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26화 (326/612)
  • < 뒤통수(1) >

    그리 말하는 알베타스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그러나 유세현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알베타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놀라지 않는군.”

    “......”

    “아무튼 아쉽게도 놈들의 계획을 완벽히 파악하진 못했다. 보낸 부하가 당해서 말이지. 대화 내용상으로 봤을 때 놈들의 계획에는 일정 이상의 인원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 사실을 누구누구에게 알려줬지?”

    “그대에게만 말한 상태다.”

    “어째서?”

    “이유는 그대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이 사실을 모두에게 퍼트린다면 이곳의 탈출이 가능할거라 생각하는가?”

    알베타스는 조곤조곤 대답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논리.

    그렇기에 유세현은 그녀가 이 정보를 알려준 목적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대의 동족을 많이 죽였다. 그 중에는 그대가 아끼던 사람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일뿐더러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악연은 잠시 잊고 여기선 동맹을 맺

    는 게 어떻겠나?”

    유세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엘프의 수는 30명, 가람족은 25명, 데미쿠한족은 31명이었다.

    다 합치면 전체 인원수의 1/5을 넘게 차지하는 것이다.

    게다가 놈들은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강자였다.

    그런 자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키메라뿐만이 아니라, 막대한 병력이 필요하다.

    알베타스에게 부친을 잃은 루시아가 마음에 걸렸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할 때가 아니었다. 아니,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가 죽더라도 감정적이 되면 안 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죽은 이가 지드먼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

    과연 유혜인이 놈에 손에 죽었다면 자신은 여기서 동료를 위해 냉철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까?

    ‘난 쓰레기다.’

    스스로도 확신은 불가능.

    허나, 유세현과 달리 김주희와 루시아 등등 나머지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잖아요. 세현씨도 잘 참아 냈을 거라 생각해요.”

    그가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냉정하지만 따듯한 그는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못하는 인물이니까.

    그때 김주희가 끼어들며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물론. 제가 당하면 곧바로 복수해주셔야 돼요. 아셨죠?”

    덕분에 살짝 우울했던 분위기는 단번에 반전.

    유세현이 김주희를 향해 딱밤을 날렸다.

    “알긴 무슨...안 해줄 거다.”

    * * *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유세현이 제조한 키메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문제는 적도 강하다는 것.

    그리고 훨씬 많다는 것.

    길을 뚫기 전까지 키메라를 안전하게 숨겨둘 장소가 필요하다.

    “장소는 내가 제공해주도록하지.”

    이를 해결해준 이는 우습게도 알베타스였다.

    “기본병사 한 마리를 보낼 테니 따라가게 시켜라.”

    덕분에 출발 전날까지 키메라에게 피해는 없었지만 알베타스를 신뢰할 마음은 없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니까.

    정말로 군체호위병들이 이 장소에 없을까?

    세 개의 종족이 합심해서 뭘 꾸미고 있긴 한걸까?

    몬스터를 격퇴한 뒤 돌아가던 유세현은 무리에서 이탈하는 3개의 마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극심한 심력 소모를 감수하며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마력에 특별한 특징은 없었지만 위치를 외워놓은 유세현은 그들이 누구인지 대번에 파악이 가능했다.

    알베타스가 이전 말했던 엘프, 가람, 데미쿠한.

    알베타스가 내뱉은 말이 반쯤 진실이 된 순간이었다.

    아퀼라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마력을 흘렸다.

    환각의 마력.

    허나, 타인에게 환각을 거는 것이 아닌, 특정 인원에게 작용하여 존재감만 옅어지게 해주는 것이라 주위에 있던 다른 이들은 아퀼라가 스킬을 쓴지 눈치 채지 못했다.

    스스슥-

    그렇게 대열에서 벗어난 유세현.

    그가 빠르게 발걸음을 놀려 그들을 뒤따랐다.

    * * *

    어둠이 짙게 내리 깔려 있는 공간.

