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경의 길(2) >
그러자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하피, 퀴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반박했다.
왜냐하면.
“트레크라, 놈들은 우리와 달리 가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가호를 받고 있는 우리조차도 가끔 정신이 흔들리지. 그런데 뭐? 이 악몽을 뚫고 새로운 놈이 올라 왔을 거라고? 그것도 패널티를 이겨내고?”
그렇다.
연합은 강한 병사와 악몽을 중화시킬 수 있는 아이템 등 이 역경의 길을 공략하기 위해 애초부터 단단히 준비하고 들어왔다.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고.
아무 준비도 안 돼 있던 인간세력과는 그 차이가 무척 큰 것!
허나, 그런 그들도 불가능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트레크라, 2차로 투입된 우리 병력들이 어떻게 됐는지 그새 까먹은 건 아니겠지?”
바로 병력의 2차 투입.
본대만으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자면 이 던전은 히든던전 중에서도 최상위 SSS클래스.
던전의 끝에 당도한 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판도라 내부를 대비해 투입한 것이다.
강자들이 안정성을 확보하면 뒤에서 따라가는 계획.
하지만 그런 계획은 예상치 못했던 변수로 인해 완전히 무산되었다.
우선 후발주자에게는 가호가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위를 항상 맴돌며 대리자를 나락으로 내모는 저주.
2차 병력의 대다수는 역경의 길에 진입하기는커녕 길목 역할을 해주는 신전의 끝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그나마 간신히 버텨 내부로 들어온 몇몇도 얼마못가 자아가 완전히 분열.
퀴린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도 전혀 틀린 것이 아닌 것이다.
아니, 되려 지당하다.
허나.
“인간들도 우리와 같이 어디선가 힌트를 얻어 모종의 방법을 알아냈을 수도 있는 법이지. 놈들은 얍삽하고 영악하면서 끈질기지 않나. 게다가 이전 놈들이 발견된 장소는 서쪽에 있는 벼랑 아니던가. 놈들이 우리 포위망을
몰래 뚫고 아래로 내려갔다 오는 건 말이 전혀 안 된다고 생각된다만...”
“하긴...”
대표들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에 퀴린이 질렸다는 얼굴이 되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후우...그래 뭐...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 그래서? 적이 새로 올라 온 거라고 치고 누가 전담할래?”
“흠...실종된 병사는 하피라고 들었는데.”
“아, 그래서 내가하라고?”
“뭐, 어차피 누가해도 상관없지 않아? 어차피 숨은 꼴을 보니 대군이 몰려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 좋아. 입구 쪽의 추격은 내가 맡도록 할게.”
퀴린의 수긍.
허나 트레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이 길목을 지킬 인원들을 제외한 전부가 인간을 쫒도록 하세나.”
“...뭐? 왜?”
대표들이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 놈들을 쫒는데 시간을 허비하려 하다니?
고위 전사가 당한 것은 분명 큰일이었지만, 그들은 사실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국면에 봉착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심각한 사태란...
트레크라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이 길의 끝에 다다른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었네. 하지만 완전 클리어에 대해서는 아직 마땅한 해답을 못 얻은 상태지.”
그렇다.
그들은 진즉 역경의 길 끝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래서 당장에 빠져 나갈 수도 있었다.
문제는 길 끝에는 아주 좁고 한명씩만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이어져있었는데 이것을 넘어서야지만 그들이 본래부터 노렸던 강한 힘을 얻는 게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실패.
포탈을 넘어 발을 내딛는 순간 그들을 지켜주고 있던 가호가 부서지며 악몽이 봇물 터지듯 단번에 쏟아져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시도한 100명의 전사는 채 30보를 가지 못해 정신이 붕괴해 사망.
그 이후로는 간간히 도전해가며,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지역을 이잡듯이 뒤졌지만 진전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퀴린이 깃털달린 팔을 펄럭이며 대뜸 박수를 쳤다.
“아!”
트레크라의 눈이 더욱 빛났다.
“퀴린, 자네는 눈치 챈 것 같군.”
“이번에 새로 올라온 놈들이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바로 그거네.”
이에 각 대표들의 눈동자 또한 번뜩였다. 전사들이 당한 것에만 포커스가 쏠려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확실히 아래에서 새로 올라왔다면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듣자마자 이걸 떠올리지 못하다니!
