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16화 (316/612)

< 천족(2) >

뼈를 찌르는 한파가 몰아치는 설산, 그 강추위에 사람들의 몸이 한 없이 움츠러들었다.

딱딱딱-

끝없이 부딪치는 턱관절.

“미, 미친...”

“차, 차라리 사막이 차라리 나았어...”

사람들은 흡사 남극에 벌겨 벗겨져 대동댕이 쳐진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 인내심이 강한 유세현조차도 인상이 구기고 있으니 말은 다한 것.

아니, 사실 유세현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유독 더 추위를 싫어했다.

과거 군대에 있을 적 혹한기 때 발생한 불상사 때문이었다.

“젠장...또 생각나네.”

일전, 왕궁 유적에 들어갔을 때도 살짝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추위가 극심하여 보다 더 상세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 사단장은 최강의 야전부대를 만든다며 온갖 훈련을 행하며 병사들을 굴렸는데 LED의 사용조차도 불허했다.

산 인지라 조명도 없어 덕분에 해가 떨어진 밤에는 거의 눈먼 장님 수준.

하지만 혹한기 훈련은 심야까지 이루어졌고,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던 도중 미끄러진 이등병을 위해 병장이 LED를 켰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때마침 연대장이 작계지역을 방문했던 것.

물론, 연대장이 온다는 것은 미리 전파를 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길이 정말 최악인지라 꽤나 마음씨 착한 병장이 분대원을 우선시 한 것이었다.

자칫 이등병이 크게 다칠 수도 있던 일이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아보지도 않고 크게 불호령이 내려졌다.

연대장이 직접 언질 한 것인지 아니면 밉보인 대대장이 지시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유세현은 평범하게 텐트에서 취침할 수 없었다.

땅을 판 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분침호라는 장소에서 자야 되었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몇 개 완공 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완공 해놓은 것도 무척이나 허술하여 내부에는 눈이 침투해 있던 상황.

한 개 분대만이 들어갈 수 있는 협소한 공간에 두 분대가 들어갔다.

그것도 짊어지고 온 군장과 같이.

그건 거의 우겨 넣어진 것과도 다름이 없었다.

움직일 공간도 없어 군장에는 손도 대지 못했고, 입고 온 복장 상태 그대로 앉은 자세로 잠을 청해야 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런 조치도 없이 지면과 맞닿아 잇는 몸.

땅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냉기가 올라와 뼈에 사무쳤다.

그리고 그날 유세현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감각이 없어진 발가락이 혹시나 괴사된 것은 아닌지.

15분마다 계속 깨며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세 놈 다 다 똑같은 놈들이었지.”

유세현의 말에 이강호가 피식 웃었다.

유세현에게는 몇 년 안 지난 이야기지만 그로서는 20년이 넘게 흐른 이야기.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것만큼은 각인되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야 강호야. 대대장 몸 어땠는지 기억 나냐?”

“물론, 돼지였잖아.”

그렇다.

전쟁시 부대를 통솔해야 되는 대대장이 말 못할 돼지였다. 정말 심각했다.

“그 셋도 이곳으로 불려왔겠지?”

“그렇지.”

뒷말은 필요가 없었다.

권력에 찌든 그들의 인생은 듀토리얼에서 막을 내렸을 테니까.

어느 샌가 동료들의 이목이 둘을 향해 쏠려있었다.

그들이 현대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정말 손을 꼽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줄곧 궁금했다.

뭐하는 이들이기에 지금은 종족 전체를 이끌 수 있는 자가 된 것일까?

“세현 동생, 강원도 철원에서 복무했었다고? 몇 사단이었어?”

“3사단이었었습니다.”

“오 정말? 이 형님도 3사단이었어!”

“아, 그렇습니까.”

“응. 18연대 1대대였지. 동생은?”

“저희 둘은 22연대였었습니다.”

“오~그럼 GOP도 올라갔겠네?”

“예. 말년에 잠깐.”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추위가 한결 나아진다는 것을 아는 유세현은 이태광과 잠깐 담소를 나눴다.

그 와중에 총기에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는데 알테리아 대륙 출신인 레피아가 특히나 관심을 보였다.

김주희와 루시아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귀를 귀울이고 있는 상황.

그사이 추위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몬스터라도 등장한다면 때려잡아 전리품을 얻기라도 하겠지만, 수적 열세를 눈치 챈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강호가 한시라도 빨리 대처해주기를 기도하는 것뿐이

었다.

이내 이강호가 나아가던 발걸음 멈췄을 때는 참다못한 황제가 안색이 퍼렇게 변해 다가왔을 때였다.

“강호경. 이대로 더 진군한다면 정말 위험할 것 같네만...”

“다 왔습니다. 여깁니다.”

“그...그런가?”

“예.”

일행이 그 말에 일대를 살폈다.

허나,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새하얀 쓰레기뿐.

“선배님, 정말 여기가 맞아요?”

“응. 다들 이곳에서 10보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통보한 이강호가 마력을 끌어 올리더니 이내 지면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뻗었다.

후욱-

빠르게 녹아내리는 눈과 빙판.

실로 엄청난 화력이었지만 적을 고려하고 있는 이강호의 세밀한 컨트롤 덕분에 열기가 주위로 뻗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지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새까만 어둠이 드리워져있는 밑을 살핀 인원들이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그들은 지금까지 밟고 있는 이 장소가 그냥 땅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아니었다.

먼저 진입한 일행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리자 몇 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밑으로 내려왔다.