    그 속에서 3쌍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공략을 앞두고 리더의 명령을 받은 세 명이 엘프, 가람, 데미쿠한을 각각 대표해 만난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결실을 맺을 때다.”

    “타이밍은 한 번 뿐인 것 잘 알고 있겠지? 실수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다.”

    “신호는 뭐로 할 거지?”

    “특정 주문을 영창하겠다.”

    세부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유세현은 열심히 귀담아 들었지만 아쉽게도 뭘 노리고 있는 것인지 목적이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이미 전제조건으로 깔려져 있었기 때문인데, 놈들의 대화와 알베타스가 일러준 정보를 대조해 대략적인 추측이 가능했다.

    놈들은 동굴 내부에 있는 어떤 마법진을 발동시킬 생각이었다.

    몬스터를 약화시키는 마법진 혹은 발현자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마법진 등등을 간혹 던전에서 보긴 했으나 꿍꿍이가 있는 만큼 좋은 종류의 마법진은 결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유세현의 얼굴에 이채가 스친다.

    숨겨진 함정이나 마법진을 발견해내는 것은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유세현에게는 그나마 호재였다.

    던전을 조사해서 마법진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만 알아낸다면...

    ‘대응 할 수 있다.’

    역으로 놈들의 허를 찌르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제 모든 것은 그때 가서 어떻게 행동 하냐에 달려있었다.

    스슥-

    모종의 기척을 느낀 세 종족의 표정이 돌변했다.

    어설프게 “누구냐!”라는 말 따위는 내뱉지 않았다. 빛보다 빠른 행동으로 대처할 뿐이다.

    순식간에 겨눠지는 활시위.

    엘프가 쏜 화살이 기척이 느껴진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건만, 엘프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은 이미 근처에 접근해있었다.

    푹-

    화살이 닿자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울려 퍼진다.

    허나.

    -캬아아아!

    유세현이 내뱉은 소리는 아니었다.

    세 명의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키메라.

    “칫, 몬스터였던 건가?”

    가람족이 인상을 푹 썼다.

    엘프와 데미쿠한족도 표정을 와락 구겼다.

    웬만해선 반응하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이곳의 괴상한 생명체를 베이스로 만든 키메라는 그 정도로 혐오스럽게 생겼다.

    “종족이 많아지니 이제는 저런 것도 등장하는군.”

    “조금만 있으면 더는 보지 않아도 된다.”

    협공으로 키메라를 처치한 세 명이 행여나 뭔가 더 있을까 주위를 수색했지만 그들 본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 * *

    다양한 종족들로 이루어진 대군이 안개를 향해 진군했다.

    지역을 벗어나자 시야에 들어오는 동굴의 입구.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단단히 준비한 만큼, 사망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진입하도록 하겠다.”

    이곳을 여러 번 도전한 종족들의 말에 따르자면 동굴은 크게 3단계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1단계에서는 자연재해를 피하며, 몬스터를 죽여 나가야 했다.

    눈보라와 번개, 폭풍, 모래바람, 전부 한데 섞여 몰아쳤기에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한 명이 다음 장소로 넘어가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지는 공간.

    2단계에서는 이전 기계들의 습격이 우스울 정도의 대군이 몰아쳤다.

    휘익-

    찌익-

    아슬아슬한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한다. 한 종족 혼자서 클리어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이때 빛을 발한 자들은 바로 엘프!

    훙!

    쾅!

    전매특허인 광역 마법이 일대를 강타했다.

    대다수의 엘프들은 6서클 마스터였다.

    7서클부터는 각자의 재량차이로 올라가고 못 올라가고가 결정되는데, 올라가는 이들이 꽤 드문 것을 고려했을 때 유세현은 아린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되새기는 것이 가능했다.

    스윽-

    고개를 뒤로 젖혀 몬스터의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유세현을 향해, 측면에서 또 다른 몬스터가 공격해 들어왔다.

