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월드(1) >
알비론의 수는 몇 마리 되지 않았다.
놈들은 활발히 활동하지 않고 특정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는데 전투가 아닌 감시의 명목으로 배치 시켜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강호의 미간이 점점 좁혀진다. 그는 현재 약간의 정신적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그에게 있어 알비론을 만난 것 자체는 별로 큰 충격이 아니었다. 설산에서 우연히 천사와 조우했듯이 이 세계는 예측 불허한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니까.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알베타스의 성장속도 때문이었다.
언더월드는 앞서 설명했듯 강자들이 드글드글한 장소다. 이 통로에 등장하는 마수만 해도 평균 스텟 수준이 S랭크 50%를 가뿐히 웃돈다.
내부로 들어온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언더월드로 진입하다니?
정보가 없는 것치고는 실로 무지막지한 성장력이다.
회귀전과 제일 많이 달라진 종족을 꼽으라면, 인간 다음으로 알베타스가 될 것이다.
알베타스와의 싸움에 도가 턴 유세현이 말했다.
“처리하자. 순식간에 죽이면 알베타스도 곧바로는 눈치 못 채니까.”
쉬익-
일행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알비론을 정리했다.
드르륵-
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가 자동적으로 밀려나며 드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앞이 바로 지저의 세계 언더월드였다.
* * *
언더월드는 상당히 음습하고 꽤 어두컴컴했지만, 그래도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천장 꼭대기에 박혀있는 거대한 발광석 덕분이었는데, 조명이 붉은색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붉게 보였다.
돌도, 앙상한 나뭇가지도, 그리고 하늘도.
일전 이강호에게 들은 것과는 확실히 다른 환경.
일행은 신전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강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상공에 괴성이 울려 퍼진다.
-캬아아아!
엄청난 수의 조류였다.
팔 다리를 지니고 있는 와이번과 다르게 팔 자체가 날개인 익룡의 형태였는데, 얼마나 거대한지 하늘 높이 있는 놈들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식 명칭은 다르틸루스.
“이쪽으로!”
이강호가 다급히 거목을 향해 경공술을 펼쳤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쉬이익-
V자의 형태로 무리를 이루던 다르틸루스가 하나 둘 몸을 틀더니 빠르게 하강을 시작했다.
곧이어 광활하게 울려 퍼지는 절규.
“끄아아악!!”
다르틸루스의 긴 부리에 붙잡힌 이족종의 비명이었다.
콰득-
콰드득-
조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다르틸루스의 날카로운 이빨이 이종족의 몸을 박살낸다.
무심하게 꿀꺽 삼켜버리는 놈.
“크으으으!”
동료의 죽음을 본 이종족이 잔뜩 사색이 되어 지니고 있는 4개의 팔을 이용해 놈이 부리를 닫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버텼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아, 안돼!”
콰드득-
나머지 또한 다르틸루스의 입안으로 자취를 감춘다.
특수 만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던 유세현의 이마에서 땀이 찔끔 흘러내렸다.
방금 전 이종족의 마력은 S랭크 80%정도로 꽤나 강자였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들이 마땅한 대응 한 번 하지 못하고 당했다.
‘역시 최상위 유적이라 이건가...’
유세현은 견적을 냈다.
놈들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놈들을 공격 할 수는 없었다.
놈들을 잡으려면 필히 스킬을 운용해야 되는데, 이곳에는 여러 종족들이 존재하기 때문.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해야 된다.
그 후 이강호에게 팔이 4개였던 종족, 그락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은 일행은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유세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쓸모가 있지는 않았다.
다르틸루스처럼 마력은 낮지만 스텟은 강한 몬스터가 존재할뿐더러, 뭐니뭐니해도 강자들이 사방팔방에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이군.’
일일이 전부 신경 쓰다가는 정신력만 바닥날 느낌.
“강호야 신전까지는 어느 정도 남았냐?”
“아직 많이 가야돼.”
