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통수(2) >
잠시 환호성을 지른 이종족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본래의 관계로 돌아갈 시간.
많은 종족이 섞여있어 비록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도 서로가 서로를 경계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이 말도 안 되는 동맹을 유지시켜주고 있던 원초적인 힘이었다.
각 팀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출구를 향해 하나 둘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함정에 걸려 이곳에 들어왔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곳은 엄연한 던전이었다.
행여나 보상이 나온다면 계약에 따라 적절하게 분배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보상 같은 게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콜로세움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뛰어라!”
제르펠의 외침.
이상함을 느낀 수많은 이종족들이 본능적으로 출구로 질주했다.
“큭! 젠장! 이건 또 무슨...”
허나, 선두에 있던 제르펠 조차도 출구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재차 떨어진 쇠창살은 어느새 출구를 막고 있었다.
드르륵-
이어서 외곽으로 향하는 길이 부서져 나갔다.
퇴로가 막힌 것이다.
이 콜로세움에 완전히 갇혔다.
“크으! 젠장! 열쇠만 모으면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
하지만 그 분노는 갈 곳 없이 그저 허공을 맴돌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유세현이나 리-로버리를 제외한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종족들은 그들이 직접 조사하여 얻어낸 결론이었기 때문.
그러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무슨 일이 발생할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머리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늘을 올려다 본 인원들의 표정이 뻣뻣이 굳었다.
거대한 도마뱀이 탑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일정 높이 이하로 내려오자 놈이 지면을 향해 힘껏 몸을 던졌다.
휘이익-
쿠웅!
-캬아아아!
강렬한 바람과 거친 포효가 일대를 뒤흔든다.
도마뱀이 등에 달려있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마족의 날개, 천족의 날개 등 날개의 종류는 5가지를 넘겼는데, 놈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살려줘. 살려줘.]
놈의 입에 박혀있는 망자들이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놈의 피부 곳곳에 솟아있는 팔이 인원들을 탐하듯 손짓해왔다.
-캬아아!
콰아앙!
놈이 음파를 내뿜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빌어먹을! 뭔 놈의 속도가!”
퍽-
“크악!”
꼬리에 후려 맞은 이종족 한 명이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피부에 돋아나 있는 손부터 잘라! 저거 때문에 접근이 힘들다!”
“큭! 저 액체는 또 뭐야?”
일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놈을 죽이거나, 혹은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는 인원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화염이여!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려라! 플레임 스톤!”
“불이여! 창이 되어 적을 꿰뚫어라! 파이어 스피어!”
쾅!
콰과과광!
온갖 스킬이 난무했다.
허나, 도마뱀은 장난 아니게 강했다.
덩치와 맞지 않게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선보이던 놈은, 역상성의 스킬을 날려 인원들이 발현한 스킬을 와해시키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잡종 도마뱀이!”
서걱-
하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이 보통 자들인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으며 수많은 난항을 이겨온 자들이다.
그들은 차근차근 도마뱀을 공략해나갔다.
협공에 의해 조금씩이지만 점점 피해가 누적 된다.
-캬아아!
괴성을 내지른 도마뱀이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불룩 튀어나오는 가슴.
공격을 하던 인원들은 그것을 본 순간 경악을 터트렸다.
저 모습은 마치...
콰아아아-
강력한 독을 품고 있는 애쉬드 브레스가 그들을 덮쳤다.
“제기랄!”
모두가 다급히 회피했지만 안타깝게도 정면에 있던 6명이 사망.
콜로세움의 내부가 넓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모두가 인상을 와락 구긴 가운데, 때가 왔다고 느낀 제르펠이 가람족와 데미쿠한족의 리더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여 알아들었음을 표하는 두 리더.
제르펠이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것과 동시에 엘프, 가람, 데미쿠한의 병사들이 일제히 관중석을 향해 도약했다.
“빛이여! 내 앞을 밝혀라! 라이트!”
쏘아올려진 광명이 광활하게 퍼져나갔다.
“크으으! 이런 미친! 이게 무슨 짓이야!”
1초.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일을 마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털컥-
포켓에서 붉은구슬을 2개씩 꺼내든 3개의 종족이 각 표식이 새겨진 장소에 구슬을 끼워 넣었다.
지잉-
여태까지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떠오르며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지면에 발을 붙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순식간에 속박했다.
“제르펠!! 너 이자시이이익!!”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이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크아아악!”
그들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추출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것.
목숨을 유지시켜주는 근원, 생명력.
한데 뭉친 생명력은 곧 도마뱀을 향해 쏟아졌다.
콰아아앙-
-캬아아악!
이 강한 힘을 맞고도 도마뱀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었기에 더 이상 거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상 전투는 끝난 것이다.
“크으으...제르펠 네놈...”
지면에 쓰러져 정말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이종족들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제르펠은 이들을 비웃으며 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본래 지금쯤 땅을 기고 있어야 될 인물들이 있었다.
인간, 알베타스 그리고 리-로버리.
리-로버리족은 달퓨스가 중간에 한 번 모습을 감춘 유세현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덕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인데 그의 인상은 무척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제르펠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눈치 챘지? 너희들의 실력으로는 이쪽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을 텐데.”
“......”
“뭐, 상관없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테니.”
제르펠이 검을 들어 올렸다.
비슷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가람족과 데미쿠한 족도 공격할 기세를 갖췄다.
달퓨스가 머리를 감싸 맸다.
“젠장, 이래서는...”
기껏 살아남는데 성공했건만 승산이 없기에.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완벽한 전의상실.
그때 유세현이 툭 말했다.
“달퓨스, 놈들의 스킬을 빼앗아라.”
