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83화 (283/612)
  • < 역경의 길(5) >

    리체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교차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태광은 볼 수 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함, 두 개의 마음이 뒤섞인 리체의 옅은 미소를.

    “하아압!”

    콰광!

    콰과광!

    모든 힘을 폭발시켜 적을 베어나가는 이들.

    정신이 부셔져도 상관없다.

    몸이 견디지 못해도 상관없다.

    생존을 포기한 그들은 무척 강했다.

    “큭! 조심해라! 예상보다도 훨씬 강하다!”

    엄청난 기세에 치는 떠는 트롤전사들.

    힘을 무시하고 개개인으로 달려들던 트롤전사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협공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빈틈을 노려오는 적의 병장기.

    촤자작-

    제일 먼저 쓰러진 것은 케벨이었다.

    이어서 제라스도 제압이 되었다.

    리체에게 향하는 수많은 검.

    트데론을 상대하고 있던 이태광이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크흐흐! 여기까지다!”

    광소를 터트린 트데론이 폴암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완전하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친 호흡과 식은땀.

    필사적으로 분발하고 있다지만 한계에 다다른 것이 현 상태로는 결코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방어하면 필히 지면에 처박히리라.

    그리고 그때 놈을 제압하면 임무종료.

    허나.

    “크아아아아! 네놈들이이이이!”

    이태광의 거친 포효와 함께 트데론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더욱 강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기운.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공격을 회피한 이태광의 대검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트데론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트데론은 그 순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피했다고?’

    게다가 반격까지?

    대검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쳐지나간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트데론의 손으로 목을 쓱 쓸었다.

    피를 확인한 그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본래라면 자신에게 생채기하나 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병장기는 적당히 힘을 빼고 휘두르고 있다지만 빨리 끝내기 위해서 움직임만큼은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대체 어떻게...’

    상념을 이어갈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태광이 미친놈처럼 달려들었기 때문.

    그리고 그의 대검을 받은 순간.

    ‘?!’

    트데론의 다시 한 번 더 경악했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부들부들 떨리는 팔.

    지금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인가?

    이태광의 타오르는 눈동자가 트데론을 잡아먹을 듯 응시했다.

    “감히 내 팀원들을...전부, 전부 씹어 먹어주마!”

    콰아앙!

    끝없이 공격이 이어진다.

    얼마나 빠르고 흉흉한지 주위에 있는 트롤병사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덕분에 처음 등장 때는 상당한 여유를 보였던 트데론이었지만, 지금은 방어하는 데만 해도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유효타.

    “크으으으! 이자식이!”

    트데론의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그는 지금까지 이태광을 사지 멀쩡한 상태로 포획하기 위해 애썼다.

    일단 자른 다음 필요시 다시 붙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지만 악몽에 상당히 노출되어있던 만큼, 쇼크로 인해 정신이 붕괴되며 죽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가 거꾸로 치솟은 지금 트데론의 머릿속에 명령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놈이 자신보다 강하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놈을 죽여 버리리라. 모든 것을 빼앗으리라.

    “이것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해봐라!”

    쉬이익-

    트데론의 우측으로 불꽃의 날개가 피어올랐다.

    깃털하나하나 날카로운 창의 형상을 띠고 있는 모습.

    트데론이 폴암을 내지르자 상하좌우,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간 불의창이 포물선 형태를 그리며 이태광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이태광은 황급히 진원진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부족한 정신력은 그에게 마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그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가가서 놈의 목을 딴다. 그리고 장렬히 죽는다.

    그의 망막에 불의창이 커다랗게 맺힌 순간이었다.

    쉬이익-

    콰아앙!

    상공에서 이태광의 등위로 뚝 떨어지는 트롤 한 마리.

    “커, 커헉!”

    이태광을 일격에 기절시킨 놈은 스킬을 날려 순식간에 불의창을 걷어냈다.

    트롤의 싸늘한 눈이 트데론을 지그시 응시했다.

    트데론이 몸이 움찔거렸다.

    눈앞에 있는 존재는 트레크라의 오른팔로써 자신보다도 아늑히 높은 직위에 있는 자였기 때문.

    딱 이 상황에 나타나다니.

    차갑게 식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머리.

    “분명 멀쩡하게 포획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세서 저도 모르게...”

    난리 났다고 생각한 트데론이 황급히 변명했지만 천천히 다가온 트롤, 디뷔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목을 낚아채 움켜쥐었다.

    “커, 커어어억...”

    트데론은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

    힘의 차이는 명백한 상황.

    대드는 순간 정말 죽을 것이기에.

    ‘젠장...내가 고작 인간 따위 때문에...’

    트데론은 이태광을 원망하며 최대한 버텼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다뷔르가 트데론을 휙 내던졌다. 그리고는 넌지시 한마디를 했다.

    “다음에도 명령을 어긴다면 이렇게는 안 끝날 것이다.”

    “허억...허억...아, 알겠습니다.”

    트데론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는 다뷔르.

    트롤병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트데론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인 이태광에게 향해있었다.

    그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일이 다 끝나면 반드시 내손으로 죽여주마.’

    * * *

    포획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크라에게 다다랐다.

    허나, 보고 하는 인원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못했다.

    왜냐하면.

    “한 마리를 놓쳤다고?”

    “예.”

    도주한 두 명중 유혜인이 중간에 한 번 더 희생한 결과였다.

