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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328화 (328/612)
  • < 에반 그리고 운디네 >

    “이강호씨, 김주희씨 그리고...유세현씨. 모두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금발에 금안.

    그리고 유순해 보이는 인상까지.

    “에반...”

    에반 비텔스바흐.

    겉모습으로만 봤을 때는 그가 틀림없었다.

    이강호의 읊조림에 놈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린다.

    “예. 저 에반 맞습니다. 에반...에반 비텔스바흐.”

    이내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이제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죠.”

    슬픈 눈빛이었다.

    에반, 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호위병중 한 놈이 마지막 순간 스스로를 미끼로 쓰는 바람에 당했습니다. 정말 지독한 놈이었죠. 아, 세현씨는 역으로 알베타스님을 쓰러트릴 뻔 하셨죠? 간발의 차였다고 들었는데 정말 아쉬우셨겠습니다.”

    “......”

    정적이 흘렀다.

    유세현은 이강호를 바라봤다.

    애써 표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서는 적개심보다도 옛 동료가 적으로 돌변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담겨져 있었다.

    이강호가 말했다.

    “놈에게 먹힌 건가.”

    “흠...엄밀히 말하자면 먹힌 건 아닌데...뭐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 그렇게 이해하셔도 상관은 없겠네요. 아! 그래도 제 의식은 분명 존재합니다. 연기 아니에요. 물론, 명령에는 따라야 되지만요.”

    “......”

    “에이~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십쇼. 그래도 나름 전속호위병으로서 잘 대우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베타스님도 은근히 귀여운 데가 있으셔서 제법 할 맛도 나...”

    “에반.”

    “아, 예예.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언을...아무튼 이렇게라도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죄를 표한 에반이 이내 뒤로 물러섰다.

    용도가 있어서 에반을 보여준 것인 줄 알았는데...아니, 이미 이강호가 공격을 멈춘 시점에서 놈의 계략은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반이 알베타스에게 사정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에반...”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출구 전편으로 사라지는 알베타스.

    그 뒤를 쫓기 전, 잠시 망설인 에반이 질문을 해왔다.

    “저...이제 이런 걸 묻는 건 실례인 걸 압니다만...이벨린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

    이강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에반에게는 충분히 답이 된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강호씨. 그녀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반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일행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리-로버리를 향했다.

    출구를 향해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던 달퓨스와 나머지 인원들의 몸이 그대로 정지한다.

    “후우...그래도 같이 싸운 동지인데 좀 봐주면 안 되겠나?”

    유세현은 검으로 답했다.

    “젠장...”

    달퓨스의 짧은 외마디가 공간을 잔잔히 울렸다.

    * * *

    던전에 홀로 남게 된 일행.

    솟아오른 제단에서는 상자 한 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뭐가 들어 있을 런지.

    “그럼 열게요 선배!”

    김주희가 잔뜩 기대된 표정으로 힘차게 열어 재끼자, 한 개의 아이템이 그들을 반갑게 반겼다.

    아이템명: 기억의 명옥.

    등급: 에픽 [SSS Rank]

    상세정보: 특별한 기억이 담겨져 있는 명옥입니다. 특정기관에 사용이 가능하며, 사용자가 이 기억의 중추인물로 각인 됩니다.

    “응?”

    김주희를 포함한 인원들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바뀌었다.

    분명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는 아이템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게 나왔기 때문이다.

    등급은 무려 에픽 SSS랭크.

    하지만 효과는 그에 비해 무척 조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들은 이것이 신물 조각과 관련 된 아이템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쩝...”

    김주희가 입맛을 다셨다.

    유적을 클리어 할 생각이 있었다면, 미치고 펄쩍 뛸 정도로 기뻐했겠지만 그들은 이 유적을 클리어 할 생각이 없었다.

    도와줄 동료도 없었고 순수한 무력도 아직 부족했으니까.

    차라리 무지막지하게 좋은 아이템 하나가 당장에는 훨씬 나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 일단 명옥을 챙겼다.

    그들은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구울에 입혀져 있는 아이템을 판별했다.

    사실 진정한 보상은 이것이었다.

    그들은 언더월드에서 활동할 수 있던 자들이었던 만큼, 유니크 SS랭크, 레전더리 C랭크 등등 꽤나 좋은 아이템을 지니고 있었다.

    “오오! 선배님 저 이거 가져도 돼요?”

    김주희가 귀걸이를 흔들었다.

    물과 관련 된 스킬의 관통력을 높여주는 아이템으로서 무려 레전더리 C랭크의 아이템이었다.

    등급은 한 단계 낮지만 랭크는 라 아닐더와 똑같은 것.

