에 미리 대비해 직접 움직여 싸워봤어야 했는데.

    그녀가 이길 수 있을까?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김주희...24시간 내로 재소환 안하면 계약 파기해 버릴 거야. 그러니깐 꼭 불러. 알았지?”

    “하아...정말 제멋대로네...”

    “......”

    “그래, 이따가 보자.”

    펑-

    운디네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김주희가 안색을 굳혔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

    약점을 알았다고 한들, 한 마리를 죽였다고 한들 아직도 보스는 4마리가 남아있었다. 거기에 호위병 등 잡졸까지 합치면 아직도 10마리가 훨씬 넘는다.

    평소에는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던 갑주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전부 일격에 죽여야 된다.’

    아무리 봐도 그 수밖에는 없었다.

    허나.

    운디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김주희도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이 쉽게 맞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는 물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의 구사가 가능해야 되는데 빙공은 단단하여 그렇지가 못하다.

    차라리 물 계열 스킬을 써보면 어떨까 했지만, 김주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령화를 하거나 운디네가 만드는 것 정도는 되야 쓸 만하지, 단순히 그녀가 구사하는 물 계열 스킬은 위력이 약했다.

    “후우...”

    절체절명의 상황.

    허나 심란해 할 시간 따위는 1초도 없었다.

    슈슈슈슈슉!

    사방에서 쇄도해오는 잡졸과 호위병, 그리고 보스몬스터.

    김주희는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당해내는 것은 역시나 무리였다.

    기어코 당한 왼손.

    “으윽...”

    손가락조차도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캬캬캬캬!”

    승기가 기울기 시작하자 언제 정색했냐는 듯 보스들의 입에서 광기가 터져 나왔다.

    김주희는 최후의 수단으로 결국 진원진기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이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건만...

    안타깝게도 모인 마력은 그렇게 많지 않아 구사할 수 있는 빙공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막다른 벽에 붙게 된다면 후방 공격이 불가능해져 보스들이 한 장소에 모일 가능성이 크기에 그녀는 벽 쪽으로 이동하며 기회를 엿봤다.

    죽을 땐 죽더라도 해볼 때까지는 한다!

    이윽고.

    “캬캬! 죽어라!”

    보스 한 마리가 다리를 치켜든 순간, 김주희의 눈이 번뜩 빛났다.

    지금이 비로소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

    [빙백신공(氷白神功), 백섬(白纖)]

    힘겹게 내뻗은 창끝에서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냉기가 물줄기처럼 뿜어져 나온다.

    빙백신장이 많은 마력을 대가로 존재 그 자체를 얼려버리는 무공이라면, 관통력과 날카로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이 백섬은 보다 적은 마력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해 상대를 쓰러뜨리는 무공이었다.

    푸부북-

    발현 된 빙공과 보스가 휘두른 칼퀴가 서로의 몸에 파고든다.

    김주희 쪽은 심장을 빗겨갔지만 보스몬스터 쪽은 머리를 당해 그대로 절명했다.

    백섬이 이어서 뒤에 있던 호위병을 꿰뚫고 또 다른 보스몬스터를 덮쳤다.

    엉덩이를 당한 보스는 제대로 당황해했다.

    “크으으윽! 어떻게 이럴 수가!”

    김주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백섬의 컨트롤에 집중했다.

    백섬은 물줄기 형식으로 된 만큼 약간, 정말 약간씩이나마 위치조종이 가능하다.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쉬쉬쉭-

    나머지 두 마리는 잽싸게 도약해서 피했고, 어느새 다가온 호위병 한 마리는 그녀의 목을 향해 갈퀴를 들이대고 있었다.

    김주희는 안타까웠다.

    빙공이 물처럼 유연함을 지니고 있었다면, 물이 빙공처럼 단단함을 지니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연하지만 단단한, 단단하지만 유연한.

    만약 그랬다면 공격과 방어를 둘 다 해낼 수 있었을 텐데.

    정녕 이 두개의 특성은 같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특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그때였다.

    파앗-

    김주희의 눈앞으로 난데없이 나타난 하나의 알림창.

    [고유특성이 개방되었습니다.]

    [특성명: 부조화]

    * * *

    콰아아아!

    창끝에서 발현되고 있던 백섬이 뚝 꺾이더니 김주희의 바로 앞에 있는 호위병을 덮쳤다.

    푸욱!

    다리와 함께 잘려나가는 머리통.

    부하의 죽음을 본 보스몬스터도, 빙공을 다룬 장본인도 너나 할 것 없이 당황해했다.

    어떻게 갑자기.

    ‘얼음결정이 꺾일 수 있는 거지?’

    ‘고유특성이 개방 된 거지?’

    아무쪼록 반응은 노련한 김주희가 더 빨랐다.

    그녀의 컨트롤에 따라 백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진짜 물줄기처럼. 너무도 자유롭게.

    허나, 그 단단함과 냉기만큼은 빙공이 틀림없었다.

    쿠구구구구-

    쾅!

    보스는 거미줄을 타며 회피했지만 냉기에 점차 느려지고 거미줄이 끊기는 바람에 백섬이 꿰뚫려 목숨을 내주어야했다.

    물론.

    푹-

    “윽!”

    김주희도 피해는 있었다.

    호위병에게 심장을 관통당한 것.

    “하아압!”

    김주희는 온 신경을 집중해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주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억...허억...허억...”

    입에서 기분 나쁜 단내가 흐른다.

    김주희는 당장이라도 놓고 싶은 의식의 끈을 억지로 붙잡았다.

    쓰러질 것 같은 육체는 창대를 이용해 버텼다.

    지금 그녀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쿠구구구!

    보상이 나타난다.

    간신히 나아가 확인한 김주희.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 * *

    이제는 완벽하게 어둠에 잠긴 시야.

    루시아는 목숨이 다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잘해봐야 남은 시간은 고작 몇 분 정도.

    마음 정리는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러움이 복 바쳐 올랐다.

    이제 막 친구를 사귀었는데.

    좋아하는 사람과도 잘되고 싶은데.

    죽고 싶지 않다. 살아서 그들과 함께 다니고 싶다.

    루시아는 점점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놓지 위해 안간힘을 썼다.

    허나.

    ‘아...’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

    끝난 것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음을.

    의식을 붙잡고 있던 손이 억지로 펴지려던 순간이었다.

    똑-

    맑은 물방울이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루시아는 순간적으로 환청을 들은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점점 환하게 밝아져가는 가는 시야.

    제일먼저 눈에 비친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김주희의 얼굴이었다.

    똑-

    흘러내린 핏물이 루시아의 얼굴을 뜨겁게 적셨다. 루시아는 자신이 들은 소리의 정체가 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김주희가 밝게 웃었다.

    “하하...봐...할 수 있다고 했지?”

    털썩-

    루시아는 쓰러지는 김주희를 다급하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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