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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282화 (282/612)
  • < 역경의 길(4) >

    솨아아-

    끝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그리고 악몽.

    이것들은 살아남은 7명의 인원들의 심신을 끝없이 좀먹어 무너트리기 직전이었다.

    “태광오빠. 괜찮으세요?”

    유혜인의 말에 이태광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떠한 조취를 취해도 사라지지 강렬한 두통.

    그 고통은 흡사 뇌를 쥐어짜는 느낌과도 같았지만 이태광은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거동이 힘들어진 리체와 2명의 길드원.

    여기서 자신까지 무너져 버린다면 그야말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다잡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할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허나.

    ‘어떻게 해야 되지?’

    전력의 차는 수십 배를 뛰어넘어서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그런 놈들이 탈출 장소를 가로막고 있다.

    항상 자신감이 충만하던 이태광으로서도 지금만큼은 그 어떠한 방도도, 수단도 떠오르지 않았다.

    현재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리에서 일어선 유혜인이 들고 있던 동그란 메달에 마력을 불어넣자 메달에서 퍼져 나온 시꺼먼 빛이 쓰러져 있는 인원을 둘러쌌다.

    아무런 차도도 없어 보이는 모습.

    허나, 메달의 효과는 확실히 발휘되고 있는 상태였다.

    아이템명: 악몽의 메달(Ⅱ)

    등급: 레전더리 [SS Rank]

    상세정보: 악몽의 거짓된 축복이 담겨져 있는 메달입니다. 사용시 일정 시간동안 악몽의 침투를 차단해 상황 악화를 막아 줍니다. 악몽의 신전 내부에서만 효력이 발휘됩니다.

    한 달 전, 정말 극적으로 발견한 아이템이었다.

    물론 효과가 현 상황의 유지인 만큼, 상당히 진행이 된 그들에게 큰 효과는 없었지만.

    이것이라도 없었더라면 현재 그들 중 거동이 가능한 인원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만약 처음부터 이것을 발견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많이 나았을까?

    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그들은 애초에 밀려서 이곳으로 도망친 것이었기 때문.

    그렇기에 그들이 노릴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쥐죽은 듯, 놈들이 클리어 할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후에 탈출하는 것.

    허나.

    무슨 영문인지 놈들이 나가지 않는다.

    연합군의 의도를 모르는 그들로서는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대체 어떻게...’

    몇 번을, 수십 번을 되풀이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버티자. 버텨야 된다.’

    이태광이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 경계는 1인 3교대로 아슬아슬하게 행해지고 있는 상황, 보초를 서고 있는 장원석과 교대를 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타다닥.

    다급해 보이는 발소리.

    이태광이 은신처를 나서기도 전 장원석이 허겁지겁 내부로 뛰어 들어왔다.

    “허억...허억...혀, 형님.”

    단 한 마디.

    이태광과 유혜인은 뒷말도 듣지 않은 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정신을 차린 리체가 허겁지겁 집어 들려는 유혜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놓고 가. 어차피 우리는 얼마 못 버텨.”

    이어서 이한별과 여타 인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언니! 내가 어떻게 언니를 두고...”

    “네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데 안 되긴 무슨. 내 말대로 해.”

    유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세현이 그녀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혈육이라면, 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리체는 친언니와도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두고 갈 수 있단 말인가?

    리체와 이한별, 나머지 사람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지지대로 하여 힘겹게 자리에 일어섰다. 그들은 곧장 세 명에게서 몸을 돌렸다.

    “우리들은 마음의 정리를 끝냈어. 우리가 시선을 끌 테니까 세 명은 그사이 이곳을 벗어나.”

    유혜인은 붙잡으려 했다.

    허나 그 순간.

    목 끝을 향해 검을 겨누는 리체.

    “더 이상 접근하면 벨 거야.”

    사뭇 진지한 눈빛이었지만 유혜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자국 더 다가갔다.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흐르자 덜덜 떨리는 리체의 손.

