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23화 (323/612)

< 기억의 던전(1) >

스스스-

그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공간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어둠 뿐.

이강호가 돌아가기 위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런 미로 형식의 공간은 일단 여러 곳을 들락날락 거리며 어떤 법칙에 의거하여, 어떤 공간들로 구성되어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제일 기본이기에 취한 행동이었지만.

“쯧.”

안타깝게도 문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없어진 게 아니야. 처음부터 없었어.”

이는 지나쳐온 길이 일방통행이라는 뜻이었다.

즉, 나가는 장소는 따로 존재한다.

“나아가야겠군...”

“그래야 될 거 같아. 일렬로 정렬하자. 강호야 네가 선두를 맡아줘, 내가 후미를 맡을게.”

일렬 대열은 소수 인원이 함정과 기습에 가장 대비하기 좋은 형태였다.

앞으로 서서히 전진해가는 일행.

1분쯤 나아가자 언제까지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둠이 거쳤다.

잠깐 제자리에 멈춰선 일행의 눈이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곳은 현대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공간이었다.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한 냉장고와 조리를 위한 가스레인지.

비록 환기가 되지 않아 공기가 무척 퀴퀴하고, 구석 한편에는 곰팡이가 피어있는 등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무척 좋지 못했지만 그곳은 분명 집안 내부였다.

“아...”

김주희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사이 이강호와 유세현은 의견을 나눴다.

“세현아 뭔가 좀 느껴지냐?”

“아니, 전혀.”

일단 아퀼라의 제 3눈을 이용해 집안 전체를 살폈다.

집이 무척 좁은 덕에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집안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개판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술병.

좀처럼 성한 곳이 없는 가구.

던전이라면 뭔가 있어야 하건만 몬스터도, 사람도, 함정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유세현은 곧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뭐야? 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이런 곳에...”

쿵쿵쿵-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콰앙-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봤으나 무용지물.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완전히 갇힌 상태였다.

10분, 20분이 흘러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술병을 대충 발로 치운 유세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라리 몬스터가 보고 싶다. 강호야.”

“동감이야. 이런 건 또 처음 경험해보네.”

이강호도 바닥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될지 궁리하는 일행. 하지만 그 중에서는 눈치를 보고 있는 자도 있었다.

김주희.

그녀만큼은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선배님...저 사실...”

무엇인가 다짐한 그녀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타다닥-

바닥에 깔려있는 장판이 울렸다. 집 안에서 누군가가 뛴 소리였다.

확실한 인기척.

“야, 강호야!”

이강호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하나밖에 없는 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유세현도 루베르크를 뽑고는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런 그들의 눈에 비치는 광경.

방 안에는 술병을 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홍조가 띄고, 눈이 풀려 있는 것이 만취상태였는데 그 남자는 일행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쾅.

우악스러운 남성의 손에 비좁은 방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장롱의 문이 덜컥 열리자, 덜덜 떨고 있는 여자아이가 모습이 드러났다.

방금 전의 울림은 이 여자아이가 만든 것이 분명했다.

“야! 니 에미년은 어디가고 너밖에 없어? 응?”

휘익-

퍽.

커다란 손이 대뜸 여자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폭행.

“아빠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이는 맞으면서도 그저 싹싹 빌었다.

“꺄아악!”

이내 참다못한 여자아이가 비명을 지르자 성인 남성은 딸로 보이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남자 자체가 일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일행은 일단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자아이와 유세현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남자의 눈도 유세현을 향해 돌아갔다.

옆모습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너희는 뭐야? 뭔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있어? 그 빌어먹을 년의 숨겨둔 애인이라도 되는 거냐!”

뭘 해볼 틈도 없이 아이를 던진 남자가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투의 시작이란 것을 깨달은 일행이 곧장 몸을 날렸다.

* * *

남자는 강했다.

겉모습은 술주정뱅이였지만 움직임은 무림고수 못지않았다.

“캬아아! 이놈들이!”

궁지에 몰린 놈이 몸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그 형태변화는 하나의 모습에 국한되지 않았다.

어떨 때는 거인처럼 거대해졌으며, 어떤 때는 지옥파수견과 같은 광견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여러 마리로 분열하기까지.

푹-

가까스로 놈을 죽인 유세현이 녹초가 되어 땅에 털썩 드러누웠다.

“허억...허억...”

마족화, 마력재생, 암흑투기, 천마광룡참까지 모든 것을 사용했음에도 힘겨운 전투였다.

“야...이거 난이도가 미쳤는데?”

“맞춤형 던전인 모양이야. 완전히 잘못 걸렸어.”

스스스-

유세현은 코인을 흡수했다.

코인의 순도는 제법 높았지만, 난이도에 비해 낮았을 뿐더러 보상이 없었기에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환경이 바뀐다.

이곳을 클리어 한 것인가 생각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쒯...”

이번에 그들은 놀이터에 서 있었다.

방금 전에도 봤던 소녀가 보인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오래가진 못했다.

일행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소녀의 아버지가 다가와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었는데 남자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차마 아이가 듣지 못할 욕들을 쏟아냈다.

소녀의 친구들이 도망치는 것은 당연지사.

“젠장...마력도 얼마 없는데...”

폐쇄공간이라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일행은 곧바로 전투준비를 했다.

허나, 그들이 예상하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가래침을 퉷 뱄더니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 것.

소녀가 홀로 쓸쓸이 그네를 탔다.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서 이강호가 다가가 말을 걸어봤지만 소녀는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일정범위를 벗어날 수 없던 일행은 막연히 그것을 바라봤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침내 완전히 떨어진 해.

눈을 깜박였을 땐 그들은 어느새 처음 장소였던 집안 내부로 다시 이동되어 있었다.

* * *

“이런 미친.”

