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던전(3) >
엘프들의 말에 따르자면 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이곳으로 떨어진 대리자들의 최악의 기억들이었다.
첫 번째 방을 생각하자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기에 일행은 겸허히 받아들였다.
사실, 현재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이 던전의 배경 같은 게 아니었다.
출구는 어디인지.
어떤 종류의 몬스터들이 더 존재하는지.
특징 혹은 특수능력이 무엇인지.
이런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다.
“정말 다양하다. 너희들을 덮친 건 기계몬스터지만 그 외에도 이 주위에는...”
엘프가 말하는 도중 몬스터가 덮쳐왔다.
여태까지 상대한 게 기계몬스터였다면 이번에는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는 몬스터였는데 외관은 티탄족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지만 크기가 많이 작고 팔과 다리가 4개나 붙어 있었다.
“칫.”
콰앙-
전투는 격렬했다.
놈들은 높은 마법저항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구력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놈들은 불리해지자 상상할 수 없는 독을 내뿜었는데, 이미 썩을 때로 썩은 땅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여러 가지 생명체의 특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끔찍한 혼종.
쿵-
상당히 버거운 상대였지만, 엘프가 강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암흑투기는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지만, 암흑투기의 본 위력을 경험하지 못한 달퓨스는 아무런 태클도 걸어오지 않았다.
유세현의 시선이 시체를 흘끔 살폈다.
키메라화 시키면 분명 무척 쓸 만할 터지만, 그는 되살려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했다.
‘되살리면 분명 시선을 끌게 된다.’
전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당장이야 좋아하겠지만, 목표를 이루고 난다면?아니, 그 전부터 분명 모두의 견제를 한 몸에 받게 될 터다.
때문에 보통이라면 되살리지 않겠지만...
문제는 달퓨스가 자신이 소생 스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사용해야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유세현은 이내 스스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리-로버리 종족이 볼 수 있는 것은 스킬과 이에 대한 상세정보뿐이었다.
숙련도는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언데드 레이즈와 키메라 제조술은 일반적인 마력으로도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암흑투기와 달리 어둠의 마력을 반드시 필요로 했다.
익혔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컨셉으로 가면 된다.
흘끔 눈치를 살핀 달퓨스가 별 대수롭지 않은 듯 물어왔다.
“소생 스킬이 있는데 살리지 않는 건가?”
떠보는 행위임이 분명한 상황.
“소생 스킬?”
평범하던 엘프들의 눈빛이 단번에 경계어린 눈빛으로 바뀌었다.
소생 스킬은 마족에게만, 그것도 이제는 마왕에게 직속으로 권능을 부여 받은 자에게만 허락된 스킬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설마 했지만 곧바로 떠볼 줄이야.
속마음과는 반대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남을 속일 때는 내뱉는 말도 주의해야 되지만 표정관리도 무척 주의해야 된다.
“그러고는 싶지만 안타깝게도 어둠의 마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말이지.”
“......”
달퓨스의 노골적인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때 간혹 눈동자를 돌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정말 멍청한 행위이기 짝이 없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부터, 김주희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이강호를 제외한 타인에게 가면을 쓴 채 대한 유세현이다.
이정도의 연기는 누워서 떡먹기 보다 쉬웠다.
“스킬은 있되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가?”
엘프의 질문에 유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마력이 필요하다.”
그 한 마디에 엘프들의 표정은 빠르게 풀려갔다.
마침 그럼 그렇지라는 느낌.
유세현은 자신을 떠본 달퓨스를 향해 되려 일격을 가했다.
“그나저나 그렇게 남의 스킬을 떠벌리고 다녀도 되는 거냐? 우리야 적대 관계였으니 그렇다 쳐도...”
유세현이 엘프를 쓱 바라보자, 엘프들의 시선이 달퓨스를 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한 표정이었는데 속으로 달퓨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다.
달퓨스가 확실히 경계 대상이 된 순간이었다.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은 달퓨스가 입술을 곱씹은 것으로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들의 은신처는 절벽에 위치해 있는 동굴이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는 듣도 보도 못한 여러 종족들이 있었는데 정말 예상치 못했던 존재도 있었다.
유세현과 루시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인간 여성의 육체와 가루다족의 날개.
그들의 앞에는 알베타스가 있었다.
날개를 제외하고는 외관이 변하지 않았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베타스도 의외였는지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유세현이 손을 살짝 들어올리기 무섭게 정말 미세하게 고개를 젓는 그녀.
서로 아는 채 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여타 종족들이 유세현 일행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호오...카벨라스...아니 엘프와 굉장히 닮았군.”
인간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는데, 여타 종족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일 수 있는 외관임에도 같은 종족이라고는 인식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종족이다. 과거 같은 대륙에 존재했지.”
“호오...그럼 빌어먹을 3종족과 같은 출신지이군...”
동굴 내부에는 총 400명이 넘는 인원들이 있었기에 대표들끼리만 간단히 통성명을 나눴다.
“카벨라스다.”
스스로를 카벨라스라고 소개한 여성체는 알베타스였다.
유세현은 모른 척 악수를 받아주었다.
“유세현이다.”
이후 일행은 엘프들에게서 상세정보를 받았다.
출구의 위치가 어디인지.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보를 받은 이상 당신들은 이제 이 던전을 빠져나갈 때까지 이 그룹에서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할 것이지만 동등한 입장이니 만큼 다른 이들과 똑같이 일
해주어야 된다.”
엘프가 말했다.
몬스터의 능력을 1이라고 가정한다면 본인 실력이 0.5가 되던 1.5가 되던 능력이 1인 몬스터를 쓰러트려야 된다는 것이었다.