    그리고 그 순간.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바람과 같이 접근한 이태광이 리체를 잽싸게 둘러멨다.

    리체는 몸을 바둥거렸다.

    “다, 당신...내려놔! 내 몸 만지지마!”

    “......”

    이전부터 당당히 마음을 밝히고 그녀에게 구애를 해온 이태광이었기에 평소였다면 당황하며 쩔쩔 메었을 터였다.

    리체에게 어떠한 과거가 있는지도 알고 있었고, 겉으로 생긴 것과는 다르게 좋아하는 여성에게는 무척 약한 타입이었으니까.

    허나, 지금 만큼은.

    “벗어나자. 혜연아 미안하지만 한별이는 네가 들어줘.”

    “아, 알았어요 오빠!”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제압.

    리체가 으득 이를 갈았다.

    지금 그녀가 보기에 전부 살리려는 이태광의 행동은 이루지 못할 이상에 불과했다.

    기동력이 낮아져 필히 붙잡히게 될 터.

    그렇기에 이건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나서주겠다는데 그 끈을 놓지 못하다니!

    ‘대체 얼마나 미련한 거야 당신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이태광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이태광, 당신! 내려주지 않으면 평생 증오할거야! 흡사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다시는 말도 섞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깐 나라도 놔줘!”

    허나 돌아오는 답변은.

    “시끄러워.”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날이 잔뜩 선 말투였다.

    밖으로 몸을 돌린 이태광의 말이 이어진다.

    “당신이 나를 싫어해도, 무시해도 상관없어. 내 구애를 받아주지 않아도 좋아. 그러니깐...포기하지만 마.”

    타다닥-

    이동이 시작되었다.

    리체는 저항하는 것을 멈췄다. 지금 저항하는 것은 동료를 되려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위였으니까.

    ‘멍청한 남자.’

    리체가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힘에 제압된 상태였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친동생조차도 자신을 높이 올라가기 위한 장기말로 생각했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그 누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 해준 적이 있었던가.

    발렌에게 몸이 더럽혀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그의 구애를 받아주었을 터였다.

    철퍽.

    풀숲 속을 이동하던 이태광이 아주미미한 소리에 반응해 몸을 멈췄다.

    이에 따라서 움직임을 멈추는 둘.

    평소였다면 집중력이 약해져 있던 만큼 듣지 못했을 터지만, 리체의 폭언이 되려 이태광을 각성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쉬이익-

    안개 틈에서 수많은 실이 뻗어 나와 나무에 걸쳐진다.

    등장한 아라크네들이 실을 타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그리고 이어서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종족들.

    “놈들은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마라!”

    말을 들은 이태광과 인원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들킬 것인가? 들키지 않을 것인가?

    꼼꼼한 리자드맨들이 풀숲을 헤집기 시작하자 장원석은 사색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거의 99.99% 확률로 발각된다.

    어느 샌가 다가온 리자드맨 한 마리가 그들이 숨어있는 풀숲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젠장, 틀렸다.’

    장원석은 곧장 마력을 끌어올려 무공을 사용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놈들의 은신처를 발견했다!”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목소리.

    풀숲을 향해 손을 뻗었던 리자드맨의 목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휙 돌아가더니 곧장 몸을 날렸다.

    장원석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확장된 눈동자를 깜빡였다.

    이제는 빠른 것을 뛰어넘어 당장에 터질 것만 같은 심장.

    그들은 일대의 연합군이 전부 이동하고 나서야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 * *

    이태광 일행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놈들이 깔아둔 트랩을 마주하거나, 아라크네가 뿌려놓은 실에 걸릴 뻔 하는 등 수 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물론, 전부 잘 대응해서 이상은 없었지만.

    저편에서 등장하는 트롤 무리.

    이태광을 포함한 인원들의 미간이 구겨졌다.

    도무지 끝이 없다.

    평소 추격대에 몇 배나 되는 느낌.

    허나, 인원들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반나절 전보다는 포위망이 느슨해진 것이 상황이 좋다.