    놈들이 차고 있던 포켓도 있는 대로 다 털었다.

    온몸에 포켓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는 없기에 포켓 속에 포켓을 넣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유세현이 마지막으로 제르펠의 포켓을 까뒤집었다.

    제일 강자였던 만큼, 대미를 장식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레전더리 D랭크, 레전더리 E랭크...하나씩 살펴본다.

    기대와는 달리 놈도 레전더리 A랭크 이상의 아이템을 지니고 있진 못했다.

    이강호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놈은 8서클 워커.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대단하나,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봤을 때뿐이지 엘프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9서클 워커, 혹은 마스터.

    그 정도는 되는 인물들이 유니크 SSS랭크, 레전더리 A랭크 이상의 아이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족의 영웅에게서 빼앗을 수도 있으니 놈은 상당히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아니, 애초에 유세현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진행했을 때부터 제르펠은 글러먹었다고 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 것이 아닌, 원래부터 강해 살아남은 자.

    그들의 최후는 대개 이런 식이다.

    “어?”

    그때 무심한 눈초리로 보석의 정보를 살핀 유세현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보석은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아이템의 명칭은 이러했다.

    [최상급 정령석]

    등급은 무려 에픽 S랭크!

    효과는 지극히 간단했다.

    정령의 계급상승.

    순간적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은 김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등급이 에픽일까요?”

    “본래의 세계에서 가져온 걸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던 거겠지.”

    이강호는 엘프들이 판도라로 떨어지기 전까지 정령과 친구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이벨린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부분이 최상급 정령을 부릴 수 있었고, 어떤 이는 정령왕까지 소환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머나먼 구석기 이야기지.”

    정령은 이전에도 거론했다시피 판도라에 초대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계약이 끊겼고,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그들은 두 번 다시 정령 소환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연결고리를 찾았다고 해도 이젠 엘프의 성격이 너무 바뀌었어.”

    엘프들이 정령과 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친화능력이 뛰어난 이유도 한몫했지만, 그 이전에 미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착하기 때문이었다.

    정령은 대체적으로 악인을 싫어하고 선인을 좋아한다.

    때문에 화끈한 성격을 좋아하는 불의 정령도 엘프만큼은 성격과 상관없이 마음을 열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허나, 그 착함은 엘프 종족의 제한된 특성이었다.

    제한이 풀린 그들의 대부분은 그 성격을 잃어버렸다.

    이젠 무작정 계약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친구였기에 더 까다롭게 느껴질 것이다.

    “와~야! 나 이거 주면 안 되냐? 응? 어차피 쓸데도 없잖아. 내가 강해지면 너도 좋은 거고.”

    운디네가 눈을 반짝였다.

    보통정령이라면 계약관계라 눈치라도 볼 텐데 운디네는 그냥 김주희의 친구였다.

    “흐음~주면 넌 뭘 해줄 건데?”

    “아니, 해주긴 뭘 해 줘! 내가 더 세져서 잘 싸워주면 그걸로 되는 거 아니냐?”

    “흐음...손해 보는 느낌인데~”

    “아니 이년이...아, 그렇게 뭘 원하면 줄게 있긴 있어.”

    “뭔데?”

    “너 좋아하는 거.”

    “그러니까 그게 뭔데?”

    “물.”

    콰르르-

    김주희의 머리위로 물벼락이 쏟아졌다.

    운디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넌 예쁜 꽃이니까~”

    김주희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운디네는 간악했다.

    “표정관리 안 해? 세현 오빠 보고 있는데?”

    “호호호호.”

    결국 환한 미소를 지는 김주희. 분명 웃고는 있지만 무척이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눈앞에 유세현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다니 정말 고맙네. 너도 그럼 정령석 먹어야지?”

    김주희가 운디네의 입을 잡더니 정령석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아오, 잠깐! 잠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파앗-

    운디네의 몸에서 광명이 터져 나왔다. 물이 모여들며 손바닥만큼 작았던 육체가 점점 부풀어 오른다.

    어느새 그들의 앞에는 성숙하게 변모한 운디네가 있었다.

    눈을 번쩍 뜬 그녀가 주위를 둘러봤다.

    평소 알던 그 운디네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무척 기품 있는 표정이었다.

    흡사 신비롭기까지 한 그녀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운디네지 뭐야...아, 그리고 너 왜 갑자기 분위기 잡아? 설마 이제 와서 컨셉 잡고 이미지 체인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

    운디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지만 김주희의 말은 정곡을 찌른 상태였다.

    이내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운디네.

    “야, 나 이름 바뀌었거든? 원래 정령은 계급으로 부르는 거야. 계급! 알겠어? 이젠 나도 상급 정령이야. 무려 상급! 와...내가 상급이라니...”