유세현과 달퓨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는 다른 종족들에게 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B-14, 15, 16지역에서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린 3명이 살아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간발의 차로 늦었다.”
수색을 한 모양이었는데 결과는 꽤나 좋지 않았다.
일을 전부 마친 엘프가 일행과 리-로버리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데려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내려다본 이 세계는 정말 넓었다.
빠지면 30초 안에 절명한다는 죽음의 강이 흐르는 지역.
독 안개에 가려진 지역.
엘프가 가리킨 것은 이 모든 것을 지나쳐야 나오는 동굴이었다.
만원경을 사용해야만 보이는 이 동굴의 크기는 정말 거대했는데 범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었다.
“저곳이 아까 말 한 출구다.”
“그렇군.”
이어서 엘프는 다른 지역을 가리키며 아는 한도 내에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설명을 해나갔다.
“유세현, 달퓨스. 그대들이 이곳에 들어온 덕에 특성이 바뀐 몬스터도 필히 있을 거다. 적을 상대할 때는 이점을 항시 유의하길 바란다.”
그것에서 어이없게 객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엿보였다.
새삼 저 동굴의 난이도가 예상이 된다.
엘프는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제 36회차 공략시도까지 남은 시일은 일주일.
공략을 위한 재료 찾기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지역을 맡아 순회하며 생존자를 찾을지, 아니면 길목에 위치해 있는 몬스터의 수를 줄여놓을지.
“흠...우리는...”
유세현이 선택했다.
* * *
일행이 자처한 것은 사냥이었다.
몰래 키메라의 수를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
“콰앙.”
마수 두 마리가 유세현의 손에 의해 박살났다. 허나, 되살릴 수는 없었다. 옆에 찰싹 붙어 이를 지켜 보고 있는 이가 있었기 때문.
바로 알베타스!
‘쯧.’
알베타스의 마력을 살펴봤지만 그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감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마력이 총량까지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세현이 스킬을 사용하지 않자, 알베타스가 다가왔다.
엘프들이 위치해 있는 저편에서 싸움이 발생하자, 경계하듯 눈을 흘긴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체를 되살려라.”
“......”
유세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 되살려버리면 리-로버리가 털어놓은 덕에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
허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곳에 도착할 때마다 몬스터들은 변화하지. 최근에는 언데드도 출몰하게 되었다. 내가 저들에게 말하면 새로 등장한 몬스터인 것 마냥 속이면 되는 것이다. 그대라면 당연
히 떠올릴 줄 알았는데...혹시 나 때문인가?”
유세현은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쥐어 맞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렇게 말한다면 의심은 받게 된다 한들 무사히 넘어갈 수는 있다.
그리고 의심을 받게 된다한들 아예 제조하지 않는 것보다는 제조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들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썩은 동아줄로 이어져 있는 것이었으니까.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지?”
“후후, 당장 말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군. 해가 떨어진 이후 엘프족, 가람족, 데미쿠한족을 피해 산 정상으로 오거라.”
“......”
쉬익-
알베타스는 순식간에 유세현의 곁에서 떨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몬스터를 격퇴해나가는 알베타스.
유세현이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틈을 노려 죽은 괴물 한 마리를 키메라화 시켰다.
* * *
후우웅-
산정상이라 그런지 상상할 수 없는 강풍이 불었다.
알베타스가 마력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은 휘하들도 숨길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기에 유세현은 접근에 주의하고 또 주의했다.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도착해있던 알베타스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왔는가. 유세현.”
“...이젠 말해봐라. 이유가 뭐지?”
단도직입적인 말에 알베타스가 쓴 웃음을 머금었다.
“후후, 정말 냉철한 남자로군...뭐, 되었다. 이게 그대의 매력이니. 본론을 말하기 전 다시 한 번 묻지. 내 것이 될 생각이 없나? 수하가 아닌 반려로서 말이다. 그대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본론이나 말해라.”
확실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자, 아쉬움의 입맛을 쩝 다신 알베타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내가 피해서 올라오라고 한 3종족은 기억하겠지.”
“...물론이다.”
“그놈들 때문이다. 그놈들은 함정에 걸려 이 던전에 들어온 게 아니다. 정식 절차를 밟아서 들어왔지.”
알베타스도 이 던전에 떨어진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판도라내부에 들어온 것 자체가 얼마 안 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막대한 병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알베타스도 이곳은 힘든 장소였다.
어찌어찌 뚫고 여기까지 도달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병력을 잃은 상태.
호위병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함정에 빠진 것이기에, 그녀는 생존을 위해 한 마리, 한 마리 직접 세밀히 컨트롤하여 정보를 모았다고 한다.
그와 중 데미쿠한족을 만나 합류하게 된 것이고.
그 이후로도 협력하며 알베타스는 계속 정보를 수집해나갔고 마침내 알게 되었다.
엘프, 가람, 데미쿠한 이 3종족 만큼은 이곳에 의도적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거지?”
“내가 그들과 합류한 이후 일주일 간격으로 지금까지 총 4번의 공략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 3종족의 인원들 중 1~2명이 은밀하게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매번 적이 리셋되는 데다가 지형이 바뀌기에 혼자 다니는 것은 죽겠다는 것과도 다름이 없는 행동.
이상하게 여긴 알베타스는 은신에 특화된 특이개체를 움직여 뒤를 쫓게 했다.
그리고 알아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을.
“놈들은 여기에 있는 자들을 전부 제물로 쓸 생각이다. 이 장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닌 클리어를 위하여.”
< 기억의 던전(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