“만약 아니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겠지. 놈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도 나눠서 움직이도록 하지.”
트레크라의 말에 울락이 철퇴같이 두꺼운 주먹 관절을 꺾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크흐흐. 그럼 난 쌩쌩한 쪽으로 가겠어.”
“나는 그럼 기존 놈들의 수색을 계속 이어서 하도록 하지.”
“난 그럼 그냥 이곳이나 지키도록 할게.”
각자의 입맛에 따라 순식간에 분할되는 역할.
그들은 오랜만에 발을 분주히 놀렸다.
* * *
“후욱...후욱...”
가부좌 자세를 취한 이용석은 필사적으로 심법을 운용해나갔다.
진정이 되기 시작하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는 호흡.
“여기서 쉬고 있으세요.”
유세현은 하피를 들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행여나 고통스러워하는 하피의 모습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우려한 것이다.
“그냥 죽여라.”
“......”
종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세현은 3시간이 지나지 않아 놈들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측 잔당이 아직 살아있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두근 두근 두근.
안 그래도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더욱 빠르게 펌프질을 했다.
잔뜩 고양되는 육신.
잔당이 동생이라는 확신은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너무도 충분했다.
유세현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밝은 표정이 되어 제자리에서 몸을 몇 번이고 흔들며 기쁨을 표출했다.
그리고 그것을 무표정 상태로 물끄러미 지켜보는 가짜 유혜인.
그리고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루시아.
시선을 느낀 유세현의 행동이 기계가 멈추듯 일제히 정지했다.
사실, 방금 전까지 그는 루시아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너무 기뻐서 깜빡 잊어버렸을 뿐.
촐싹대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기에 유세현은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루시아씨. 쉬고 계시지 여기까지 왜...”
“...계속 비 맞고 계시잖아요. 우리 전부 괜찮아 졌으니 나머지는 들어와서 하세요.”
“아뇨, 어차피 끝났습니다. 이곳에서 마무리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유세현은 놈들이 알고 있는 한에서 정보를 모두 캐냈다.
그렇게 많은 병력들이 멀쩡한 이유.
그리고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가호에 대하여 들은 유세현이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역시 몸을 지켜주는 아이템이 있었군.’
게다가 의도치 않게 좋은 정보까지 얻었다.
역경의 길을 넘어서면 모종의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유세현이 판단하기에 이 던전은 판도라 외부 사상 최악의 던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강한 스텟을 지닌 자들조차도 나락으로 떨어트리니 말이다.
루크루프의 저택도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던지라 레전더리 C등급의 전쟁갑주를 얻었는데, 이곳에선 과연 무엇을 줄 것인가.
뭔진 몰라도 그 이상일 터.
유세현은 우선순위를 정했다.
첫 번째는 동생의 안전.
동생이 죽으면 그 어떠한 것도 필요 없다.
두 번째는 놈들을 쳐부수고 가호를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강탈하는 것.
세 번째는 끝까지 나아가 힘을 얻는 것.
유세현은 전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부로 진입한 알베타스와도 맞먹은 이상, 이 외부에서 더 이상 1:1로 자신의 상대가 되는 놈들은 없을 테니까.
엄청난 물량공세로 인한 체력저하와 마력고갈만 조심한다면...
처리한 하피를 키메라화 시킨 유세현은 루시아와 함께 폭우가 내리는 숲을 걸어 나갔다.
퀭한 루시아의 눈을 본 유세현이 먼저 물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거짓말이란 것이 너무도 뻔히 드러나 보이는 안색이었다.
유세현이 가호에 대해 먼저 알려주려던 찰나였다.
루시아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세현씨에게 그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유세현은 멋쩍은 표정이 되어 볼을 긁적였다.
“하하. 저도 사람입니다만...”
“아! 나쁜 뜻으로 한말은 절대 아니에요. 그냥 정말 의외여서...”
루시아의 얼굴이 뭔가를 잘못한 아이마냥 화끈 달아올랐다.
유세현은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이는 루시아.
신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마음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유세현이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게 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저놈 때문에 내가 죽었는데 잘도 웃을 수가 있구나 루시아.]
“......”
지드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스트피셔는 쉴 새 없이 마음을 들쑤시며 그녀의 속내를 까발리고 있었기 때문.
한순간 흐트러지는 그녀의 호흡.