    운디네가 대뜸 자신의 신체를 살폈다.

    표정을 보니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냐?”

    “당연하지! 너 하급에서 상급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 줄은 아냐?”

    “내가 알리가 있겠냐?”

    “무려 5000년이야! 하급에서 중급까지만 해도 1000년이 넘고!”

    “...너 그럼 나이가 대체 몇이냐?”

    “아...나이? 난 태어 난지 얼마 안됐어. 스물 셋.”

    “......”

    운디네가 시선을 회피하며 말하자 김주희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운디네가 헛기침을 하더니 또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나도 이제 계급이 올라서 이름이 바뀌었어.”

    “아~그 에르토락스인가 에락토레스인가 하는 그걸로?”

    “아니, 그건 남성체고. 내 정식 명칭은 에르아나야. 그러니 앞으로는 에르아나라고 불러.”

    “흐음...운디네가 진짜 이름이 아니었구나.”

    김주희가 잠시 생각하더니 툭 말했다.

    “그럼 진짜이름은?”

    “진짜이름?”

    “응.”

    “그런 건 없어.”

    정령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정령의 왕이라는 정령왕도 엘륀이라고 불리지 이름은 없다.

    김주희가 박수를 짝 쳤다.

    “야, 그럼 이참에 이름 하나 짓는 게 어때?”

    “응? 이름?”

    “응. 계급 올라갈 때마다 명칭 바뀌는 거 귀찮지 않아? 그리고 솔직히 정도 안가고. 네 말대로라면 여성체 상급정령을 모두 에르아나라고 부른다는 건데 너는 걔네랑 엄연히 다른 생명체잖아. 아니면 혹시 성격이

    완전 똑같아? 아니면 의식이 공유 되고 있다거나?”

    “...그렇건 절대 아니지. 만약 그랬으면 내가 너랑 계약 했겠냐?”

    “봐봐, 그렇지? 그렇게 다른데 다 똑같은 명칭으로 부른다는 게 좀 웃기지 않아? 우리도 봐봐 다 각자 이름이 있잖아.”

    “......”

    운디네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직책이 올라갈 때까지 살아남아있는 계약자도 없는데다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정령은 아무도 없었기에.

    그녀는 뭔가 묘한 감정이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름.

    하나를 통틀어 나타내는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을 지칭하는 명칭.

    “어...그럼 지어 볼까?”

    “오, 잘 생각했어.”

    “그럼, 추천 좀 해봐. 예쁜 걸로!”

    “음...스투피드(stupid)나 풀리쉬(foolish), 이정도가 어때? 이거 엄청 예쁜 이름이야.”

    “호호호, 참 예쁘네. 그런데 그거 알아? 계급이 올라가면 내가 사용하는 물의 위력도 훨씬 강해진다는 거?”

    김주희의 머리위로 한 번 더 물벼락이 떨어졌다.

    그 후 둘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이름을 짓는 일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강호가 연 아공간에 아이템을 집어넣던 유세현이 툭 말했다.

    “디네.”

    “예?”

    “난 그걸로 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 본인도 익숙할 테고.”

    “으음...”

    디네는 운디네를 줄여서 부르던 말이었다.

    ‘운디네야 이리 와봐.’ ‘운디네야 뭐 좀 해줘.’ 등 뭔가 어감이 이상해서 줄여 부르기 시작한 건데 처음에는 무척 반발했지만, 결국 운디네는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야, 디네야 넌 어떻게 생각 하냐?”

    “이미 그렇게 부르면서 왜 물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

    “좋아, 그럼 이름은 확정이고 성은 내걸 따서 김씨로 하자. 붙여서 김디네!”

    “싫어. 그냥 디네라고만 불러라.”

    “쳇.”

    이강호가 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상급정령은 무척 강한 존재다.

    던전의 몬스터가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 직접 본 것은 딱 다섯 번뿐이었는데 부여되는 마력 여하에 따라 단신으로 최대 SS랭크까지 상대가 가능했다.

    이전처럼 보조로 끝나는 게 아닌 것.

    거기에 계약자와 함께 협공을 취하면 시너지는 배가 된다.

    게다가 계약자가 명령을 내려야 움직이는 일반적인 정령과 달리, 김주희와 계약한 운디네, 아니 디네는 명령 없이도 알아서 움직인다.

    김주희가 실력이 없던 시절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알아서 판단을 내려 행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은 과연 앞으로 얼마나 큰 시너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보면 알겠지.’

    일행이 던전을 빠져나가자 그곳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 에반 그리고 운디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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