돔형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그들을 전부를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정말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높게 솟아있는 건물을 살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빌딩.

하지만 현대의 빌딩과는 큰 괴리감이 있었다.

곧게 뻗어있는 빌딩과는 달리 이 빌딩은 나선형으로 이리저리 꼬여 있는 것이 미래 SF영화에나 나올법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이강호를 뒤따라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점점 중심부에 접근함에 따라 묘한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점점점 커지는 소리.

드르렁-

드르렁-

그건 생명체가 코를 고는 소리였다.

이내 움직임이 멈추고, 전방을 응시한 사람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건!”

온몸을 뒤덮고 있는 흰 털.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거대한 풍채.

그건 거산 같은 설인이었다.

“미, 미친...난 눈이 쌓여있는 건줄 알았는데...”

“이놈과 싸워야 되는 건가?

사람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정도의 거인을 지금까지 그들은 본적이 없었다.

크기가 곧 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거대 몬스터의 힘은 예외 없이 항상 그들의 상상을 웃돌았었다.

게다가 이곳은 판도라 내부.

얼마나 강할까?

그때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강호가 한 마디 했다.

“저건 저희들끼리 잡겠습니다. 여기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

그건 정말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저...세 마리나 되는데...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이강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자, 어쩌면 별로 강하지 않지 않을까하는 혹하는 마음이 싹텄다.

허나, 이어지는 이강호의 한마디.

“참여하시고 싶은 분은 참여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생사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

결국 그들은 꼬리를 내렸다.

참여한 이들은 전투에 자신이 있는 무림맹의 맹주나 남궁제를 포함한 소수의 무인들 뿐.

-캬아아아!

그들이 일정 범위로 내로 진입하자 깨어난 설인이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 * *

콰아아앙-

이강호가 문지기라 부른 설인은 차마 말 못할 정도로 강했다.

내구력, 저항력, 근력 모든 스텟이 그들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게다가 강력한 스킬까지.

하지만.

-크어어어.

쿠웅.

한 마리가 쓰러졌다.

문지기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자, 장난 아닌데?”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저 설인은 그들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을 안전하게 잡아내다니...

검법을 펼치고 있는 유세현을 흘끗 살핀 남궁제 또한 속으로 감탄했다.

‘대단하군.’

그로서는 팔이 잘린 유세현이 조언을 구해온 것이 엊그제 같았다.

허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로도 계속 조금씩 증진하고 있었다.

천하제일검이라고 불렸지만, 팔이 잘린 이후로는 상당히 실력이 저하되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신과는 다른 모습.

그는 유세현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끝없는 고심과 노력.’

허나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그는 자신, 아니 무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체면...’

무인들은 남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고수면 고수일수록 더더욱.

허나, 유세현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검의 끝을 보았다고 자부한 그였지만, 유세현을 본 최근에 들어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다.

되려 검의 끝에 다다랐던 인물은 모두가 끔찍해 마지않던 마교의 교주, 천마다.

‘그러니 나도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

쿠웅-

간신히 버티고 있던 마지막 설인이 쓰러졌다.

놈에게서 떨어진 코인은 유세현에게 엄청난 냉기저항력을 선사했다.

그리고 놈이 내뱉은 전리품.

레전더리 F 랭크의 작은 구슬이었다.

어떤 재질로 되어있는지만 적혀있을 뿐 사용용도도 언급되어있지 않았다.

이강호도 놈이 이런 아이템을 주는 것은 미처 몰랐기에, 곧장 상세 분석에 들어갔다.

이벨린이 차고 있던 팔찌에 마력을 부여하기 무섭게 추가정보가 떠오른다.

팔찌는 아이템의 정보를 보다 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었다.

“흠...특정 장치에 동력원으로 사용 된다라...”

“강호씨,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글쎄요. 이 너머에 내부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한데...그곳에서 쓰이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그렇군요.”

이곳으로 안내해준 이강호가 일단 구슬을 챙기는 것으로 분배는 끝이 났다.

“사람들 불러올게요. 선배.”

김주희가 사람들을 부르러 간 시간 동안 유세현은 잠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때 한 명이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허전한 오른팔, 남궁제였다.

“허허, 세현공이 이젠 나보다도 훨씬 났군.”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검제님께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유세현이 공손히 답하자, 남궁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본인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지만 검술에 대한 재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그는 여전히 사위 두고 싶은 인물이었다.

‘시영이가 강호공에게만 빠지지만 않았어도...’

이전처럼 어떻게든 다시 엮어보려 했을 터인데.

남궁제가 크게 호흡을 들이쉬었다.

지금 그가 하려는 행동은 높디높은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세현공, 마지막 놈의 공격을 피한 뒤에 날린 올려치기, 내가 보기에는 사선베기가 좀 더 빠르고 나은 수인 것 같았는데...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왜 그런 수를 펼친 것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그 말에 주위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표정을 잘 내보이지 않는 것이 무인이건만 정말로 놀란 기색.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남궁제다.

검의 최강!

평생을 검에 바쳐온 그가 타인에게, 그것도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는 검에 아무런 연관도 없었던 이에게 조언을 구하다니!

“아, 그건...”

적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유세현은 생각하는 바를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남궁제의 고개가 절로 끄덕거린다.

그 후 유세현은 사람들의 틈에 뒤섞여 방한용품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강호가 설인의 시체 뒤에 있는 문을 열어 재꼈다.

쿠궁!

트드득-

톱니바퀴가 맞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돔의 한쪽 문이 열렸다.

중간지역까지 이어져있는 통로였다.

< 천족(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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