그녀는 5명의 인원 중 지드먼이 후벼 파는 것이 제일로 견디기 힘들었다.
유세현은 애써 모른 척 했다.
관여가 되어있는 이상 아무리 좋게 행동을 취해 봤자, 루시아의 성격상 되려 죄책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기 때문.
‘사적인 대화는 앞으론 절대 나누면 안 되겠군.’
그리고 사투는 그들이 있던 장소뿐만이 아닌 작은 동굴 속에서도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아린의 앞에 서있는 키만 올란드와 캐서린, 그리고 마벨.
놈들은 마치 염불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아린을 괴롭혔다.
호흡법을 마친 이용석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 트라우마도 없던 자신도 이정도로 흔들리고 있건만.
아린이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새삼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대단해 정말...’
동굴로 돌아온 유세현은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방향을 정했다.
목적지는 마지막으로 사람이 목격된 장소인 북서쪽.
아린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바로 출발하세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적이 더 숨통을 죄여 올 터이니.”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일행은 이동을 개시했다.
* * *
마치 적 아지트에 침투한 스파이처럼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유세현.
방해가 있을 수 있는 만큼, 동생을 찾기 전까지는 웬만해선 전투를 펼치고 싶지 않았던 그였지만 포위망이 너무도 촘촘해 안개속이라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어쩔 수 없군요. 쓸어버리죠.”
이윽고 발생한 전투.
일행은 압도했고, 그 소식은 놈들을 잡기위해 남하하고 있던 각 대표와 상급전사들의 귀에 까지 흘러들어갔다.
울락이 버럭 화를 냈다.
“10-3부대가 뚫렸다고?”
“예.”
“...트레크라의 말이 옳았네. 놈들은 기존의 놈들이 아니야. 기존의 놈들은 뚫을 힘 같은 건 없어.”
퀴린이 중얼거렸다.
이에 혀를 차는 울락.
“큭! 적의 수는 몇이나 되지?”
“그, 그게 전멸 한지라 자세한 것은...”
“허...이번에도 전멸? 그럴 리가...10-3부대의 지휘관은 우르뤠인데...설마 우르뤠도 당했다는 거냐?”
“아마도...”
“아마도는 뭐냐! 확실하게 말해라!”
“그, 그게...실종상태입니다.”
전령의 말에 퀴린, 울락을 포함한 고위 전사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우르뤠는 오우거 종족이다.
용맹한 오우거는 죽으면 죽었지 도망치지 않는다.
아니 흡사 퇴각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대에 도착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실종이라니?
울락이 거대한 도끼를 치켜세웠다.
“너...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하,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르뤠 전사를 제외하고도 다수의 병사들이 실종되었습니다.”
“......”
그 순간 퀴린은 온몸이 싸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있던 악몽전사.
미간을 좁힌 그녀가 중얼거렸다.
“설마...놈은 악몽전사 전사뿐만 아니라, 타인도 조종할 수 있다는 건가?”
“......”
평소 막말을 잘하는 울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섣불리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또한 퀴린과 생각이 똑같은 탓!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던 레잔이 말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어설프게 공격해서는 피해가 커진다. 놈들의 위치를 확실히 해서 단번에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동감이야 레잔.”
레잔과 퀴린은 희생을 줄이고자 협동전선을 펼칠 생각을 가졌다.
허나, 울락은 달랐다.
“하! 놈이 수작을 부려 우르뤠의 진형을 격파했다 해도 어차피 나한테는 안 돼! 난 따로 행동하겠어!”
“울락,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
“닥쳐, 도마뱀. 네놈 때문에 빠지는 거야! 그러니 명령하지 마라!”
울락은 한 마디라도 더하면 그 큰 도끼를 내려칠 기세였다. 레잔이 혀를 내둘렀다.
“후...맘대로 해라.”
“큭,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그럼 난 여기서 바로 이탈하도록 하지.”
울락의 손짓 한 번에 마치 물살이 갈라지듯 오우거들이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군세와 함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울락.
퀴린이 레잔을 향해 말했다.
“당연히 따라갈 생각이지?”
“물론.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까.”
이윽고 레잔과 퀴린이 명령을 내리자 두 군세가 오우거가 사라진 쪽을 향해 일제히 방향을 꺾었다.
< 역경의 길(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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