“...진심이냐?”이쪽은 다 합쳐봐야 25명이 넘지 않았으며 스텟차이도 명백했다.
그런데 아직 할 마음이 남아있다니.
알베타스도 의지를 내보였다.
제르펠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린 그녀가 거만하게 말했다.
“어디서 감히 그딴 망발을 내뱉는가. 이곳에서 죽는 건 너희들이다.”
“...여태까지 빌붙어 살아남은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파앗-
세 종족이 동시에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옘병할!”
달퓨스는 뭘 어떻게 해야 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틈이 없었다.
어디로 움직여도 당한다.
그때였다.
알베타스의 외침이 일대를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나에게 대항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아종들아!”
쿵-
그와 동시에 털컥 열리는 노예 대기실.
“?!”
수많은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달퓨스를 포함한 세 종족들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무슨! 분명히 저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는...”
콰과과-
종류는 알비론 같은 기본병사가 주였고, 간혹 특이개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모습을 드러내는 키메라.
암흑투기를 발산한 유세현이 내부로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여타 세 종족도 다급하게 내부로 몸을 돌렸다.
그들을 죽이고 코인을 먹기 위함이었다.
“사, 살려...크아아악!”
코인의 바다가 되는 일대.
코인은 빠르게 일행과 여타 종족의 몸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마족화를 사용한 유세현과 격돌한 제르펠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는 여태까지 유세현을 벌레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벌레 말이다.
그런데.
‘큭! 이 속박력은 대체 뭐냔 말이다!! 대체 뭐...설마?’
미간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동시에 엄습해오는 공포심.
‘아니야...그럴 리가 없다. 놈은 인간이 맞다. 그러니 분명 다른 힘일 것이다.’
그는 애써 침착해지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는 깨달을 수 있었다. 시체가 된 자들의 코인 때문에 놈의 힘이 확 증폭되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훨씬 우세하다는 것을.
그때 유세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히 웃어?”
상공에서 나타난 수십 개의 화염구가 유세현이 있는 장소를 향해 쇄도했다.
8서클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제르펠이었기에 하나하나가 위력적이면서도 날카로웠지만, 우습게도 유세현은 이보다 더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자와도 싸워봤다.
게다가 그는 1:1로 싸울 맘이 전혀 없었다.
스스스-
어둠이 주위로 흩뿌려진다.
마력재생.
동시에 마력을 부여받은 죽은 자들이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제르펠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럴 리가...그럴 리가!’
-캬아아!
보복이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구울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제르펠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팔이 잘려나간다.
연이어서 발이 떨어졌다.
지면에 쓰러진 제르펠의 얼굴은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어떻게...어떻게 이럴 수가...”
보스의 소환부터 시작하여 희생의 마법진 발동까지,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었다.
진즉 탈출 할 수 있었지만, 마법진을 작동시킬 최후의 구슬 한 개를 발견하지 못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었다.
저번 던전 탐사에서 얻은 레이더를 이용해 비로소 구슬을 찾아 계획을 실행한 것인데...
이렇게 당하다니.
“허억, 허억...네놈...대체 정체가 뭐냐...”
유세현이 말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난...레오릭과도 마주해봤다...놈의 암흑투기도 이렇진 않았어...”
게다가 현재 제르펠의 암흑속성 저항력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저항력을 뚫고 이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그때 아퀼라가 다가와 유세현에게 보고했다.
“군주시어, 적을 전부 소탕했습니다.”
아퀼라의 드러난 뿔을 확인한 제르펠이 경악했다.
“서큐버스 퀸...”
아퀼라가 제르펠을 흘끔 바라보자, 그가 물었다.
“어, 어떻게 내 눈을 속일 수 있었지?”
환희공과 본래의 특성이 한데 잘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던 일.
허나, 지금까지 일행과 함께 여행을 해온 아퀼라가 이를 발설할 리가 없었다.
대답해줄 기미가 없자 놈의 시선이 재차 유세현에게 향한다.
“네놈...진짜 정체가 뭐냐. 나를 쓰러트린 존재가 누군지는 알고 가고 싶다. 말해줘라...”
“사람.”
“말도 안...”
푹-
머리를 관통당한 제르펠은 그대로 절명했다.
양질의 코인을 흡수한 유세현은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적들의 시체만이 남아있는 전장을 살피자, 시선이 마주친 달퓨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런 괴물과 자신이 붙었었다니...
암흑투기를 빼앗으려던 달퓨스는 이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악물었다.
‘어째서?’
이리되면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만 바뀌었을 뿐 그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여전히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후후후, 역시 대단하구나.”
알베타스가 극찬했다.
유세현은 묵묵히 검을 알베타스를 향해 겨눴다.
“흐음...나 덕분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물론 아쉬운 표정과는 달리 말투에서는 여유가 잔뜩 묻어져 나오고 있었다.
“후후. 농담이다. 우리의 동맹은 방금 전 끝이 났지. 좀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전부를 당해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이곳의 보상은 그대에게 양보하도록 하마.”
날개를 펼치는 알베타스.
유세현은 암흑투기를 재전개 했지만, 알베타스는 곧장 이에 대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펼쳐지는 권능과 권능의 대결.
키메라 한 마리를 달려들게 한 순간이었다.
후웅-
알베타스의 앞으로 로브를 걸친 존재가 툭 튀어나왔다. 알비론과 함께 나타난 자였는데 정체를 알 수 없어 잔뜩 경계하고 있던 놈이었다.
서걱-
강력한 내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무심하게 일격에 두동강 나는 키메라.
동시에 후드가 벗겨지며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달려들던 이강호와 김주희의 동작이 일제히 정지했다.
알베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놈이 입을 열어 말했다.
“오래간만이군요.”
< 뒤통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