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300화 (300/612)
  • < 외부의 끝(1) >

    채재재쟁!

    또다.

    또 밀렸다.

    당혹감과 분노,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벨가르의 육신.

    한편 벨가르와 달리 유세현은 완전한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지금까지 인위적으로 적의 동향을 살폈다고 치자면 현재는 전장의 흐름이 피부 속으로 직접 와 닿았다.

    이 공간의 일정 영역이 마치 자신의 신체 일부가 된 느낌.

    쉬이익-

    검이 방패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허나, 완벽한 공격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세상에 완벽한 공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걸 결정하는 것은 연이어서 취하는 자신의 행동거지.

    치지직-

    쭉 팔을 내뻗은 유세현이 순식간에 동작을 바꿔 올려치기를 행하자 방패를 쥐고 있는 벨가르의 왼쪽 팔이 한순간 튕겨져 나갔다.

    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벨가르는 검격을 흘리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크으으!! 이놈이!!”

    유세현의 눈에 다음 행해야 될 행동이 뚜렷이 비친다.

    범인인 스스로가 혼자의 힘으로 알아낸 것이 아닌, 천마의 검법이 뇌리 속으로 흘려보내주고 있는 경로였다.

    타악-

    유세현이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허나, 완전히 똑같이 따라 움직이지는 않았다.

    각도나 몸의 모양새 등이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정말 큰 것이었다.

    틀에 사로잡히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한없이 난해하여 백날을 생각해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던 천마의 검법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서 일까?

    항상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유세현은 천마가 진짜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얼마나 천재인지 직접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장담한다.

    어이없게 기습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 판도라에서 엄청난 위용을 떨쳤을 것이다.

    콰앙!

    맹렬한 찌르기에 벨가르가 입고 있던 갑주에 균열이 갔다.

    벨가르의 얼굴색은 비약 때문을 제외하고도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 있었다.

    “으으으으!!”

    그가 쥐고 있는 메이스가 맹렬한 노란 빛을 발산한다.

    벨가르가 지니고 있는 최강의 단일 스킬로, 분쇄의 힘을 담아 무기까지 파괴.

    스스로가 인정한, 어쩔 수 없는 적을 일격에 찍어 누르기 위함일 때만 사용하는 힘이었다.

    쉬이익-

    콰아아아앙!

    허나, 메이스는 유세현에게 닿지 못했다.

    대응하지 않고, 정말 간발의 차이로 회피한 것.

    우측으로 돌아간 유세현이 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서걱-

    벨가르의 왼팔에 붉은 실선이 그려진다.

    그의 팔은 1초도 지나지 않아 방패와 함께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연이어 유세현의 검이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벨가르님!”

    어찌나 날카로운지 아마 주위에서 연합군이 떼로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벨가르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억...허억...허억...”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린 벨가르가 거친 호흡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그의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처럼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해져도 너무 강해졌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강해질 수 있는 것이지?

    그 순간 유세현의 시선과 벨가르의 시선이 교차했다.

    벨가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깨닫는다.

    ‘내, 내가 겁을 먹었다는 건가? 리자드맨 전체를 이끌고 있는 내가?’

    벨가르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는 이 순간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웃기지마라...나는...나는!!”

    쉬이이익.

    트드득-

    퍼엉!

    벨가르의 근육이 일순간 터질 듯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솟아오른 핏줄이 온몸을 가득 메웠다.

    유세현은 이 틈을 타 끝장을 볼 생각을 가졌다.

    뭘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상대가 능력을 사용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은 소년만화에 나오는 악당 정도나 하는 미련한 행동이다.

    타다닥-

    경쾌하게 발을 놀려 적을 베어가며 다가간다. 비약을 먹은 놈들은 굳이 대적하지 않았다.

    10m.

    5m.

    ‘내가 더 빠르다.’

    유세현은 놈의 수급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허나, 그 순간.

    슈우웅!

    콰아앙!

