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97화 (297/612)
  • < 깨달음(3) >

    “끌끌끌 미련한 제자야...”

    천마는 예전 그대로였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 언제처럼 여전히 유세현을 비웃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습게도 유세현이 먼저 취한 행동은 인사를 건네는 것 대신 스스로의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없어야 할 왼손이 달려있다.

    유세현은 그 순간 이곳이 꿈속이란 것을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허...’

    그는 혀를 찼다.

    천마의 검법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일까?

    자각몽이라니...

    아무튼 자각몽을 꾸는 것은 처음인지라 유세현은 신기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다.

    과거 천마와 만났던, 간섭공간과 비슷한 새하얀 방.

    허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똑같이 아무것도 퀭한 공간이지만 왠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는 체도 하지 않자 천마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꿈이란 것이 궁색하게 투덜거림이 너무도 뚜렷이 들려온다.

    “에이이이~! 제자 놈 둬봤자 아무 쓸모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구나! 머리 좀 컸다고 이제는 스승을 보고도 예를 취하지도 않다니!”

    유세현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천마의 영혼을 보존해주고 있던 귀걸이는 분명 오래전에 날라 갔다.

    그러니 자신의 앞에 있는 천마는 진짜가 아니라 천마의 검법에 대한 자신의 집념이 투영 되 여 만들어진 존재일 터였다.

    허나, 왜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또한 그 특유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갑기 그지없다.

    “죄송합니다. 영감...아니 스승님. 제가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예끼!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놈!”

    유세현이 얼른 사과하자 천마의 표정이 무척이나 빠르게 풀어졌다.

    티를 팍팍 내서 그렇지 기분은 처음부터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긴! 이런 곳에 쳐 박아두고 말은 정말 잘하는 구나! 뭐...가끔씩 보이는 게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유세현은 천마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꿈이란 게 다 그런 것이니까.

    또한 그래서 굳이 조언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세현이 마치 깨달은 양 말했다.

    “아! 스승님 복수는 해드렸습니다만.”

    “예끼! 장사월은 내가 죽이지 않았더냐! 그리고 아직 한 놈...아니 한 년이 남았다!”

    “예?”

    “세레나 말이다.”

    “아...”

    시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똑똑히 기억난다.

    천마를 궁지에 빠트린 장본인이자 지금 와서는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아니 드래곤이 분명한, 판도라를 계속 나아가다보면 언젠간 맞닥뜨리게 될 존재.

    “잘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 마십쇼.”

    “끌끌끌. 그랴. 스승의 복수를 잊지 않는 것이 참된 제자의 도리지.”

    천마의 눈이 유세현의 왼팔로 쓰윽 향했다.

    “그보다도 제자야. 나를 애타게 찾은 이유가 고작 이것이더냐.”

    그가 손을 들어 왼팔을 만지자, 팔은 모래가 되듯 허공으로 흩날려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천마가 마치 답 없는 수험생을 보는 선생 마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자야...너는 정말 불쌍할 정도로 재능이 없구나. 내 모든 것을 주었거늘 고작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걸로 쩔쩔 매고 앉아있다니...”

    허나, 그것도 잠시.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 그가 툭 말했다.

    “하지만 너는 정말 운이 좋다. 뭐니 뭐니 해도 고금제일인, 본좌를 곁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천마가 허공에 손짓하자 허공에서 검 두개가 나타났다.

    둘 다 루베르크의 모양을 띄고 있는 검이었다.

    천마가 유세현을 향해 검을 던졌다.

    그리고는.

    쉬익-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의 왼팔을 잘랐다.

    0.5mm의 오차도 없이 유세현이 잘려나간 팔과 똑같은 부상이었다.

    유세현의 눈동자가 한 순간 놀라움을 물들었다.

    이건?

    “끌끌끌, 재능 없는 놈에게는 몇 백 번 떠는 것보다도 실전이지. 한 번 덤벼 보거라.”

    유세현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꿈인데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인가?

    “허허, 겁을 집어 먹은 게냐? 아니면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면 이 스승이 특별히 먼저 움직여 주도록 하마.”

    쉬익-

    뒤늦게 발생한 바람과 함께 천마가 제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유세현은 황급히 검을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검이 목을 향해 치고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챙!

    “으으윽.”

    방어하는 데는 어찌어찌 성공했지만 치명적인 고질병, 자세가 무너지는 것은 역시 막을 수는 없었다.

    천마군림보를 운용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돈 천마의 검이 재차 목을 향해 쇄도해왔다.

    깜짝 놀란 유세현은 황급히 천마군림보를 운용하여 자리에서 이탈했다.

    허나.

    “끌끌끌. 미련한 제자 놈아 지금 그걸 도망이라고 친 게냐?”

    퍽-

    천마군림보를 응용한, 무게를 가득 담은 발길질이 명치를 정확히 강타한다.

    거기에 그치지 연계공격.

    챙!

    촤좌좍-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정신이 없다.

    똑같은 길이를 가진 검을 지니고 있음에도, 똑같이 팔이 잘렸음에도 움직임이 다르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젠장...’

    분명 꿈일 터인데 따갑고 아프다.

    “허억...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유세현의 몸은 어느새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하기 그지없었다.

    천마가 어깨에 검을 툭툭 털며 입맛을 쩝 다셨다.

    “흠...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하구나.”

    유세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꿈이 아닌 건가?’

    현 상황 파악하는 데만 해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수 만 가지의 가설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잠든 사이 적이 지니고 있는 모종의 스킬에 당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유세현은 무척 예민하다. 생존자가 물 마시는 소리에도 깰 정도니까.

    ‘대체 이게 무슨...’

