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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284화 (284/612)
  • < 역경의 길(6) >

    “......”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올라 왔으면 잡히기 전에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이어지는 놈의 말이 유세현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던 그였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도무지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허나, 그 순간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어둠의 마력.

    머리가 맑아지며 냉정함이 되돌아온다.

    상태가 순식간에 호전된 것을 파악한 가짜 유혜인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그녀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당신에게는 통하지 않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와 음색이었다.

    이내 모래성처럼 부서지며 흩날리기 시작하는 가짜 유혜인의 육신.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유세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운이 좋다면 동생을 구할 수는 있겠지. 후후후, 여태까지 나름 재미있었어. 그럼...]

    가짜는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놈은 뭐였던 건지.

    유세현은 현재 일어난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 중요한 것은 동생의 구출이었기 때문.

    과연 어떻게 해야 동생을 안전하게 적에게서 구출할 수 있을 것인가.

    유세현은 놈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만큼 앞으로 어떤 제안을 할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분명히 악몽을 버텨낼 수 있는 아이템과 인질을 교환하자고 하겠지.’

    놈들은 이 길의 끝에 다다르고 싶어 하니까.

    허나, 이것은 자신의 강함 때문에 비롯된 착각이다.

    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세현은 단순하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놈을 제압한다.

    그리고 정보를 알아 낸 뒤 일순간에 들이닥쳐 일행을 구출한다.

    검집으로 손을 옮기려던 유세현의 팔이 움찔 멈춰 섰다.

    모종의 위화감을 느낀 탓이었다.

    놈은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의 무력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지 않다면 죽이려 했겠지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놈이 도주할 수단도 없이 자신에게 다가 왔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수단이 있을 터다.

    ‘젠장 이렇게 되면...’

    동생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단 거래를 하는 척 할 수밖에 없다.

    유세현의 손동작을 주시하고 있던 트레크라가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머리가 꽤 돌아가는군.’

    실제로 그는 탈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템명: 간이형 텔레포트 스크롤

    등급: 에픽 [B Rank]

    상세정보: 레드드래곤 세레나 레퀴아르크가 제작한 간이형 텔레포트 스크롤입니다. 소모성 아이템으로 찢을시 원하는 좌표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몬스터들을 하나로 묶어준 과거의 존재가 인간 멸살을 위해 제공해준 아이템.

    한 번 사용하면 다신 사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엄중히 관리되고 있어 대표인 그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울락이 당한 만큼, 심각함을 인지한 모두의 동의를 받고 가지고 온 것이다.

    만약 공격했다면 협상 때 패널티를 부여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터인데.

    영상이 끝나자 트레크라가 모른 척 말했다.

    “후후, 영상을 본 소감이 어떤가.”

    “...뭘 원하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어설프게 떠보지 말고 네 입으로 확실히 말해라.”

    유세현의 답변에 트레크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질은 구출자의 애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천차만별로 변한다.

    인질을 위해 간도 쓸개도 전부 내놓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일정 선을 넘어가면 가차 없이 버리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보려 한 것인데.

    ‘역시 걸리지 않는군.’

    트레크라는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괜히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약해진 놈을 잡을 올가미는 이미 쳐놨기에.

    그렇다. 놈을 약화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이 악몽에게서 그대의 몸을 지켜주고 있는 아이템. 그걸 원하네.”

    “좋다. 내주지.”

    유세현이 쿨하게 수락했다.

    “단, 우리와 인질의 안전은 보장되어야 된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생각해둔 것이 있겠지?”

    “후후. 물론이네.”

    “자세한 내용을 말해봐라.”

    “그러도록 하지.”

    장소, 거래방법, 그리고 어떻게 안전을 보장할지 트레크라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용은 말대로 행해지기만 한다면 유세현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는 존재.

    필히 함정을 파서 어떻게든 제거하려 하겠지.

    결국 전투는 예정되어있다는 것과도 다름없었지만 유세현은 세심히 따지는 모습을 보였다. 너무 쉽게 수락하면 적이 위화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영상에 있는 인원 전원이다.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거래는 없어. 너희가 어떤 종류의 아이템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연히 그 정도의 관리는 가능하겠지?”

    “후후후, 물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네.”

    “좋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유세현이 말을 마치며 몸을 휙 돌렸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유연하게 잘 대처했다.

    놈이 자신에게서 아이템의 존재를 확인할 틈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허나.

    “잠깐! 나도 확인할건 확인해야 되지 않겠나. 그대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의 정보창을 띄워주게.”

    유세현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없다는 것을 들키면 거기서 끝.

    동생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놈들은 바깥으로 도망치겠지.

    ‘어떻게든 둘러대야 한다.’

    유세현은 내면에서 요동치고 있는 감정과는 반대로 의연한 표정을 연기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지금 아이템은 내가 아니라 동료가 지니고 있어서 말이야.”

    “흠, 그런가. 받아오게 기다려주겠네.”

    “하, 귀찮게 하는군. 어차피 교환 전에 확인할 것 아닌가. 굳이 이런 일로 시간을 잡아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을 마치자 트레크라가 유세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넘어가 줄 것인가? 아니면...

    1초 뒤, 트레크라가 몸을 돌렸다.

    “뭐, 것도 그렇구만. 그럼 준비해두고 있겠네. 제때 맞춰서 올수 있도록 하게.”

    “알았다.”

    타다닥-

    트레크라는 그 우월한 스텟으로 유세현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운 좋게 넘긴 고비.

    허나, 유세현은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임시방편에 불과한 조취였으니까.

