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91화 (291/612)
  • < 상봉(2) >

    이에 이강호는 살짝 실소를 내뱉었다.

    그래, 이게 바로 유세현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신체의 일부는 물론이거니와 목숨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과거 김주희에게 빠져 미련한 행동을 하다가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주었던 둘도 없는 친우.

    “응, 잘 지냈어.”

    한 박자 쉰 그가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전부 네 덕분이다. 세현아.”

    * * *

    상봉한 두 사람의 모습은 그 누가 보기에도 훈훈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은 죄책감 때문에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던 김주희의 감정에 불을 지폈다.

    눈시울이 붉어진 김주희가 유세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선배님. 정말...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어...”

    이런 식으로 나올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유세현의 몸이 평소 그답지 않게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유세현이 진심을 담아 답하자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은 김주희의 몸이 잔잔히 떨렸다.

    전쟁갑주의 틈사이로 떨어져 어깨를 흠뻑 적시는 뜨거운 액체.

    인원들이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는 반면, 루시아는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유세현의 저 미소는 자신으로서는 절대 만들 수 없던 것이었기에.

    그들의 유대감이 부럽다.

    또한 그녀는 감 혹은 촉이라 불리는 모종의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여자 또한 자신처럼 유세현을 무척이나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샌가 진정이 된 김주희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박찼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아, 아프셨죠?”

    “아니. 괜찮아.”

    실제로 속도만 빨랐지 살살 안았기에 고통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몸에 무리가 왔으면 유세현의 성격에 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유세현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쫙 둘러봤다.

    이용석, 이태광, 장원석, 이한별, 리체, 유혜인, 김주희, 이강호, 아퀼라, 아린, 루시아.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

    이에 유세현은 자신을 도와준 아린과 루시아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이것을 놔두고 딴 일을 먼저 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구출된 인원들은 한 명 한 명, 직접 자신을 소개하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허허, 아닐세. 우리가 원해서 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용석씨 정말 고마워요.”

    “아, 아니에요. 한별씨.”

    이한별의 말에 이용석이 수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본 유세현은 실소를 내뱉었다.

    길드를 탈퇴한 사람이 왜 굳이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인지 그 부분이 줄곧 의아했었는데 이제는 좀 이해가 갔다.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아린을 보며 고심하고 있는 이강호가 보였다.

    “세현아. 저 어르신 혹시...”

    “아...맞아. 말해준다는 걸 깜빡했네. 네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아.”

    유세현의 말에 살짝 확장되는 이강호의 동공.

    그는 설마 설마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린 하이워커는 판도라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우리가 과거가 바꿔서 그런 거 같아.”

    “응? 과거? 우리가 과거를 바꿨다고?”

    이강호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를 한건 자신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같이 과거를 바꾸다니?

    이강호의 심리상태를 꿰뚫어본 유세현이 잽싸게 부과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신물조각을 얻은 유적. 우리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기억나지? 그리고 누구를 지켰는지.”

    “물론 기억하지. 그런데 그게 과거를 바꾼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이강호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이내 살짝 커지는 그의 눈.

    “설마?”

    “그래, 맞아. 지금 영감님은 본래의 기억이 아닌 그때의 기억을 지니고 계셔.”

    “......”

    이강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이강호로서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물론 유적이 다른 던전과 달리 뭔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역사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

    이강호의 시선이 이번에는 루시아를 향했다.

    그는 사실 아린보다도 루시아가 마음에 걸렸었다.

    왜냐하면...

    진중한 표정으로 한껏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세현아 이번에는 루시아씨에 대한 건데...”

    “응.”

    “저분 정말 사람 맞아?”

    “응?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유세현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러자 이강호는 한껏 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세현아 너 혹시 마력탐지 능력 사라졌냐?”

    “아니?”

    “흠...그런데도 정말 저분이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

    유세현은 그 말에 루시아를 바라봤다.

    흐름을 읽는 것도 할 수는 있었으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지금은 정신을 집중해 읽는 것보다도 그냥 보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확인하기 무섭게 거칠게 지진을 일으키는 유세현의 눈동자.

    ‘뭐지 저건?’

    어제까지만 해도 루시아의 마력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력이 변질되어있었다.

    그는 마력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기본 감각은 어둠의 마력과 굉장히 흡사한 느낌.

    허나, 자세히 보면 어둠의 마력은 절대 아니었다.

    본질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이 감각...’

    마치 겪어보기라도 한듯 어딘가 무척 익숙하다.

    그리고 유세현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마력이 역경의 길 마지막에 분포해있던 그 묘한 마력과 무척 흡사하다는 것을.

    ‘설마...’

    이 여자는 루시아가 아닌 것인가?

    그녀인 척을 하는 악몽인 것인가?

    곰곰이 생각한 유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머리도 잘 안돌아가는군.’

    만약 그녀가 신전의 악몽이었다면 자신을 도와주지도, 마지막에 그렇게 힘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보상인가.’

    그렇다. 보상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세현으로서도 어떤 보상을 받아야 대체 마력이 저렇게 바뀔 수 있는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유세현은 루시아가 인간일 것이라 확신했지만 추후 이강호와 그녀의 신뢰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라도 슬쩍 떠보기로 했다.

    “저 루시아씨?”