콰앙!

전투가 발생했다.

적은 소녀의 아버지로 이전과 똑같은 싸움이었다.

이번에도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일행.

허나, 놈은 코인을 주지 않았다.

“젠장...이거 설마...”

놀이터로 이동되었다.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순환공간이군.”

“으...설마 설마 했는데...파해할 방도는?”

“이 순환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원인을 제거해야 돼. 저 여자애가 핵심 키 인거는 확실한데...”

재차 소녀에게 접근한 이강호가 바로 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역시 반응이 없다.

“흩어져서 단서를 찾아보자. 분명히 있을 거야.”

“오케이.”

일행은 시간을 정한 뒤 동네를 둘러보기 위해 흩어졌다.

-야옹.

행여나 단서를 놓칠까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걷는 유세현의 귓가로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담장 위를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잽싸게 반대편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후우...”

동네는 실로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한 번도 온 적이 없기에 길은 무척 낯설었는데, 왠지 모르게 한번 쯤 거닌 적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코너를 돌자 구멍가게가 보였다.

그곳에는 김주희가 서 있었다.

“뭐 발견한거 있어?”

별 생각 없이 말을 걸자 깜짝 놀랬는지 김주희가 어깨를 들썩였다. 기척을 감추지 않았기에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아...그냥 좀 보고 있었어요. 혹시 뭔가 있나.”

“야, 그럼 안으로 들어가 봐야지. 왜 밖에 있어?”

유세현이 내부로 들어가자, 김주희도 따라 들어왔다.

구멍가게답게, 맨 앞에는 여러 가지 불량식품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김주희는 그것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야...김주희 너 뭔가 좀 이상한데?”

다분히 느낀 바를 지적하자 김주희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다짐을 하듯 크게 숨을 들이쉬는 그녀.

“선배님. 이곳이 어딘지 아세요?”

“응?”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김주희가 말한 것에 대한 답은 알고 있었다.

도로에 걸려있는 표지판을 봤으니까.

김주희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저었다. 분명 장난치듯 웃고는 있는데 뭔가 슬퍼보이는 표정이었다.

“선배님 저 어렸을 때는 어떻게 생겼었을 거 같아요?”

“응? 어렸을 때? 그건 갑자기 왜...”

유세현의 말이 뚝 끊겼다.

소녀의 얼굴과 김주희의 얼굴이 오버랩 된 것이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갔더니!

“야, 김주희 너...”

“맞아요, 선배. 여긴 제가 살던 동네에요. 그 맞던 여자아이가...바로 저에요...”

* * *

김주희는 과거의 일을 아퀼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싸웠을 때 극복해냈었다.

하지만 극복한 것과 치부를 보여 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처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클리어가 가능할 줄 알아서...늦게 말해 죄송해요.”

“아니야, 됐어.”

유세현도 줄곧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동료를 위하는 성품으로 보나,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것으로 보나 그녀의 원판은 좋았다.

그런데 왜 과거에는 남자를 이용해먹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소모품처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일까.

‘환경 때문이었던 건가.’

아무쪼록 김주희는 유세현에게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나머지 일행에게도 털어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변하는 것은 없었다.

“너희는 뭐야? 뭔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있어? 그 빌어먹을 년의 숨겨둔 애인이라도 되는 거냐!”

콰앙!

전투가 반복된다.

벌써 4번째로, 놈은 코인도 주지 않는 주제에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몇 번 반복된다면, 놈이 일행을 웃돌게 될 터다.

그 안에 어떻게든 탈출을 해야만 한다.

전투가 끝난 뒤 놀이터로 이동되기 무섭게 이강호가 말했다.

“네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상이야. 분명 네 안에 답이 있을 거야. 잘 생각해봐.”

김주희가 머리를 감싸 맸다.

하지만 10년도 훨씬 지난 기억이었다.

큰 무엇인가가 있다면 모를까 김주희에게 저런 것은 일상이었기에 좀처럼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뭔가가 있을 거야.”

“으...정말 기억이 안나요. 그냥 저대로 계속 그네나 타다가...”

말 꼬리를 흘린 김주희의 눈이 번쩍 떠졌다.

무엇인가가 떠오른 것.

그 무엇인가는 분명 엄청 좋은 일이었다. 허나, 안개가 낀 것처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뭐지? 그게? 아 맞아...분명 누가 나에게 다가 왔었어. 그런데 누가?’

이제 앞으로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될 것 같은데!

“흐음...정말 와본 적이 있는 동넨가?”

한편 유세현은 동네를 거닐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가 나타난 골목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걷고 있었는데, 그 길만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다시 구멍가게에 도착한 유세현.

그의 눈에 한 차량이 들어왔다.

엄청난 구형 차량이었는데, 차량을 본 순간 유세현은 문득 떠올랐다.

‘아, 맞아. 차 퍼졌었지.’

할머니 댁으로 가는 와중 차가 멈췄다. 기름이 떨어진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어머니의 자그만 한 불찰 때문이었는데, 일이 해결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기 심심했던 유세현은 밖으로 나갔고, 구멍가게에 들어간

그는 엄마를 졸라...

‘불량 식품을 샀었지.’

스륵-

그의 손에 봉지 하나가 잡혔다.

몸에는 결코 좋지 않는, 달콤한 초콜렛이 들어있는 봉지였다.

‘거기가 여기였던 건가?’

그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놀이터로 향했다.

-야옹.

그러고 보니 이 울음소리도 들은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세현아 뭐 좀 발견했냐?”

“흐음...발견한건 아니고...뭔가 떠올라서.”

유세현이 소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소녀는 울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향해 초콜렛을 꺼내 내밀었다.

“먹을래?”

이 모습을 본 김주희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 기억의 던전(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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