    동생을 빼내려면 일단 정말 아이템이 있어야 된다. 아무리 유세현이 빠르다지만 바로 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을 놈들보다 빠를 수는 없으니까.

    ‘후...젠장.’

    유세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 * *

    트레크라가 남겨두고 간 기록구슬의 영상을 확인한 셋.

    그들은 한동안 어떻게 해야 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이젠 정상적인 사고 판단도 하기 힘들어진 상황에 좋은 방법을 발견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방도가 있긴 한 것일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는 영상.

    루시아의 시선은 기록구슬이 이태광에게 집중되었을 때도, 이한별에게 집중되었을 때도 언제나 유혜인에게 가있었다.

    이 여성이 유세현의 동생.

    구해주고 싶다. 그래서 유세현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유세현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영감님. 혹시 블링크 말고 다함께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은 사용하지 못 하십니까.”

    “미안하네. 아직 거기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네.”

    “...그렇군요.”

    답을 듣기 무섭게 씁쓰름한 표정으로 변하는 유세현의 얼굴.

    하기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진즉 사용했겠지.

    ‘어떻게 해야 되지?’

    도저히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영상을 보고 있던 루시아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대충 영상을 볼 때는 절대 발견하지 못할, 특이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세현씨.”

    “예.”

    “동생분께서 세현씨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아요.”

    “예? 그게 무슨...”

    “이 부분을 봐보세요.”

    영상에서의 인원들은 유세현을 알고 있냐는 트레크라의 질문에 대개 욕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차피 불가능한 생존.

    죽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퉷! 죽여라 쓰레기들아!]

    루시아가 틀어준 부분은 이태광이 질문을 받는 부분이었다.

    본래라면 이태광에게 포커스가 쏠려있어 구석에 모퉁이에 있는 유혜인은 보이지도 않아야 정상이지만, 일행은 유혜인을 쳐다봤다.

    “?!”

    그녀가 얼굴만 살짝 돌린 채 소리 없이 입만 뻥끗거리고 있었다.

    유세현과 이용석은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달려들어 입가를 주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구하러 오지 말라는 등의 표현일 확률이 높았다.

    허나, 만약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루시아도 말해주었던 것이고.

    한글은 입모양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언어인데다가, 유혜인이 세 글자만을 계속 반복해 말하고 있던 지라 해석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세현과 이용석이 동시에 입 열어 말했다.

    “생존자.”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생존자를 찾아서 합류해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세현. 약속까지 남은 시일은 딱 4일이네.”

    유세현은 그 말에 유혜인이 왜 굳이 생존자를 찾으라는 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어느 것을 떠올린 그의 눈이 번쩍 번뜩였다.

    * * *

    유혜인의 희생덕분에 적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장원석은 걷고 또 걸었다.

    전부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하하...”

    허탈감 섞인 웃음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때 동료들과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그럼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는 길게 뻗어있는 고목에 등을 기대고 웅크렸다.

    유혜인에게서 넘겨 받은 악몽의 메달을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머리가 아프다.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다.

    점점점 속으로 파고드는 심마.

    그때.

    사스슥-

    풀숲이 세차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새 또다시 추격이 붙은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풀숲에서 아라크네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쭈그려 앉아있는 장원석을 본 놈이 한 순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크크, 드디어 맛이 간 건가.”

    쉬이익-

    엉덩이에서 뿜어져 나온 실이 엄청난 속도로 장원석의 무력한 몸을 감쌌다. 더 이상의 인질은 필요 없었지만, 아직 지령이 이곳까지 다다르지 않았기에 포획한 것이다.

    “그냥 죽여...”

    “크크, 그건 네놈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아라크네는 신이 나서 장원석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적은 일반 병사들은 당해내지 못하는 상등품이다.

    그런데 포획한 병사는 추후 포획물을 죽인 뒤 나온 코인과 스킬을 흡수할 수 있다.

    그야말로 횡재!

    신이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크으, 더 좋은 직위를 받겠는데?”

    “쳇, 저놈이 내 쪽에 있었어야 했는데. 운도 좋아.”

    동료 아라크네들도 부러움을 표시 했다.

    이해가지 않는 행동에 장원석이 물었다.

    “왜...나를 살려가는 거냐.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에게 얻을 정보 따위는 없어. 그냥 죽여라.”

    “크크크,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군.”

    “무슨 뜻이지?”

    평소였다면 장원석의 질문에 반응하지 않았을 터였다. 정보는 그만큼 중요하니까.

    허나, 어차피 도망치지 못할 것을 아는데다가 기분이 좋았던 아라크네는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지금 이곳에 또 다른 인간이 올라왔다.”

    “야! 케라쿠르! 지금 적에게 무슨 소리를...”

    “뭐 어때. 어차피 이놈은 끝인데.”

    그 말에 장원석의 눈동자가 한 순간 흔들렸다.

    새로운 인간이 올라왔다고?

    ‘설마?’

    이강호인가?

    이강호가 얼마나 유혜인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젠장, 자살을 할 걸...아니 메달이라도 버려뒀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늦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갑작스럽게 눈앞으로 일어난 폭발.당황한 아라크네들이 깜짝 놀랐는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뭐, 뭐냐! 대체 누가!”

    그리고 놀란 것은 장원석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뭔 일이...’

    쉬이익-

    섬광이 몰아친다.

    “노, 놈들을 막아라!”

    “너, 너무강해!”

    이윽고 장원석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군가의 등에 얹혀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는 상태였다.

    < 역경의 길(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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