    세찬 칼날 바람과 함께 적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무엇인가가 유세현의 육신을 덮쳤다.

    눈가에 비치는 붉은 창.

    이강호와 트루크, 그리고 비약을 섭취한 최정예 병사 다수였다.

    “크하하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이것도 버텨봐라.”

    트루크가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이강호는 이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지만 트루크를 보좌하고 있는 연합군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에 회피하지 않으면 휘말릴 것이기에 유세현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몸을 살짝 내뺐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위대한 리자드맨의 수장이다!”

    쿠구구구!

    콰앙!

    흡사 핵폭탄이 떨어진 듯한 굉음을 내뿜으며 벨가르의 육신이 거대화를 이루었다.

    한 눈에 봐도 최소 20m 이상의 크기.

    전투를 치르고 있던 근위병, 길드장, 무림인들의 턱이 살짝 벌어진다.

    화염거인같이 애초에 거대 몬스터와 마주한 적은 있었지만 스킬로 거대화를 이루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

    유세현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이런 비장의 수를 남겨두고 있었다니.

    거대화를 하면 공격할 면적이 넓어진다는 이점이 있지만, 막대한 마력을 쏟아 부울 수 없는 지금은 이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누가 대신처리해주면 참 좋으련만...

    트드득.

    벨가르가 발을 치켜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위로는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어서 벨가르의 걸걸한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죽어라아아!”

    후우웅!

    엄청난 풍압이 밀려 내려온다.

    범위가 상당하기에 유세현의 근처에 있던 인원들은 다급하게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콰앙!

    발모양으로 깊게 움푹 파이는 지면.

    위력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이윽고 벨가르는 난리 블루스를 치며 유세현을 노렸다.

    콰앙! 콰앙! 콰앙!

    이에 사람들은 혀를 찼다.

    “큭! 저놈 때문에...”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전부 보법을 운용할 수 있었지만, 수적 열세의 상황인지라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탓이었다.

    요리조리 피한 유세현의 검이 벨가르의 아킬레스건을 노렸다.

    허나, 벨가르는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치직-

    살짝 빗나가 복숭아 뼈 아래를 베고 지나가자 생채기를 본 벨가르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크으...거대화를 해도 베이다니. 대체 저 아이템은...’

    갑주가 뚫렸을 때부터 놈의 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진즉이 느낀 상태였다.

    그런데 비약을 복용하여 내구력 스텟이 높아진 상태에서 거대화로 더더욱 끌어 올린 이 피부도 쉽게 뚫리다니...

    “죽어라아아아!”

    콰과과광!

    이번에는 꼬리를 이용한 바닥 쓸기.

    “에이이이! 빌어먹을 놈이! 답혼공파경(遝魂功波勁)!”

    보다 못한 길드장 한 명이 마력을 끌어 올려 벨가르를 공격했다.

    “흥! 벌레가!”

    벨가르도 지지 않고 발산형 스킬로 대응했다.

    치지직-

    힘이 맞붙는다.

    결과는 무공의 패배.

    무공이 약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5대 세가, 이름 있는 문파쪽에 속하는 무공은 아니더라도 그가 익힌 무공은 제법 쓸만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밀린 것일까?

    “크으...마력의 여유만 더 있었어도...”

    그렇다.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그리고 이야말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본래라면 지금쯤 이강호가 트루크를 잡았어야 했는데...

    “크흐흐흐.”

    상황이 조금씩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낀 트루크가 비릿한 조소를 내뱉었다.

    이강호는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빌어먹을 드래곤.

    셀론 때도 그러했지만, 회귀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드래곤이 너무너무 싫었다.

    고유특성을 깨우치고, 죽을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음에도 결국은 이길 수 없었기에.

    당해낼 수 없었기에.

    때문에 이번에는 달라야한다.

    이놈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내부로 들어간다.

    그리고 기회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유세현을 도와 날뛰고 있는 거대한 놈을 우선적으로 잠재워야했다.