    지켜보던 천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자야...너는 언제나 너무 생각이 너무 많다.”

    슈욱-

    또 다시 검이 쇄도한다.

    “항상 최선의 수를 찾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나가려 하지.”

    챙!

    촤자자작-

    유세현은 입을 악물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순수한 검술로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실력의 차가 너무도 크다.

    “그게 안 좋다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스승은 그나마 네가 가지고 있는 쓸모없는 재능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슈우욱-

    천마가 휘두른 검이 아슬아슬하게 머리칼을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네가 검이 되는 것을 막고 있구나.”

    유세현은 곧장 암흑투기를 사용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마력이 요동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쓰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허나.

    “끌끌끌. 예끼! 이놈! 1초 전에 한 말을 못 알아들어 쳐 먹은 게냐!”

    천마의 움직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더더욱 빨라진다.

    어떻게?

    장사월, 셀론, 그리고 특이한 권능을 지니고 있던 알베타스 또한 제대로 발휘된 이 힘에는 대응하지 못했는데.

    ‘젠장. 정말 꿈인가? 하지만 이건 너무 생생하다 못해 심각...큭!’

    발길질에 걷어차인 육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내장이 뒤틀리는 감각.

    귓가로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검을 느끼고 검이 되어라. 넌 할 수 있다. 이 검은 네 일부이니 말이다.”

    허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설마 정신줄을 놓고 검을 휘두르라는 뜻인가?

    그건 되먹지도 못한 마구잡이식이 아닌가!

    유세현의 행동이 바뀌지 않자, 천마가 공격을 멈췄다.

    ‘끝난 건가?’

    유세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마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웃고 있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

    눈빛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강한 살기를 내뿜고 있다.

    천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자야 계속 이런 식으로 싸워나간다면 너는 분명히 죽는다. 복수를 하지도 못하겠지.”

    “......”

    “그런 결과를 맞이할 바에는 내가 여기서 너를 처치하고 몸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유세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방금 전 천마가 뭐라고 한 것이지?

    “스승님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네 몸을 차지하면 널 마음에 두고 있는 두 계집은 내가 잘 가지고 놀아주마.”

    “...?!”

    더 대화를 이어나갈 틈은 없었다.

    슉-

    천마의 검은 빛처럼 빨랐다.

    스텟이 높아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능력치는 거의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역시나 움직임.

    그는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로우면서도 번개처럼 날카로웠다.

    또한 변칙적이라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전과는 한차례 차원이 다른 공격이 들어온다.

    여태까지 봐주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의 천마는 멈출 마음 따위는 전혀 없어보였다. 아니 되려 마교인들 특유의 광기의 찬 얼굴이다.

    마족화를 사용할 틈은 없다.

    ‘젠장! 빌어먹을!’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움직인 것인지는 유세현도 알 수 없었다.

    반응하지 못 하면 여기서 죽는다는 이념 하에, 동료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행동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빈틈이 커지는 만큼, 절대로 하지 않았을 공중제비를 펼친 유세현이 머리와 다리가 뒤바뀐 위치에서 검을 올려쳤다.

    동시에 천마군림보를 운용.

    쉬이익-

    빙그르르 회전한 유세현의 발이 엄청난 속도로 천마의 명치로 향했다.

    천마는 잽싸게 오른팔을 움직여 방어를 하려했지만 이건 유세현의 본능적인 노림수였다.

    다른 한쪽발로 천마의 팔을 쳐낸다.

    유세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저 회전하여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며 천마의 목을 노렸다.

    적어도 유세현이 보기에는 99.99% 성공할 그런 연계동작이었다.

    허나 그 순간.

    스르륵-

    천마의 허리가 굽혀지는가 싶더니 검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유세현을 향해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천마.

    천마의 팔의 위치를 본 유세현은 낭패어린 표정이 되었다.

    누가 뭐라 하던 이건 회피 불가능이기에.

    죽는다.

    눈가로 비치는 검.

    딱-

    허나 예상과는 달리 둔탁한 소리가 이마에서 울려 퍼지며 머리가 뒤로 살짝 젖혀졌다.

    “끌끌끌. 역시 네놈은 목숨이 위태위태하거나 동료가 걸려 있어야 제대로 하는 구나.”

    유세현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예끼! 정신차리거라!”

    딱-

    천마가 딱밤을 한 번 더 선사하자 유세현이 얼얼해진 이마를 감쌌다.

    유세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꿈이고 아니고를 떠나, 눈앞에 있는 천마가 연기했다는 것을.

    “스승님...”

    “끌끌끌. 아둔한 바보마냥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

    “......”

    “그보다도 시간이 다 됐구나.”

    그렇게 말하는 천마는 그 답지 않게 활짝 웃고 있었다.

    천마가 다시 한 번 유세현의 이마를 향해 다시 손을 올렸다.

    “잘 생각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방금 전의 감각을 잊지 말거라.”

    그가 재차 딱밤을 날렸다.

    딱-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여러 가지 음성이 유세현의 귓가로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적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이강호씨 대체 작전을 언제 실행할 생각입니까? 이래서는 애써 발견한 비밀통로도 무용지물이 될 지도 모릅니다.”

    “조금만...조금만 더...”

    동시에 점점 흐릿해지는 천마의 얼굴.

    “제자야. 네 곁에는 우리가...”

    완전히 사라지기전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 * *

    “어?”

    유세현은 눈을 번쩍 떴다.

    “와아아아아!”

    고막을 찌르는 연합군의 함성.

    유세현은 한순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자고 있었단 말인가?

    적이 오는 것도 모른 채?

    < 깨달음(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