아그니의 신전은 언더월드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그래서 어느 통로를 통해 내부로 들어와도 가까운 장소가 없었다.
걷고 있는 그들의 눈앞으로 우거진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 거대한 나무들을 많이 봐온 유세현조차도 살짝 놀랄 정도의 거목으로 이루어진 숲이었다.
“흠...”
일행은 외곽을 쭉 돌았다. 이 기분 나쁜 숲을 통과하는 것 말고 내부로 들어갈 길이 있는지 확인해 본 것인데 안타깝게도 딱히 길은 보이지 않았다.
“통과해야 될 거 같다. 세현아.”
“오케이.”
내부로 진입하기 무섭게 거대 식인식물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 * *
안개가 껴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숲.
루시아의 등 뒤로 스산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무섭게 칠흑의 검광이 번뜩였다.
-캬아악!
털썩-
흡사 동물의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식인식물.
“아...고마워요. 세현씨.”
루시아가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5번째 전투가 끝이 났다. 코인을 흡수한 뒤 심각한 표정으로 스테이터스를 살핀 유세현이 말했다.
“흠...역시 이전부터 느꼈던 건데 뭔가 이상해. 코인 순도가 왜 이러냐?”
순도가 높은 것이 아닌 낮기에 하는 말이었다.
식인식물의 수준을 봤을 때 힘 스텟이 적어도 0.3% 정도는 올라야 정상이었다.
허나, 지금은 0.005%밖에 오르지 않았다.
이강호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 몬스터가 줄 수 있는 순도의 한계점이 낮아서 그래.”
“응? 한계점?”
“응. 간단히 말하자면...”
여태까지는 지능이나 수준여하에 상관없이 스텟이 높으면 무조건 적으로 높은 순도의 코인을 주었다.
한계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계점이 생기는 기점은 S랭크 50%.
이 이후의 몬스터들은 높은 스텟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수준여하에 따라서 지급되는 순도가 달라진다.
이강호의 설명에 유세현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비록 스킬이 독 분사 하나밖에 없다고는 하나 식인식물은 지능이 높아 충분히 위협적인 생명체였다.
게다가 독 또한 일반적인 독이 아닌 맹독.
처음 이 숲에 들어 왔을 때, 멋모르고 숨을 들이켰다가 골로 갈 뻔 한 것이 떠오른다.
이강호가 잽싸게 조취를 취해줬기에 망정이지, 그가 없었다면 저항력이 낮은 자신은 정말 우습게도 드래곤이나, 천족 같은 존재가 아닌 식인식물에 의해 삶을 마감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정도로 수준이 낮게 측정되다니...’
그때였다.
트득-
트드득-
무엇인가가 서서히 부서지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음색이 일행의 귓가를 자극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머리 바로 위였다.
순식간에 걷히는 안개.
“?!”
다급하게 상공을 올려다 본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점점 찢겨져 가는 공간이었다.
파앗-
고작 1m도 안됐던 균열의 크기가 순식간에 10m 넘도록 확장되며 거대한 원을 이룬다.
그 속에서 거대한 생명체가 뚝 떨어졌다.
쉬익-
쿠웅!
그 여파로 흙먼지가 휘몰아쳤지만, 그럼에도 유세현은 놈이 누군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티탄!
온 몸을 병장기로 무장하고 있는 놈은 분명 티탄이었다.
연이어서 수많은 티탄족들이 소나비 쏟아지듯 밀려 내려왔다. 일행은 호흡하는 것도 멈추고 거목에 몸을 더욱 바짝 밀착 시켰다.
최고 약한 놈으로 추정되는 마력이 SS랭크.
수는 무려 100명이 넘는다.
마지막으로 붉은 갑주를 입고 있는 티탄이 떨어지자, 유세현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뭐냐 이 마력은...’
알테라그와 비등비등한 마력.
유세현은 제발 놈들이 모른 채 지나치기를 바랐다.
놈들의 대장이 분명한 붉은 갑주의 티탄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전원, 무사히 넘어왔나?”