    둘러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놈들.

    놈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크으윽.”

    잘 버텨오던 팀원 한 명이 머리를 쥐어 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결코 크지는 않은 음성.

    허나, 이것을 놈들이 포착하기 못할 리가 없었다.

    후방에 있던 트롤 한 마리가 몸을 휙 돌렸다.

    콰과광!

    흙더미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태광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야를 가리기 위해 망설임 없이 스킬을 사용한 것.

    “뛰어!”

    인원들은 전력질주 했다.

    허나,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트롤 한 마리.

    “크하하하! 여기 있었구나!”

    이태광은 어깨에 있는 두 사람을 앞으로 던지기 무섭게 포켓에서 대검을 꺼내 트롤 향해 휘둘렀다.

    이 모든 것이 0.5초도 안 되어 이루어진 일.

    콰아앙!

    대검과 폴암이 격돌하자 거대한 파공성이 일었다.

    천부장의 직위를 맡고 있는 트롤, 트데론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하! 이걸 막아?”

    죽이지 않기 위해 적당히 한 것이라지만 차마 방어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태광이 입을 악물었다.

    몸 상태만 정상이었어도 지금의 일격으로 방심하고 있던 놈을 처리할 수 있었을 터인데.

    날아온 리체를 받은 유혜인의 몸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태, 태광오빠!”

    “먼저가! 곧 따라가마!”

    믿음직한 말투. 하지만 그곳에 있던 모두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온다고?

    적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허나, 지금 함께 싸우면 100% 전멸 확정이었다.

    유혜인이 눈물을 머금고 뒤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혜인아. 넌 계속 가.”

    리체와 이한별이 동시에 유혜인의 어깨에서 빠져나왔다.

    동시에 귓가를 울리는 또 다른 말.

    “거지같은 세상이었지만 네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 고마워.”

    이한별도 한마디를 남겼다.

    “혜인아, 세현씨를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 알았지?”

    이어서 장원석이 붙들고 있던 두 명도 이탈.

    네 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트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입술을 질끈 깨문 장원석이 넋이 반쯤 나간 유혜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야돼!”

    “하, 하지만...”

    “모두의 희생을 개죽음으로 만들 생각이냐! 개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유혜인은 그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그래, 죽는 것이야 말로 최악이다.

    살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남아서 놈들을 전부 죽여 버릴 것이다.

    그녀는 달리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트데론과 제대로 붙기 시작한 이태광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유특성, [광전사]의 발현.

    “이앞으로는 못간다아아아!”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일었다.

    잽싸게 회피한 트데론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단순한 내려찍기.

    그런데 위력은 주변을 초토화 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다 죽어가는 놈이 저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니?

    ‘아니, 다 죽어가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눈을 번뜩인 이태광의 대검이 피처럼 붉게 물든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모든 힘을 쥐어짜내 억지로 발현시키는 스킬.

    ‘광혼마신공(狂昏魔神功) 제 5식 광마격참(狂魔激斬)!’

    후웅!

    콰아아아앙!

    대검이 지나간 궤적에서 발산된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전방에 위치한 모든 것을 휩쓸었다.

    어찌나 위력이 강한지 범위 외에 있던 트롤조차도 그 풍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는 모습.

    “허억 허억...”

    이태광은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는 시야.

    몇 초 버틴 것이지?

    ‘더 버텨야 된다.’

    하지만 그 순간 측면에서 노려오는 한 마리의 트롤.

    이태광이 반응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아, 안되는데. 더 버텨줘야 애들이 이곳을 벗어날 수...’

    그때 이태광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검기.

    “크아악”

    트롤은 큰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났다.

    검기를 확인한 이태광의 눈이 떨렸다. 그가 무척 잘 알고 있는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태광이 구슬픈 표정이 되어 뒤를 바라봤다.

    리체, 이한별, 3번 조장 제라스, 4번 조장 켈벨.

    “왜...”

    이태광의 중얼거림에, 그들은 적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답했다.

    < 역경의 길(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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