    그것도 마력의 소비 없이.

    트루크와 정예들의 견제가 계속 이루어질 터인데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여태까지 조용히 묻혀 전투를 치르고 있던 한 남성이 눈을 번뜩였다.

    백발에 풍성한 흰수염을 지니고 있는, 판도라에서 무척이나 보기 드문 노인.

    아린 하이워커.

    마법을 연쇄적으로 사용해 근처의 적을 뒤로 물린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거대해진 리자드맨 수장이 서있는 장소였다.

    이제는 지팡이 대신 검만 쓰게 된 그가 힘껏 팔을 내리그었다.

    슈욱.

    지이잉-

    벨가르의 머리위로 나타나는 기하학적인 문양.

    알아 챈 것은 지면을 응시하고 있던 벨가르를 제외한 수장들 전부로, 그들의 눈동자는 당장에 튀어나올 듯 화등잔만하게 커져있었다.

    “이건!!”

    “아이스 캐논(Ice Cannon).”

    아린이 지그시 읊조리자 하피 퀸, 시라카가 다급하게 외쳤다.

    “벨가르! 피해라!”

    “뭐?”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벨가르.

    허나, 아이스캐논은 7서클의 고서클로서 아이스 계열의 대마법이다.

    게다가 대포라는 명칭이 어울리게 어마어마한 속도까지 자랑한다.

    발현된 장소도 초근접.

    당연히 늦게 알아챈 벨가르가 회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트드드득-

    제대로 적중당한 벨가르의 육체가 순식간에 동상처럼 꽁꽁 얼어붙어 나갔다.

    머리부터 적중 당했기에 그는 마땅한 비명 한 번 내지르지도 못했다.

    육체를 완전히 뒤덮고도 아직 힘이 남았는지 주위로 뻗어나가는 싸늘한 냉기.

    “어...”

    연합군의 대다수는 그 장엄한 장면에 압도되어 감히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법.

    이강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아린은 지금까지 기본적인 마법으로만 전투를 펼쳐왔기에 고서클의 마법을 보는 것은 그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이도 많고, 조곤조곤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만큼, 각을 확실히 잴 수 있을 지 없을 지 미지수였는데...

    타이밍부터 시작하여 화염저항력을 생각해 빙결마법을 구사하는 것까지.

    그는 대단하다 못해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슈우욱-

    시선을 살짝 돌린 이강호의 눈에 벨가르의 굳어버린 팔을 타고 위로 뛰어올라가고 있는 남자가 비쳤다.

    아린을 이곳까지 데려온 장본인이자 회귀하면 꼭 살리고 싶었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이강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이 있다면, 그건 현대에서 유세현의 자살을 막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머리 위까지 올라간 유세현이 검을 힘껏 내리꽂았다.

    쩌적-

    쩌저적-

    작은 균열이 발생하더니 세포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얼어버린 벨가르의 얼굴이 사선으로 뚝 잘려나갔다.

    뿜어져 나온 코인은 유세현 혹은 그 근처에 있는 인원들이 흡수했다.

    트루크의 안면근육이 씰룩인다.

    벨가르가 죽었다고는 하나 사실 아직까지 상황은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위기.

    ‘기분 더럽군...’

    흐름을 느낀 지휘자들이 힘껏 외치며 조취를 취했다.

    “놈들을 죽여라! 어차피 우리가 승리하는 건 바뀌지 않는다!”

    “놈의 수를 봐라!”

    “와아아아아아!”

    지휘관들의 말에 인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면에 착지한 유세현의 시선이 트루크에게 향한다.

    벨가르도 잡았겠다 이제 그는 이강호를 적극 도울 생각이었다.

    물론, 이강호에게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놈들을 물리치며 길을 뚫어야 되지만.

    ‘후...산 넘어 산이군.’

    유세현은 적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심장이...’

    아프지 않다.

    < 외부의 끝(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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