    목소리를 살짝 높여 부르기 무섭게 인원들의 틈에 껴있던 루시아의 고개가 그가 위치한 방향을 향해 홱 돌아갔다.

    실로 엄청난 반응속도였다.

    “잠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아, 예.”

    루시아는 다가오는 것조차도 빨랐다.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김주희의 눈매가 매섭고 날카롭게 날이 섰다.

    김주희의 어깨에 타고 있던 운디네가 손등으로 그녀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야, 김주희. 앞으로 저년 잘 견제해라. 내가 봤을 때 쟤는 아퀼라 이상의 정말 역대급 연적이야.”

    “...나도 알고 있어.”

    김주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차라리 루시아가 마물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깔끔히 처리해버릴 수라도 있으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촉이 계속 옆구리를 찌르며 말해주고 있었다.

    루시아라는 여자는 100% 아니, 1000% 인간이라고.

    “혹시 던전 클리어 한 보상 받으셨나요?”

    유세현의 질문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받았어요.”

    “어떤 건지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아...그게 보여줄 수가 없는 거여서...죄송해요.”

    “예? 그게 무슨...”

    “보상이 조금 특이한 거였거든요. 그게...”

    루시아의 시선이 유세현의 옆에 서있는 이강호와 김주희에게 향했다.

    타인을 대할 때와 같이 본능적으로 둘을 경계한 것이었지만.

    ‘세현씨가 믿는 사람들이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특수특성이란 걸 받았어요.”

    루시아는 친절하게 특성명이‘악몽’이란 것까지 덧붙였다.

    이에 웬만해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강호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특수특성이라니?

    특수특성은 절대자, 혹은 신이라고 불리는 등의 정말 특이한 개체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마왕 루시뷀트가 직접 힘을 계승해준 유세현을 제외하고는 스스로를 포함해서 그 어떤 인간도 특수특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특수특성을 얻다니?

    그것도 판도라내부가 아닌 외부 던전에서.

    이는 회귀 전까지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례였다.

    허나.

    ‘판도라에 절대란 없지.’

    마왕의 힘을 승계 받은 유세현이 바로 그 예시였다.

    이강호는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현씨는 어떤 걸 얻으셨나요?”

    “전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예?”

    별 생각 없이 질문한 루시아의 얼굴에 당황감이 물들었다.

    함께 끝에 도달한 그가 아무것도 받지 못하다니?

    유세현이 악몽과의 대화에서 유추한 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려 답했다.

    “악몽의 신전은 역경을 이겨낸 자에게만 보상을 주는 던전이었습니다. 전 악몽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아마 자연스레 제외가 된 거 같습니다.”

    “역경?”

    이강호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유세현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던전의 특성과 특징, 목표에 대해 설명을 늘어놨다.

    그러자 어느 샌가 다가온 이용석이 푸념을 늘어놨다.

    “후...그거 정말 장난 아니었지. 마지막에는 몸이 아주 개박살 나는 줄 알았다니까?”

    가만히 있던 김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대님도 걸리셨어요? 과대님은 면역이시잖아요?”

    “응, 그런데 그땐 던전이...아니, 악몽의 산맥 전체가 달라져 있었어. 효과가 더 강했지. 너희는 이곳으로 올 때 못 느꼈어?”

    이어서 이태광, 이한별, 장원석 등 자연스럽게 몰려든 다른 인원들 또한 말을 더했다.

    이에 이강호가 혀를 찼다.

    인원들의 체감 난이도와 수십만의 몬스터 연합군 중 단 한 마리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건데 역경의 길의 끝은 정말 극악의 난이도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난이도라면 비록 한 번도 보지는 못했을지언정 정말 특수특성을 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정말 얻은 건가...’

    루시아를 흘끗 살핀 이강호가 유세현을 향해 물었다.

    “대화를 해보니 어떤 거 같아? 네가 원래 알던 사람 맞는 것 같아? 아니면 아닌 거 같아?”

    “맞아.”

    “이유는 당연히 있는 거지?”

    “물론이지 짜샤. 내가 이유 없는 거 봤냐?”

    그 말에 이강호는 피식 웃었다.

    그래, 유세현은 확실하지 않는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루시아가 특수특성을 얻은 것은 명백한 사실.

    이것은 굉장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특수특성을 익힐 수 있다.’

    게다가 악몽의 신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장소도 있었다.

    판도라 내부에 위치해 있는, 과거에는 신전이 봉쇄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던 던전.

    [불의신 아그니의 신전.]

    이번에는 신물조각을 빠르게 모으고 내부로 들어가 신전이 봉쇄되기 전 도전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강호가 비소로 무엇인가 깨달은 듯 유세현을 향해 물었다.

    “야 세현아 그러고 보니까 너 신물조각 몇 개 가지고 있냐? 그대로 한 개?”

    “아니. 두 개.”

    “오! 두 개?”

    이강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또한 지니고 있는 조각이 2개였다.

    에반이 1개를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1개만 더 모으면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그 말을 말해주기 무섭게 어두워지는 유세현의 안색.

    유세현은 사실 오늘만큼은 이런 말을 꺼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판도라.

    말은 할 수 있을 때 해두는 것이 좋다.

    유세현이 서 있는 이강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강호야, 해줄 말이 있다.”

    < 상봉(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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