    트레크라가 혀를 찼다.

    7명중 1명.

    정말 재수 없으면 도망친 그 한 명이 놈들이 구하려고 하는 인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트레크라는 마저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잡아둔 포로가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놓친 것은 놓친 것이고 할 일은 해야 되었기 때문.

    붙잡힌 일행은 벌거벗겨진 상태로 거목에 매달려있었다.

    악몽이 깊숙하게 파고들어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 아니, 이건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수준이다.

    ‘역시 대응하는데 힘을 전부 소진한 건가.’

    천막으로 하늘을 가려 비를 맞지 않게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

    ‘서둘러야겠군.’

    기록용 수정구슬을 작동시킨 트레크라는 우선 누가 제일 멀쩡해 보이는지 살폈다.

    ‘저 암컷이 그나마 낫군.’

    그는 깨어있는 유혜인에게 다가가 친근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반갑네 인간. 나는 제 2사단을 이끄는 사단장 트레크라라고 하네.”

    그러자 유혜인의 침을 퉷 뱉었다.

    “꺼져. 이 오물 같은 놈아.”

    어차피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

    무슨 이유로 말을 걸어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놈들의 뜻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잡힌 주제에 되려 도발이라니, 무척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트레크라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되려 더욱 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응을 해준 것만으로도 그의 작전은 이미 절반 정도 먹고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지켜 보고 있던 다른 대표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작전이고 자시고 자신들이었다면 저런 수모는 참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

    “무서운 작자야. 적이 아니라 다행이군.”

    “확실히...”

    트레크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허허, 그대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대들에게서 정보를 빼내거나 혹은 능욕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큰 오산이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그대들에게 정보를 빼낸단 말인가.

    난 단지 그대에게 좋은 소식 하나를 전해주기 위해 온 것이라네.”

    “......”

    유혜인이 치켜뜬 눈으로 트레크라를 노려봤다.

    좋은 소식?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트레크라가 포켓에서 또 다른 기록용 수정구슬을 꺼내며 말을 계속했다.

    “얼마 전 또 다른 인간들이 이 장소에 도착했네. 그렇게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상당히 수준급으로 강했지.”

    지이잉-

    트레크라가 마력을 주입하자 인원들의 앞으로 영상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치고 오우거 군단이 휩쓸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영상이었다.

    유혜인은 얼른 눈을 감았다.

    이것이 만약 환각을 조성해 자백하게 만드는 아이템이라면 시간이 흘러 쓸모없어졌을 전술은 둘째 치고 이강호나 에반 등 주요 인물들의 능력에 대해 불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정말 순수한 영상일 뿐이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그대를 보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지. 이렇게 말일세.”

    트레크라가 억지로 유혜인의 눈꺼풀을 올렸다.

    저항했지만 무용지물.

    그 순간 유혜인의 눈앞으로 아이템 정보창이 나타났다.

    본래라면 소유권이 없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주인인 트레크라 허락했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후후, 이걸로 이상한 아이템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라 생각하네. 두고 갈 테니 보고 싶으면 보고 말고 싶으면 말게나.”

    트레크라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유혜인은 눈을 다시 감았다. 구태여 자신들을 살려두고, 이것을 보여주는 데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차라리 죽고 싶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나 이성이나 둘 다 악몽에게서 여전히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지 사실은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영상.

    음량도 상당히 커 계속 들려오기에 무시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유혜인은 마침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떴다.

    한 인물이 클로즈업 되어 비치자 지진을 일으키는 눈동자.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트레크라가 물었다.

    “혹시 아는 인물 인가?”

    유혜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 *

    이동하던 유세현의 시선이 안개너머에 있는 풀숲을 향했다.

    홀로 접근해 온 단 한 마리의 연합군.

    잡졸이었다면 운 좋게 살아남은 몬스터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지만 놈은 이전 처리한 오우거 대장보다도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뭐 때문에 이곳에 홀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처리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찬스.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마족화를 시전한 유세현은 엄청난 속도로 적을 향해 나아갔다.

    적과의 거리는 200m.

    그런데 100m도 안 남았을 때 어마어마한 포효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쩌렁쩌렁 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인간은 들어라! 나는 네가 찾고 있는 인질을 붙잡고 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간주하여 모두 죽일 것이다! 혼자 왔으니 병력은 두려워할 필요 없다!”

    유세현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인질이라고?

    자신의 목적이 들킨 것인가?

    언제?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잡힌 것인가? 아니면 함정?

    억지로 머리를 굴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린 유세현이 입술을 곱씹었다.

    함정이었다면 어마어마한 대군이 몰래 숨어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놈은 정말로 단신.

    그는 마족화를 해제한 뒤 트레크라의 앞에가 섰다.

    트레크라가 유혜인때와 같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 이렇게 봐서 반갑네 인간.”

    물론 유세현이 그 행동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증거.”

    “하하, 성격이 급하군.”

    트레크라가 이전처럼 정보창을 공유한 뒤 구슬을 사용했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영상.

    세심하게도 한 명 한 명 전부 찍어놓은 상태였기에 알아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심장이 욱신 아파온다.

    ‘젠장! 젠장! 젠장!’

    옆에서 가짜 유혜인이 비릿한 미소를 내지었다.

    [후후후, 한발 늦었네?]

    < 역경의 길(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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