“예! 이상 없습니다!”
“좋아. 그럼 곧바로 이동을 개시...”
놈의 말이 뚝 끊겼다. 놈의 눈동자는 죽어 있는 식인식물을 향해있었다.
이내, 뭔가 알았다는 듯 일행이 있는 거목으로 돌아가는 시선.
“숨어 있는 벌레가 있었군.”
그의 거대한 손이 일행을 향한 순간이었다.
“잠깐!”
유세현이 당당히 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사뭇 놀랐는지 잠깐 머뭇거리는 티탄.
유세현은 놈이 행동을 더 취하기 전에 알테라그에게서 받은 신뢰의 팔찌를 내밀었다.
“이걸 봐라! 너희들의 왕께서 나에게 하사한 물건이다. 나는 적이 아니다!”
사실, 유세현은 이놈들이 판도라의 티탄인지, 알테라그 세계의 티탄인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놈이 알그하브와 비슷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닐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 언더월드는 판도라 내에 존재하는 유적 중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유적.
즉, 알그하브의 힘이 더 높아졌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건 도박.
“흐음...우리들의 왕께서?”
놈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팔찌를 유심히 살폈다.
여유 혹은 방심.
놈의 경우에는 전자였다.
두근- 두근-
약간의 표정 변화에도 심장이 180비트로 요동친다.
이놈들이 판도라의 티탄이라면, 만약 그런 것이라면...
유세현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강호, 루시아, 아퀼라, 김주희도 잔뜩 긴장하여 마력을 끌어올린 상태.
마침내 티탄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호오...네가 왕위 탈환을 도운 그 은인인가.”
유세현을 포함한 인원 모두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티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지?”
“일이 있어서 왔다.”
“흐음...그 일이라는 게?”
“꼭 알려줘야 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유세현의 말에 티탄이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굽혔던 허리를 펴는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도 왕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닌가 했건만. 그건 아닌가 보군.”
그 말에 유세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유적은 과거의 티탄족이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적.
그의 뇌가 말한다.
지금 이건 이 세계의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천사가 여길 공략중이라는 것은 카리우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나 중급천사 밖에 되지 않는 카리우엘은 그다지 아는 것이 많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흐음? 이곳에 있으면서 그걸 모른단 말이냐?”
“공교롭게도 그렇다. 뭔 일이 있는 거라면 알려줬으면 좋겠다만...”
“흠...”
티탄이 재차 턱을 어루만졌다.
“뭐, 짧게라면 괜찮겠지. 지금 우리는...”
티탄은 전쟁 중에 있었다.
상대는 크로마스.
똑같은 거인족이었는데, 큰 차이는 외눈박이에다가 뿔이 달려있는 것이었다.
일전 타르탄이 중얼거렸던 것이 떠오른다.
분명 뭔가 준비하고 있다고 한 것 같았는데...
“놈들은 고대의 병기를 깨우려고 하고 있다.”
고대의 병기를 놈들이 차지하게 된다면 티탄족은 엄청나게 불리해진다. 그래서 티탄족은 쳐들어왔다.
병기가 잠들어있는 이 언더월드로.
이건 고대병기를 깨워 침략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본래라면 알그하브가 있는 이상 이겼어야 되지만...
“이상한 놈들이 크로마스를 돕고 있더군.”
이상한 놈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자세히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에 끼어든 불순물은 한 가지니까.
대리자.
바로 자신들.
유세현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알그하브가 왕위를 되찾을 수 있던 건 던전에 들어간 자신과 동료 덕분이었다.
즉, 알그하브는 본래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되는 인물이었다.
카리우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트, 특이개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유세현이 왜 아이템을 찾고 있냐고 물었을 때 놈은 분명 이렇게 답했었다.
그러나 그 특이개체가 뭐냐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놈은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자였지, 언더월드 공략의 주가 되는 주력병력은 아니었기에.
< 언더월드(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