    물론, 대응할 수 있었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위태위태한 상황.

    서걱-

    살벌한 음색과 함께 유세현을 기습하려 했던 몬스터의 목이 뚝 떨어졌다.

    도와준 이는 이강호도 김주희도 동료 그 누구도 아닌, 엘프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 제르펠 디엘 라비에네크.

    “괜찮은가?”

    제르펠의 말에 유세현이 놀란 표정을 연기했다.

    차마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는 그런 얼굴.

    “고맙다. 빛을 졌군.”

    “지금 우리는 동맹관계지 않나. 신경 쓰지 말아라.”

    제르펠은 그 뒤 쿨하게 돌아서 몬스터를 도륙해 나갔다.

    딱 적정선을 유지한 것이다.

    유세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수한 실력과는 별개로 이런 자를 제일 주의해야만 되었다.

    어떻게 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실제로 제르펠은 우습게도 이 수많은 이종족 사이에서 꽤나 평판이 좋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든든하다는 것이다.

    마침내 3단계에 이르렀다.

    이곳을 넘어서지 못해서 그들은 현재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세현이 서 있는 머리위로 전광판이 나타나더니 그 안에 숫자가 새겨졌다.

    [180:00]

    제한시간.

    이 시간 내에 통과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던전 밖으로 내쫓겨 처음 들어온 장소로 되돌아간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는 각 인원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들이 내부로 진입한 것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였다.

    공간이 꿀렁이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변화해간다.

    어느새 그들은 콜로세움의 내부에 서 있었다.

    제일먼저 눈에 띈 것은 정중앙에 세워져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탑.

    탑 내부로 통하는 문은 유세현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던전이 끝을 고할 때 나오는 바로 그 문이었으니까.

    당장 열고 나갈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주위에는 탑처럼 높이 솟아있는 쇠창살이 촘촘히 둘러싸여 있어 다가갈 수 없었다.

    이 쇠창살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콜로세움 외곽의 미로, 그곳에 숨겨져 있는 4개의 열쇠 파편을 찾아 합치는 것뿐이다.

    ‘...라고 제르펠은 설명했었지.’

    유세현의 시선이 지면으로 향했다.

    마법진을 찾기 위해 여태까지 애써 집중해온 것이 무색하게 마법진은 바로 발아래에 있었다.

    정확히는 탑이 세워져 있는 내부.

    땅 전체가 마법진이었다.

    여태까지는 보지 못했던 광대한 크기.

    외곽으로 나가자 공간이 바뀌었다.

    어떤 때는 사막이 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빌딩이 늘어서있는 도시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 3단계.

    이곳은 기억들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장소였다. 인원들은 계속 모습을 바꾸는 미로를 헤쳐 가며 열쇠 파편 찾기에 열을 올렸지만, 유세현과 일행의 신경만은 전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아닌 척 엘프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는 유세현. 다른 종족은 동료들이 봐주고 있었다.

    놈들 중 한 놈이 모습을 숨긴 것은 장소가 바뀌기 시작한지 다섯 번이 지났을 때였다.

    정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데, 마력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알베타스가 일전에 이것을 눈치 챘다는 것이 내심 감탄스러웠다.

    혼자 갔다는 것은 안전한 장소라는 뜻일 터.

    눈에 띄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유세현은 은밀하게 빠져나와 놈을 뒤쫓았다.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놈은 작은 수정구슬을 들고 있었는데 함정을 밟지 않는 것을 보니 레이더 같았다.

    이내, 기쁜 표정이 되어 돌벽을 더듬거리기 시작하는 엘프.

    정보창을 본 유세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 * *

    “좋았어!”

    마지막 4번째 열쇠파편까지 발견되었다.

    남은 시간은 불과 24분이었다.

    철컥-

    트드드드-

    열쇠를 사용하자 쇠창살이 하늘로 솟아오르며 길이 만들어졌다.

    이 고행의 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 뒤통수(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